[창조를 말하다]‘희망 우체부’ 고도원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

‘꿈 너머의 꿈’은 내 꿈을 바탕으로 다른사람에게 사다리를 놓아주는 것

8년 전 쯤으로 기억된다. 메일함에 낯선 이가 보낸 편지 한 통이 있었다. 제목은 ‘희망만 있다’ 였고, 보낸이는 고도원이었다. ‘뭐지?’ 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였었다. 여행가 신영길의 ‘막장에서’라는 상반된 제목의 시가 나왔다. 시 아래에는 편지를 보낸 이의 글이 덧붙여져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삶의 막장에서, 고통과 절망으로 울부짖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더 내려갈 수 없는 막장임을 깨닫는 순간, 남은 것은 희망뿐이라는 글귀가 가슴을 칩니다. 절망의 끝자락에 붙어있는 것이 희망입니다. 막장에서도 삶은 계속됩니다. 이제 희망만 있습니다….’

온 세상이 싱그러운 풀내음으로 가득하기만 해도 부족한 20대 초반, 절망의 늪에서 헤매이던 그 때 그 편지는 나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인데 마치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토닥여주며, 희망을 속삭였다. 몇년 뒤 나는 경기일보 기자가 됐고, 창간 25주년을 맞아 선정한 창조 25인에 그가 있었다. 고도원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직접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여전히 아침마다 편지를 배달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울림을 전하는 힘의 정체를 알고 싶어졌다. 그를 만나기 위해 이른 새벽 차를 몰아 아침편지문화재단 명상센터가 있는 충북 충주시 깊은산속 옹달샘을 찾았다.

(게면쩍은 웃음을 지으면)오늘도 아침편지를 배달하셨죠 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당연하죠”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편지는 새벽 0시 정각에 독자들에게 자동으로 이메일이 발송되게 돼 있어요. 오늘 주제는 ‘아들이 아버지를 극복하다’였는데, 오태진의 ‘사람향기 그리운 날엔’에서 발췌했어요. 우리는 아버지가 됐을 때야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죠. 아버지가 왜 울고 왜 아파했는지요. 오늘은 부모님의 마음을 느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전송했습니다.”

-첫 시작은 언제였나요?

“2001년 8월 1일, ‘희망’이라는 글로 시작했어요.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 연설문 담당자로 일했는데 5년간 4일 쉬었죠. 치열하게 일했고, 고민했고. 그러다보니 어느 날 아침 번개맞은 것처럼 쓰러졌어요. 이제는 나를 위한 치유의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창 인터넷 열풍이 불었고, 메일이 대중화 될 때였어요. 컴퓨터에 정리한 좋은 글들을 메일로 전달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후배들, 아는 사람들 수소문해서 메일을 전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죠. 그동안 읽었던 독서카드 정보를 정리하고 좋은 내용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내기 시작했는데 지금처럼 323만명의 독자가 생길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323만, 엄청난 독자인데, 편지가 지닌 파급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요

“회원 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단 한사람이라도 제가 보낸 아침편지를 읽고 힐링이 됐거나 새로운 출발을 했다면 그 자체로 성공한 거죠. 한 사람을 울릴 수 있는 가사는 만인을 울릴 수 있는 가사잖아요. (특유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처음에는 아침편지를 글 재주로 보냈는데, 이제는 마음 속에서 샘물처럼 우러나오는 것을 녹여서 쓰고 있죠. 내 땀과 삶, 눈물을 마음의 비타민으로 요약해서 보내는 글이 한 사람에게라도 울림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꾸준히 한 게 323만 아침편지 가족을 있게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싶은데요.”

-2001년부터면 꼬박 12년입니다. 매일 글을 쓰는 게 쉽지만은 않앗을 겁니다

(당연) “쉽지 않아요. (웃음) 오히려 고통인 날도 많았죠. 그러나 제 글을 보고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해소했다는 독자들의 반향을 보면서 무한한 에너지를 얻고 있죠. ‘죽을 것 같았는데, 글 하나가 나를 살렸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으세요. ‘희망을 얻었다’, ‘기쁨이 됐다’ 이런 독자들의 반응에 매일매일 놀라고, 책임감을 느껴요. 건강한 울림과 희망을 계속 전파하고 싶기 때문에 보람이 더 큽니다.”

-건강한 울림과 희망 전파, 깊은산속 옹달샘 명상센터를 설립하신 이유는 뭔가요

“네, 많은 분들이 건강한 에너지를 이 곳에서 얻어갔으면 해요. 사실 글이라는 게, 기자님도 잘 아시겠지만 내 안에서 에너지와 영감이 솟구쳐야 잖아요. 그래서 명상 공부를 시작했는데, 삶에 쉼표가 생기고 에너지가 생기더라고요. 많은 이들과 함께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만의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재단을 만들자고 결심했죠. 제가 집을 기부해서 5억의 기금을 마련하고, 여기에 아침편지 회원분들이 벽돌 하나에서부터 건물까지 하나씩 소중한 마음으로 기부해 주셔서 탄생했죠. 이 곳은 누가 와도 비타민을 줄 수 있는 공간, 긍정의 힘을 극대화하는 공간, ‘꿈 너머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이 되려고 해요.”

-‘꿈 너머의 꿈’,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요즘 청소년들한테 꿈을 물어보면 다들 ‘돈 많이 벌겠다’, ‘안정적인 직업을 갖겠다’고들 해요. 그런데 꿈의 진정한 의미는 내 꿈을 바탕으로 다른 이들에게 사다리를 놓아주는 거예요. 백만장자가 되는 게 꿈이 아니라 내가 백만장자가 돼서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게 꿈이라고 생각해요. 한 사람의 꿈이 두 사람, 세 사람, 백 사람에게 자라나는 거죠. 꿈 너머의 꿈은 자신뿐만 아니라 더불어 행복해지는 거죠. ”

-이사장님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어릴 적 부터 책을 워낙 좋아하고 글을 써댔어서(웃음) 글쟁이였어요. 20대때 학보사 편집국장을 했는데,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제적 당했어요. 수배, 감옥살이, 강제징집. 시대도 어둡고 내 앞길은 더 칠흑같고. 포장마차, 문방구 운영하다 전재산을 사기 당하고, 아내가 두 번 유산하고. 가장 밝아야 할 20~30대가 엉망진창, 하나도 풀리지 않은 시절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아, 나에게는 꿈이 있었지, 언젠간 이 시련들이 좋은 글을 쓰는 재료가 될 거야’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신기하게 그 이후로 신문 기자가 됐고, 대통령 연설문 담당자가 됐고. 지금도 그때의 다양한 경험들이 바탕이 돼 아침편지를 보내며 사람들과 함께 꿈을 나누고 있네요. 꿈은 자신이 바라보는대로 가기만 하면 이뤄집니다. 하하

-‘바라보는대로 이뤄진다’좋습니다. 그런데 기자시절에도 꿈과 희망을 논하는 분이셨나요. 제가 기자를 좀 압니다만…(웃음)

(역시나,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하, 전혀 아니었죠. 오히려 세속적인 사람이었어요. 정치부 기자를 오래하면서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 꿈도 꿀 수 있었죠. 그런데 살아가는데 세속적인 꿈 말고도 더 중요한 ‘꿈 너머의 꿈’을 발견했어요. 사람들과 함께 희망을 노래하는 지금의 가치가 더 중요해졌다고 해야할까요.”

-하고 싶은 일은 다 하셨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포장마차 장사에서부터 기자, 청와대 1급 비서관까지. 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최고점까지 다양한 인생을 살면서 화려하고도 비참한 순간을 경험했어요. 저는 꿈꾸는 사람, 멘토이길 바라요. 아이들에게는 ‘좋은 아저씨’로 불리고 싶어요. 친숙하고 편안한 아저씨가 있는데, 그 아저씨가 겪은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승화시킬 수 있는 아저씨 말이죠. 누구에게나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삶을 얘기해줄 수 있고 꿈과 희망을 얘기해 줄 수 있는 아저씨. 이런 아저씨가 필요하지 않나요?”

정자연기자 jjy84@kyeonggi.com

사진=전형민기자 hmjeo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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