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한 도봉산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다. 도봉산의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 산이 훤히 바라보이는 언덕에 터를 마련해 화실을 짓고 그림을 그렸던 화가가 있었다. 의정부시 호원동에 자리 잡고 있는 백영수미술관은 도봉산을 사랑한 화가 백영수(1922~2018)가 1973년 손수 집을 짓고 화실로 사용하던 안말 터에 세운 하우스뮤지엄이다. 백영수·김명애 부부가 미술관 건립을 위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며 설립한 비영리재단법인 (재)백영수미술문화재단이 2017년 백영수미술관을 개관한다. 2018년 1종 미술관으로 등록된 백영수미술관(관장 김명애)은 의정부시의 제1호 미술관이다.
■ 평생 동심을 일깨운 화가
미술관 새하얀 벽면에 백영수 화백이 창조한 모자상이 설치돼 있다.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처럼 미술관이 아늑하다. 자작나무 몇 그루 서 있는 마당에도 모자상 조각이 자리 잡고 있다.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경당’과 화가의 손길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작업실에 들어서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짐작하시듯 미술관은 백영수 화백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집의 형태를 모티브로 설계한 것입니다.”
호원동 화실에서 책의 삽화나 표지화를 그리던 시절이나 프랑스 빌라 슐 바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도 백영수가 일관되게 붙들었던 주제는 소년과 모자(母子)다. 현재 ‘소년’을 주제로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구상 시인은 백영수를 이렇게 소개한다.
“동심의 세계를 한평생 오롯이 그린 화가를 나는 알지 못합니다. 백영수 화백은 어린이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무한한 시공을 우러르며 살지 싶습니다. 그의 그림이 흐려진 우리의 마음에 신비한 샘물이 돼 맑게 할 것을 바라고 믿습니다.”
시인이 들려주는 말처럼 백영수의 그림은 우리의 흐린 눈과 탁한 마음을 씻어준다. 전시실에서 처음 마주하는 작품은 백 화백이 말년에 매달린 ‘창’을 주제로 한 여백 시리즈다. 붉은 벽에 작고 까만 창이 달려 있는 단순한 구도의 그림이다. 창 너머에 있는 ‘소년’을 만나려면 가슴을 열고 그림 앞으로 다가서야 한다.
■ 소년이 살아 있다
탁자 안에 바지도 입지 않은 벌거숭이 아이가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다. 종이를 오린 것인데,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같은 포즈를 취한 소년이 등장하는 그림은 색감이나 구도가 한편의 동화 같다. 소년의 뒤편에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은 해와 달처럼 보인다. 꽃과 집은 거꾸로 그려져 있다.
새로 도배한 방 벽에 낙서했던 유년 시절의 기억을 그린 것으로 1998년 작품이다. 발가벗고 방안에 벌렁 드러누워 팔베개를 한 소년을 통해 어린 날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키 큰 해바라기 사이에 한 소년이 서 있고, 그 뒤로 집과 개와 나무가 있다. 바탕의 밝은 주황색이 소년과 해바라기를 뚜렷하게 부각시킨다. 해바라기가 활짝 핀 여름날의 풍경을 떠올린다. 해바라기가 얼굴인 그림도 있다. 생각에 잠겨 앉아 있는 소년의 곁에 새가 한 마리 있다. 피리를 부는 두 소년과 주위에 모여드는 일곱 마리의 새와 여윈 개가 한 마리 있다. 무슨 까닭일까?
1975년 전후 그린 작품들은 하나같이 배경이 어둡다. 작은 연못가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소년 곁으로 새들이 다가온다. 소년의 그림자와 새 그림자가 연못에 또렷하게 비친다. 소년의 피리는 새를 불러 모으고 동무를 불러 모은다. 피리 부는 소년을 통해 희망을 전달하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강렬하게 다가오는 ‘남과 여’(1975)는 구도부터 독특하다. 피리를 부는 남자 앞에서 여자는 새를 불러 모아 모이를 준다. 노란 바탕에 푸르스름한 색깔로 그려진 남자와 여자, 그리고 새가 무척 평화롭다. 수백마리의 송사리 떼가 한쪽 방향으로 헤엄치는 ‘송사리’(1969)의 선도 경쾌하다.
그러나 이 무렵 그려진 대부분의 작품은 사춘기 소년의 표정처럼 무겁고 우울하다. 진한 황토색으로 놀란 표정의 소년과 우짖는 새를 그린 ‘새와 소년’이 대표적이다.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공포정치를 펼친 1975년은 한국 정치의 암흑기였다. 이 그림에서 당시 대한민국의 암담한 정치 현실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976년에 그린 ‘새’와 ‘새와 소년’ 그리고 1978년에 그린 ‘새’도 침울하긴 마찬가지다. 열 마리의 새들 중에서 한 마리만 날고 아홉 마리는 소년의 곁에 모여 있다. 하지만 피리를 부는 소년에 등장하는 새들과 달리 새들의 몸짓이 어수선하다.
‘새와 소년’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가족’(1978)에서 작가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오른편의 모자는 아내와 딸, 왼편에 떨어져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은 백 화백 자신으로 보인다. 백영수 화백이 프랑스로 이주를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생활고는 물론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으리라. 320쇄를 돌파한 조세희의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표지화에서도 어두운 시대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일까, 피리 부는 소년은 희망을 찾는 몸짓으로 읽힌다.
■ 창 너머에 있는 숨겨진 풍경
백영수 화백은 1922년 수원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다. 1944년 귀국해 목포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1946년에는 천경자 등과 함께 조선대학교에 국내 최초의 미술과를 설립한다. 1947년 서울에 정착해 전시회를 열어 미술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며 최초의 국전인 ‘조선종합미술전’ 심사위원과 ‘대한미술협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한다.
이 무렵 백영수는 수많은 책의 표지와 삽화를 그리고 많은 글을 썼는데, 광복과 6·25전쟁 시기 예술가와 작가들의 생활을 기록한 회고록 ‘성냥갑 속의 메시지’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구상, 서정주, 유치환 같은 시인들과 이중섭을 비롯한 화가,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 등 우리에게 익숙한 문인과 예술가들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백영수가 프랑스행을 감행한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1977년 프랑스로의 출국 전후에 그의 작품에 ‘모자상’이 등장하는 것이 주목된다.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다고 여겼던 그에게 모자상은 평생의 화두로 자리 잡는다.
프랑스 파리에 간 백영수는 요미우리 아트센터의 전속계약 화가로 활동하며 파리와 밀라노 등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22번의 초대전 및 단체전, 살롱전 등에 100여차례 참여한다. 김명애 관장은 유럽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림을 팔아 남프랑스 빌라 슐 바(Villars-sur-Var)에 별장을 갖고, 파리 근교와 노르망디에 아틀리에를 소유했으니 전업 작가로 성공했던 셈이지요.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백영수의 그림에는 가슴 뭉클한 사연이 많다. 반짝이는 별들로 화면을 가득 채운 ‘별’은 빌라 슐 바에서 별 보기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그린 작품이다. 추위에 떠는 아내를 위해 즉석에서 ‘해’를 그려 주기도 한다. 백영수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을 평생 유지한 특별한 화가였다. 박재용 학예연구사는 백영수 화백의 ‘선’에 주목할 것을 권한다.
“60여년을 같은 주제로 작업을 하면서도 세련된 선으로 그린 적이 없습니다. 화백님은 에너지를 매우 효율적으로 쏟아낸 작가였습니다.”
백영수미술관은 작고 아담하다. 규모가 작은 대신 공간의 구성이 튼실하다. 김 관장이 평소 매일 기도를 하는 ‘경당’과 백 화백이 생전에 그림을 그리던 화실을 직접 살펴볼 수 있다는 것도 특별하다. 백 화백이 말년에 집중했던 주제가 바로 ‘창’이다. 푸른 바탕에 연두색으로 작은 창을 표현한 그림이 마음을 밝혀준다. 작은 창 너머에 넓고 자유로운 공간이 펼쳐져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그 너머의 것도 보세요.” 미소를 머금은 은발의 화백이 관람객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것 같다. 푸른 도봉산 아래 따뜻하고 풍성한 이야기를 간직한 백영수미술관이 있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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