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공감, 이야기 세상] ‘동네 사랑방’ 그 시절 목욕탕… 이젠 빛바랜 추억

세월에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학교 앞 문방구가 그렇고, 골목마다 있던 우체통이 그렇고, 따뜻한 말을 나누던 공중전화가 그렇다. 부모님 손을 잡고 주말마다 갔던 목욕탕. 옆집 순희의, 뒷집 철수의 성장기를 고스란히 지켜봤던 ‘동네 사랑방’ 목욕탕이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다.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주거 문화가 확산하고, 도시가스가 지역 곳곳을 휘감으면서 ‘목욕탕’은 예전의 명성을 잃은 지 오래다. 1940년 인천에 처음 등장해 온 몸으로 세월을 맞아낸 목욕탕은 이제 흥망성쇠의 길을 걸으며 잊혀져 가고 있다. 여전히 취약계층의, 고령의 시민들에게 간절하기만 한 동네목욕탕, 그곳의 역사를 중심으로 사회적 의미를 되짚어 보고 대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개항과 동시에 들어온 근대식 목욕탕…중구 신흥동 ‘처녀목욕탕’ 우리나라에서 목욕은 목욕재계로 불리거나 창포물에 머리를 감아 액을 물리치는 등의 신성한 의식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누구나, 언제든 목욕을 할 수 있는 인천 최초의 민간 목욕탕이 등장한 건 1940년께다. 중구 신흥동에 있는 민간 목욕탕 ‘처녀목욕탕’은 당시 지역에 처음 문을 연 목욕탕이라는 이유로 ‘처녀’라는 이름이 붙었다. 광복과 전쟁을 거친 1960~1970년에는 동네 곳곳마다 목욕탕이 들어선다. 정부에서도 노동자들을 위해 욕탕을 포함한 노동회관을 짓거나, 새마을운동의 한 사업으로 공동목욕탕을 만드는 등 ‘목욕탕 전성시대’가 왔다. 각종 질병에서의 구원자 역할을 하는 목욕탕, 불과 40년 남짓 이어진 ‘동네목욕탕’의 전성기는 2000년대 등장한 엔터테이너형 사우나와 찜질방 등으로 쇠락의 길에 들어선다. ◆세월에 자취를 감춘 동네목욕탕…사라진 목욕탕 243곳, 80%는 원도심 인천은 세월의 흐름이 가장 활발한 곳 중 하나다. 재개발과 재건축, 신도심의 등장 등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인천에서는 한 때 500여곳이 넘는 목욕탕이 성행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이들 목욕탕은 최근 10년 동안 절반가량인 243곳이나 사라졌다. 사라진 목욕탕의 80%인 199곳은 남동·동·미추홀·중구 등 노인 인구 비율이 높은 원도심에 있던 목욕탕이다. 미추홀구 주안4동에 있던 인일목욕탕은 지난해 5월 문을 닫았다. 미추8구역재개발사업의 이주 시점인 가을이 다가오면서다. 인일탕은 지난 1980년 2월에 문을 연 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손님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왔다. 인일탕이 지난해 5월 문을 닫은 뒤부터는 주민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동네목욕탕이 사라지면서 고령·취약계층의 ‘목욕 걱정’은 날로 늘고 있다. 목욕 시설이 변변치 않은 주민들은 이제 추억의 사랑방을 잃고, 하루의 피로를 녹일 곳이 없어 목욕탕 원정길을 떠난다. 그마저도 어려운 이들은 ‘깨끗하게 살 권리’ 조차 누리지 못하고 있다. 원도심 주민들에게, 취약계층과 노인에게 목욕탕은 단순히 세신을 위한 것은 아니다. 말동무가 없는 누군가에게는 친구가, 씻을 곳이 없는 누군가에게는 건강한 삶이 기다리던 곳이다. ◆쇠퇴의 길에 닥친 전대미문 코로나19 바이러스 점차 사라져가던 목욕탕은 코로나19라는 전례없는 바이러스의 습격을 받으며 개점휴업 형태로 변화했다. 지역 내 목욕탕 214곳 중 30곳은 개점 휴업을 택했다. 유지비용이 없을 뿐더러 폐점을 하자니 철거 비용 역시 부담으로 다가와서다. 연수구 청학동 터줏대감이던 청학사우나도 지난 3월30일자로 문을 닫았다. 목욕탕 앞에는 여전히 ‘목욕합니다’는 푯말이 있고, 푯말과 멀지 않은 곳에 헛걸음을 한 손님에 대한 죄송한 마음과 휴업을 선택한 마음을 담은 편지가 붙어 있다. 목욕탕 주인들은 주민들에게 동네 목욕탕이 갖는 의미를 알기에 버티고는 있지만,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했다. 인일탕의 단골손님이던 박옥순씨(85)는 지난 겨울, 평생에 가장 힘든 때를 보냈다고 했다. 집 화장실에는 샤워기가 없어 1주일에 2번은 목욕탕을 찾았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어려운 일이 됐기 때문이다. 박씨는 인일탕이 사라진 뒤 30분을 꼬박 걸어야 도착하는, 천원이 더 비싼 옆 동네 목욕탕을 다닌다. 그는 “지난 겨울에는 주전자로 물을 끓여서 씻기도 했다”며 “목욕탕이 사라지는 게 샤워기 하나 변변치 않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큰 일”이라고 했다. 청학사우나 인근 주민들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그래도 주인의 어려웠던 시절을 봤기에, 안쓰러운 마음으로 추억만 그리고 있다. 청학사우나 인근 주민 이명희씨(64)는 “세월이 가면서, 손님이 많이 줄어서 (주인이)힘들어 했다”며 “1주일에 6번은 목욕탕을 찾았는데, 이제는 단골들이 뿔뿔이 사라지고 없다”고 했다. 80년이 넘는 시간 같은 자리를 지켜온 동구 송현동의 송현한증막도 코로나19로 매출이 줄자 수요일과 토요일, 일요일에만 문을 열다 최근에는 주말에만 문을 열기로 했다. 송현시장 상인 A씨(85)는 “옛날에는 장사 하기 전에 이곳에 들러서 몸을 지지는게 낙이었다”며 “그런데 요즘은 시장에도 사람이 없고, 사우나를 방문하는 사람도 없어 문을 통 열 수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경로목욕권’…여전히 취약계층 위생권 보장은 필요하다 과거 정부는 깨끗하게 사는 것을 기본권으로 생각했다. 지금처럼 집집마다 샤워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보니 지방자치단체들은 1980~1990년 앞다퉈 노인들에게 목욕탕을 이용할 수 있는 ‘경로목욕권’을 제공했다. 인천도 1991년 경로목욕권 사업에 동참했지만, 2000년 초반 중앙정부가 모든 노인들에게 기초노령연금을 지급하면서 폐지 권고에 따라 사업을 접어야 했다. 이때도 동네목욕탕은 선의의 운영을 이어갔다. 한동안 목욕탕 업주들은 노인들에게 경로목욕권을 쓸 때와 같은 금액만 받고 운영했다. 여기에 ‘경로우대금액’까지 생겨났다. 오랜기간 자신들의 목욕탕을 사랑방으로 여기며 찾아온 노인들을 위한 업계의 배려였다. 그러나 이 또한 2000년대 초반 이후 대형 찜질방과 고급 사우나가 등장하면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고급 사우나와 대형 찜질방에는 ‘경로우대금액’이 없다.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이제 목욕탕이 꼭 필요한 노인과 취약계층의 고충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조성민 인천목욕협회장은 “목욕탕은 집에서 목욕할 수 없는 주거환경에 살고 있는 취약계층에게 필수시설이다”며 “원도심에 동네 목욕탕이 사라지는 문제에 대해서 지자체도 적극 고민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에 대해 시 관계자는 “동네 목욕탕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 공감하고 있다”며 “방문목욕 등으로 보완하는 실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동네목욕탕을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겠다”고 했다. 김지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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