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9. 여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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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여주군향토사료관으로 개관된 여주박물관은 여주의 역사와 자료를 수집,연구, 전시하고 있다. 2016년 개관된 박물관 여마관(신관) 모습. 윤원규기자

 

남한강을 따라 천년 고찰 신륵사와 나란히 자리한 여주박물관은 하늘빛이 고운 가을에 찾으면 더욱 좋다. ‘여주군향토사료관’으로 출발해 1997년 문을 연 ‘황마관’과 2016년 문을 연 신관 ‘여마관’이 오누이처럼 정답게 마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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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6호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가 전시되고 있다. 윤원규기자

 

■ 100년 만의 귀향-역사를 시민 곁으로

 

‘검은 말’이란 뜻을 가진 ‘여마관’에 들어서자 ‘보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가 관람객을 반긴다. 3천230자로 된 비문에는 고려의 국사로 활약한 원종대사의 탄생과 출가, 당나라 유학 과정, 귀국 후 국사로 책봉돼 활동하다가 입적하기까지의 생애가 오롯이 담겨 있다. 높이 5.8m, 무게 4t이 넘는 이 거대한 탑비가 왜 박물관 안에 모셔졌을까. 조원기 학예연구사가 이 탑비에 얽힌 사연을 들려준다.

 

“여주시 북내면 고달산 자락에 있는 국가사적 제382호 고달사지에는 국보 고달사지 승탑과 보물 원종대사탑, 석조대좌를 비롯한 불교 문화재가 즐비합니다. 1915년 봄 원종대사탑비가 넘어지면서 여덟 조각으로 깨졌는데 깨진 탑비를 서울로 옮겨졌지요. 여주박물관은 2010년부터 탑비를 복원하기 위한 사업을 시작합니다. 고달사지에는 비신을 복제해 탑비를 복원하고 원래의 비신은 박물관 실내에 전시하기로 문화재청과 합의한 것입니다. 비신이 해주 화강암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중국을 통해 북한의 해주석을 수입해 국가무형문화재 석장을 모셔 와 글자를 새긴 일은 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입니다. 2014년 8월에 완성된 비신을 귀부와 이수에 조립해 복원 사업을 완료하고 2016년 7월14일 신관 여마관 개관에 맞춰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던 비신이 100년 만에 여주로 돌아온 것입니다.” 여주박물관이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펼친 이 사업은 문화재 복원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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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시 점동면에 위치했던 고려시대 대규모 지방사찰인 원향사에서 출토된 다양한 기와들이 전시되고 있다. 윤원규기자

 

■ 여강에 새긴 여주의 역사와 마주하다

 

2층 상설전시관에서 여주의 역사와 문화를 만난다. 전시관 벽에 새긴 ‘여주, 강에 새긴 역사’라는 글귀는 남한강을 젖줄로 삼은 여주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만난 세 가지의 유물에도 사연이 풍성하다.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원향사지 청동소종’은 국내에 몇 점 없는 유물로 미술사적 가치도 높다. 은으로 만든 병과 잔에는 무슨 사연이 담겼을까. “여주 출신인 김좌근은 세도정치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인데 그가 70세 됐을 때 고종이 하사한 것입니다.” 병 표면에 임금이 내려준 보물이란 뜻의 ‘어사지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여주읍’이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도자기는 일제강점기에 최고의 술을 담았던 술병이다. 1872년 만들어진 ‘여주목지도’는 여주의 지리와 역사를 당대인의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유물이다.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에서 찾아낸 불에 탄 쌀 한 톨에도 엄청난 사연이 담겨 있다. “기원전 7세기에 여주에서 벼농사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강가에 모여 반달돌칼을 만드는 모습, 들판에서 누렇게 익은 벼를 수확하는 풍경을 상상해 본다. 세월이 흐르면서 토기는 청자와 백자로 진화한다. ‘천년의 숨결을 심다’는 고려시대의 수준 높은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18세기 여주의 풍경은 어땠을까. 여러 척의 황포돛배가 강 위에 떠 있고 나루터에는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시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대형 그림이다. 여강에서 잡히는 생선 중 으뜸이 ‘금잉어’이며 장터에는 가장 고가로 팔리던 상품이 ‘새우젓’이란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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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현대까지 여주 지역의 역사 흐름을 알아볼 수 있는 여주역사실 모습. 윤원규기자

 

■ 역사를 빛낸 인물들과 만나다

 

구름과 두 마리 학을 금실로 수놓은 흉배가 화려한 단령이다. 왕실 종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운학흉배의 주인공은 이연(1647~1702)이다. 전시된 단령은 그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인데 상태가 좋다. 선조 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광해군 때 공신에 오른 윤승길(1540~1616)의 초상 앞에 선다. 쏘는 듯한 눈빛과 자연스럽게 뻗친 무성한 수염이 윤승길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성군 세종의 ‘영릉(英陵)’과 북벌의 군주 효종의 ‘영릉(寧陵)’이 있는 여주는 산천이 아름답고 물산이 풍부해 조선의 사대부들이 많이 살았던 고장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많은 왕비를 배출한 사실도 여주의 자랑이다. “조선 왕비는 8명, 통일신라와 고려까지 포함하면 14명이나 됩니다.” 태종의 비 원경왕후 민씨,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고종황제비 명성황후 민씨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왕비들이다. 명성황후가 쓴 한글 편지를 살펴본다. 전시물 아래에 ‘한글을 사랑한 왕비-손편지 쓰기’ 코너를 마련해 둔 것도 재미있다.

 

여주를 빛낸 인물은 누가 있을까. 박물관은 임진왜란 육지의 영웅 원호장군, 조선을 감동시킨 여주의 효자 길수익, 한말 전국연합 의병부대 총대장 이인영, 일제강점기 여주의 자선사업가 이민응을 네 분을 소개한다. 영상물을 통해 네 분의 생애를 살펴보며 여주의 정신이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도화서 화원 정수영의 작품으로 18세기 신륵사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한다. 배를 타고 강에서 그린 듯 우뚝한 전탑과 황마(黃馬), 여마(驪馬)가 나온 마암(馬巖)이 시원스럽다. 옛 그림으로 여주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시간도 재미있다. ‘삶을 꽃피운 강 여강 예찬’이란 표현에서 여주 사람들의 자부심과 애향심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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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요 반달 100주년 기념으로 동요한글 서예전시전 '반달'이 여마관 로비에서 전시되고 있다. 윤원규기자

 

■ 나라를 되찾고 역사를 바로 세운 여주 사람들

 

사각형의 가죽가방, 나침반, 휴대용 돋보기, 지갑, 이발 기구, 벼루, 주판, 여러 종류의 도장이 전시돼 있다. “독립운동가 청사 조선환 선생(1875~1948)의 유물입니다. 2020년 10월 선생의 손녀 조주현씨가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지요. 청사 선생은 무관 출신으로 신민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셨고 한국광복군 창설에 헌신하는 등 일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한 분입니다.”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시절 중국에서 찍은 흑백사진에서 선생의 꼿꼿한 지조가 느껴진다. 1948년 10월7일 선생이 운명하자 임정 요인을 비롯한 동지들이 나서 장례식을 거행한다. 김구, 이시영, 조소앙 등 임정 요인들의 제문이 온전히 보존돼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무서워했다는 심산 김창숙 선생의 친필로 된 만장도 있다.

 

‘우인(友人) 김창숙 통곡(痛哭)’이란 만장에 쓰인 글귀에서도 동지를 먼저 떠나 보낸 절절한 아픔이 느껴진다. “청사 동지야말로 만세의 사표가 될 만한 진정한 애국자라 하겠나이다”로 시작하는 김구 선생의 제문도 감동스럽다. 여주가 3·1운동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도 여주박물관이 새롭게 밝혀낸 것이다. 이포에서 3천여명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하고 복대리에서 1천600명, 복내면에서 1천여명이 만세운동에 참가하는 등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한다. 일제는 이포의 만세운동을 ‘광포’한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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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묵사 류주현은 여주 능서면에서 태어나 다양한 작품활동을 펼쳤다. 류주현의 삶과 작품을 알아볼 수 있다. 류주현 작업실 모습. 윤원규기자

 

황마관은 1층 ‘류주현 문학전시실’과 2층 ‘조선왕릉실’로 꾸며져 있다. 여주 출신의 소설가 류주현은 ‘조선총독부’와 ‘대원군’ 등 대하역사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소설가다. 류 작가가 사용한 작품 노트와 안경, 만년필 같은 유품과 작품집을 기증받아 꾸며진 전시실에는 선생이 수집한 고미술품도 볼 수 있다. 특히 김동리, 박두진, 황순원 같은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글씨도 여러 점 전시돼 있다. ‘효종영릉천릉도감의궤’와 ‘열릉 참봉교지’ 같은 고문서를 전시하고 있는 조선왕릉실도 물론 찾아봐야 한다.

 

여주박물관은 ‘한글, 동요로 빛나다’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푸른 하늘 은하수’로 시작하는 창작동요 ‘반달’의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이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의 도시 여주에서 열리고 있으니 더욱 좋다. 하늘빛을 닮은 남한강의 물빛도 더없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오는 주말 전철을 타고 여주로 여행을 떠나 보면 어떨까.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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