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일보 창간 29주년 축하 메시지] 박융수 인천시교육감 권한대행 “신뢰받는 인천 교육 동반자로”

안녕하십니까? 인천시교육감 권한대행 부교육감 박융수입니다.수도권 지역의 크고 작은 목소리를 담아 현장감 있는 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함으로써 시민들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고 있는 경기일보의 창간 29주년을 인천교육가족을 대표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경기일보는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미디어들이 난립하는 이때 크고 작은 다양한 소식들을 진실하고 공정하게 보도해 건전한 여론 형성에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천 교육에도 한결같은 관심을 가지고 교육정책 추진 과정에 대한 시민의 여론을 전하며 때로는 큰 목소리로 갈 길을 제시하고 때로는 정겨운 목소리도 다독이기도 했습니다.우리 인천시교육청은 인천의 아이들이 행복하게 성장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배움을 누리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우리 교육청은 학생, 교사, 학부모, 그리고 지역사회 주민들이 인천교육의 주민으로 설 수 있도록 다음의 노력을 할 것입니다.첫째, 학생 ‘존중’교육을 실천하겠습니다. 둘째, 교사 ‘섬김’ 정책을 실천하겠습니다. 셋째,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참여’하는 교육의 틀을 짜겠습니다. 넷째, 일관된 교육혁신으로 세계시민을 육성하겠습니다. 경기일보도 인천교육이 만들어가는 열정과 감동의 현장에 늘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며, ‘모두가 행복한 인천교육’의 가치를 시민과 공감하고 정책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정확한 보도로 공교육의 기본을 다하는 교육행정, 신뢰받는 교육행정의 동반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경기일보의 창간 29주년을 축하드리며, 앞날에 무궁한 발전을 기원 합니다.

[경기 새천년, 유라시아에서 길을 찾다] 평택항서 유럽의 끝 리스본까지 미래 경제영토 유라시아를 품자

중국의 신 실크로드 정책으로 세계가 급변하고 있다. 중국에서 유럽 서쪽 끝에 위치한 포르투갈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새로운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특히 일대일로를 추진하는 중국이 남미로 통하는 관문으로 불리는 포르투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유럽 시장 공략에 나서는 모양새다. 이같이 유럽 전역에서 신 실크로드로 인한 변화를 확인한 ‘유라시아열차탐사단’은 여정의 종착지인 포르투갈에서 경기도의 미래를 전망했다. 또 전통과 역사를 중시하는 유럽의 문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남미의 교두보 포르투갈… 중국의 ‘일대일로’ 새로운 길로 떠오르나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지난 2010년 세계금융위기 직격탄을 맞았다. 자칫 국가 파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포르투갈은 이에 지난 2011년 구제금융을 신청, 유럽중앙은행과 IMF가 제시하는 구조조정과 긴축정책을 감내해야 하는 시기를 겪게 된다. 결국 4년이 지나서야 구제금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경제적으로 여건이 좋지 않은 포르투갈이 중국의 ‘일대일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업인들의 관심이 상당하다. 이 같은 관심은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해 9월 리커창 중국 총리가 포르투갈을 방문했다. 캐나다와 쿠바 공식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리커창 총리는 포르투갈령 테르세이라 섬에서 포르투갈 총리의 특별대표를 만나 정치적 상호 신뢰, 실무협력 확대, 인문 교류 강화 등의 메시지를 전했다.이 자리에서 중국은 일대일로 구상은 물론 유럽연합과의 협력 필요성 등을 밝히며 포르투갈에 공을 들였다. 앞서 시진핑 국가주석도 지난 2014년 포르투갈을 방문해 양국 간 협력 강화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이처럼 중국이 포르투갈에 공을 들이는 이유 중 하나는 포르투갈이 유럽의 끝으로 불리는 남미 브라질로 향하는 관문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유럽까지의 신 실크로드를 완성하기 위해 포르투갈은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가진, 놓칠 수 없는 나라인 것이다. ■ 유라시아열차탐사단,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경기도의 미래를 말하다’ “길을 떠난 자와 떠나지 못한 자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앞으로 경기도는 중국의 일대일로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기민하게 대처해 나가야합니다” 유라시아열차탐사단은 지난달 31일 오후 2시께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32일간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세미나를 개최했다. 지난달 3일 평택에서 출발해 포르투갈 리스본까지 긴 여정을 거친 탐사단은 신 실크로드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소회와 함께 현지 전문가들을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경기도의 미래를 전망하는 시간을 가졌다. 최종식 본보 기획관리실장은 중국을 중심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시장이 형성되는 만큼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일대일로’ 정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은 최근 자국 내 경제구역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교통망을 연결하고 있다”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다양한 문화와 경제를 묶어내는 새로운 개발계획을 선이라는 길을 통해 공간을 확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라시아 대륙에 만들어지는 선과 공간에 경기도는 어떤 모습으로 중요한 축을 담당할 것인지가 과제”라며 “경기천년을 위한 유라시아 탐사의 출발은 중국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강진갑 단장도 중국을 통한 유라시아의 새로운 교역로가 확보된다면 경기도가 이 길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 단장은 “문명의 대전환기에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이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면서 “중국에서 유럽을 지나오면서 ‘일대일로’로 인한 변화가 생각보다 빠르게 나타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기도는 급변하는 유라시아 대륙을 큰 시각을 갖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탐사단은 경기도가 새로운 공간에 진출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최 기획관리실장은 “새로운 진출을 위한 투자비의 확보는 물론 현지에서의 지원이 필수적”이라면서 “경기도는 유라시아 진출의 기반이 돼야 하며, 선도적으로 현지 방문단, 사업설명회 등을 통해 교류의 기회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포르투갈에서 만난 한국 정부 한 관계자는 “포르투갈에서도 ‘일대일로’에 대한 관심이 많다”면서 “우리나라도 유라시아 대륙 전역을 하나로 잇는 길에 대한 이해와 함께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 최첨단 기술보다 전통과 역사를… 유럽의 잘 보존된 역사(驛舍) 유라시아열차탐사단은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을 지나오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전 만들어진 기차역이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철골구조가 그대로 드러난 독일의 함부르크역은 역사(歷史) 그 자체였다. 유럽 곳곳에 마련된 철도 박물관도 과거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등 전통과 역사의 중요성을 중시하는 유럽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었다. 탐사단은 스페인 마드리드 철도 박물관에서 이 같은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지난달 30일 오전 10시30분께 방문한 마드리드 철도 박물관은 지난 1967년 프랑스 건축가 알렉상드로 구스타브 에펠이 설계한 옛 델리시아스 기차역을 사용하고 있다. 스페인 철도의 역사를 보존하고 연구할 목적으로 세워진 이곳은 옛 철로 위에 과거에 운행되었던 각종 기관차가 진열돼 있다. 20여 개가 넘는 열차가 도열된 풍경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시대별 기관차 엔진은 물론 오래된 나무 재질로 구성된 객실까지 완벽하게 재현돼 있어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매캐한 석탄 냄새와 아파트 10층 높이에 달할 정도로 높은 천장은 웅장함을 넘어 경외감까지 불러일으켰다. 과거 유럽과 러시아 등을 누볐던 나무로 제작된 열차부터 최첨단 기술이 결합한 열차까지. 철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직원들도 이 같은 역사를 담은 박물관에서 근무하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른 시간에도 박물관을 찾아온 관광객과 자국민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모습을 보며 잠시나마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현지에서 만난 한 전문가는 “유럽은 과거에 지어진 건물을 허물기보다는 보수하면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면서 “마찬가지로 열차가 오가는 역사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설명했다. 유라시아열차탐사단은 역사와 전통을 보존하고 이어가는 유럽을 보며 고층 빌딩이 즐비한 우리나라의 모습을 떠올리고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미래는 지나온 시간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시간을 소중히 간직한 포르투갈의 현재는, 역사 속 실크로드가 21세기 신 실크로드로 재현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우리나라의 위상과 역할을 되돌아보며 탄탄한 미래를 그려나가야 할 때임을 알려주는 듯했다. 정민훈기자 사진=신춘호 / 유라시아 열차탐사단후원: 경기문화재단

[경기 새천년, 유라시아에서 길을 찾다] 유럽 직행 新실크로드… “유라시아를 우리 삶의 무대로”

유라시아 대륙 국가들이 유라시아를 철도로 연결해 경제적 이익을 키워 이것을 나누려는 것은 명백한 현실이다.중국과 러시아는 물론이고, 유라시아 대륙에 있는 모든 국가가 철도에 집중하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 있는 한국 또한 이런 움직임에 합세해야 하지만, 남북한 분단이라는 장애물이 존재한다. 경기도의 평택항을 주목하는 이유다. 중국 동부에 위치한 롄윈강과 가까운 평택항에서는 중국횡단철도(TCR)의 시발점인 롄윈강에 북한을 거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다.유라시아 열차탐사단의 긴 여정은 앞으로 평택항이 한반도에서 유라시아 대륙으로 향하는 문이 될 가능성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유라시아에 전 세계의 이목 집중 철길로 부활하는 실크로드는 중국이 일대일로 정책을 펼치며 윤곽을 드러냈다. 따라서 신(新) 실크로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을 살펴봐야 한다. 지난 2013년 9월 시진핑 국가주석은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순방하며 일대일로 전략을 제시했다. 일대일로는 육로를 잇는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해상을 연결하는 ‘21C 해상 실크로드’를 포함한다. 일대일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중국은 현재까지 관련 주변 국가와의 회담을 계속하며, 국제회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5년여 간 짧은 시간 진행한 것임에도 성과가 대단하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정책 소통, 인프라 연결, 무역 원활화, 자금 융통, 민심상통 등 분야별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규모를 키워 왔다. 지난해 8월17일 시진핑 주석은 일대일로 건설 사업 간담회에서 “일대일로가 연선국가(관련 국가) 국민에 행복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발언처럼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이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다른 국가들의 이익이 동반한다는 것이다.러시아의 신동방정책, 몽골 초원의 길 정책 등은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과 맞물려 있다. 러시아는 유럽에 대한 경제 의존도를 낮추고자 유라시아 대륙 개척에 나섰다. 아태 지역과 협력하며 경제, 안보 면에서 안정을 꾀하는 것이 목표다. 크게 성장한 중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가져가는 것도 목적이다. ■ 중국, 카자흐스탄, 러시아, 유럽으로 이어지는 철길, 해결해야 하는 과제 유라시아 대륙 철도가 활성화되면 열차가 여러 국가를 지나게 돼 장애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우선 국가마다 통관 절차, 시스템, 기간이 달라 운송 기한을 예상할 수 없어 기일을 맞춰야 하는 무역상들이 불안에 떨게 된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 간 트러블도 문제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민족 갈등이나 종교 갈등은 열차 통과가 힘들어질 수 있는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당장 철도로 물류를 운송하는 것이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는 ‘운송료’ 문제가 크다. 아직 수요가 많지 않아 다른 운송수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운임료의 가성비가 떨어지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국에서 유럽으로 가는 열차에는 화물이 실리지만, 유럽에서 중국으로 오는 열차는 빈 상태로 오는 경우가 많다. 국가 간 궤가 다른 것이나 위험물 제한, 열차 조건에 따라 중량을 맞춰야 하는 것 등도 해결해야 할 점이다. 이런 문제로 TCR 화물 운송 활성화 노력을 계속 해온 것에도 불구,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이 2013년부터 일대일로 정책을 펼치면서 어느정도 해결되고 있는 모양새다. 현지 물류회사 관계자 양빙치씨는 “3년 전 정주, 서안에서 함부르크까지 가는 데 20여 일 걸렸지만 지금은 여객열차처럼 정확한 시간에 출발해 15~16일 만에 도착했다”며 “중국 정부가 펼쳐온 연선 국가와의 외교적 성과, 자금 투자 노력이 이제 서서히 결실을 보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 이를 풀어가야 하는 경기도와 한국 우리나라도 앞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정책을 내놓은 바 있다. 부산-북한-러시아-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실크로드 익스프레스’ 구상안을 담고 있다. 그러나 북쪽 길을 뚫어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연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제약이 많다. 무엇보다 북한과의 관계가 가장 큰 변수다. 지난해 개성공단 사례처럼, 남북 관계가 경색된다면 얼마든지 길이 막힐 수 있다. 이에 유라시아 열차탐사단은 평택항에서 중국 동부로 향하는 바닷길을 통해 중국횡단철도(TCR)를 이용하는 방법에 눈을 돌렸다. 평택항을 이용해 바닷길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롄윈강까지 닿을 수 있다면 유럽까지 철도 길로 달릴 수 있다. TCR에 이르기까지 바닷길을 한 번 거쳐야 하는 점 때문에 열차 페리나 해저 터널을 도입하는 방안도 나왔다. 지난해 경기연구원은 국내기업의 중앙아시아 내륙시장 진출을 도모하는 내용의 ‘일대일로와 한중 열차 페리 연계추진 방안’ 보고서를 발표했다. 일대일로를 연결하는 한중 열차 페리를 운행해 한국에서 중국, 중앙아시아, 유럽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복합물류운송체계를 구축하자는 것이 골자다. 이와 관련 노홍승 한국교통연구원 물류연구본부 연구위원은 “평택항은 컨테이너 중점 항인 롄윈강, 열차 페리가 활성화된 옌타이에 닿을 수 있어 의미 있다”며 “중국의 주 운송수단인 철도를 반드시 이용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열차 페리를 고려해볼 만 하다”고 말했다.손의연기자사진=신춘호 / 유라시아 열차탐사단후원: 경기문화재단

[경기 새천년, 유라시아에서 길을 찾다] 변수로 떠오른 美의 ‘대러 제재’

러시아는 중국의 신실크로드 추진을 지지하면서도, 마냥 웃을 수 만은 없는 처지다.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는 상황에서, 전 부문에 걸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은 새로운 방식의 국가 발전을 꾀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만 하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분석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러시아의 이 같은 처지는 일대일로에 포함된 세계 각국의 고민과 대동소이하다. 신실크로드 구축에 있어 러시아의 판단과 향후 결과를 면밀히 검토하며 우리나라의 대처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깊어지는 중·러 관계… 그러나 웃을 수 없는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5월15일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을 지지하며 이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중국에서 열린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 원탁회의 연설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이 제안한 일대일로 구상에 대해 “현대적 발전 경향과 궤를 같이하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며 “러시아는 이 프로젝트를 지지할 뿐 아니라 중국을 비롯해 다른 국가들과 함께 프로젝트 이행에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아시아와 유럽 간 경제발전과 상호 유익한 통상을 위한 지대를 창설한다는 구상은 시의적절하고 중요한 제안”이라며 “이 구상은 세계 경제의 최신 경향을 고려하고 유라시아 대륙과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통합 과정 조율 필요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에 앞서 시 주석은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시 주석은 당시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역사상 최고로 좋다”고 밝혔으며, 이 평가를 현지 언론 등이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중국 관영매체도 시 주석이 러시아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는 내용의 기사를 쏟아냈다. 아울러 중국과 러시아는 중국의 신경제구상인 일대일로와 러시아 주도의 옛 소련권 경제협력체 ‘유라시아경제연합’을 연계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외신 보도 등에 따르면 중국 상무부는 지난달 29일 중국의 일대일로, 유라시아경제연합(EEU) 사이의 연계 실현 가능성을 연구하는 데 대해 합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미 지난 2015년 양국은 두 경제 전략의 연계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으며, 이후 중국과 러시아 간 교역량은 지난 5개월간 2천231억 위안(약 37조 7천128억 원)에 달할 정도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러시아는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에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중국의 구상이 진척될수록 정치와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조너선 힐먼 연구원은 일대일로와 EEU 간 연계의 실현 가능성 연구는 중·러 관계의 큰 진전이 아니라 연계에 대한 관심의 표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또 러시아는 중국의 과잉 공급을 고려할 때 매력적인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중국이 EEU에 가입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이 일대일로 구상이 구체화하면 러시아의 경계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현재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은 경제 분야, 러시아는 정치·외교 분야에서 각각 우월한 지위를 구축한 상태지만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 특성상 해당 국가의 정치·외교 사안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어 러시아의 입지가 좁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러시아는 자국 동쪽지역에 대한 중국의 영향을 우려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 동부권역은 과거 중국이 지배한 역사가 있어 중국인들이 땅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다는 분석이다. ■ 미국의 대러 제재에 반발하는 러시아와 유럽연합, 신실크로드 가속화 전망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일 미 상하원을 통과한 러시아·이란·북한 통합 제재법에 서명했다. 법안에는 미국이 자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러시아 기업의 사업 제한을 강화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같은 미국의 결정으로 미국과 러시아, 유럽연합(EU) 사이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독일상공회의소(DIHK)의 폴코 트라이어 부사장은 러시아 국영 타스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대러시아 제재 강화는 미국 경제 증진을 위한 조처로 독일 경제를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그는 “미국이 자신들 경제 이익을 더 중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면서 “유럽 집행위원회(EC)의 보복 조처 검토는 국제법 위반이 의심되는 국외 제재에 대응하기 위한 타당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러시아 기업의 유럽 활동 규제를 강화하면 독일 기업이 러시아와 공동 사업을 할 길이 막히면서 “중요한 에너지 안보 사업이 보류될 수도 있다”며 “이 경우 독일 경제 전반에 고통스러운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EU 지도부도 미국의 대러 제재 움직임에 우려를 표명했다.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은 “미국이 새 제재를 이행한다면 우리도 며칠 안에 충분한 대응을 취하겠다고 한 바 있다”며 “미국에 맞서 우리의 경제 이익을 방어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특히 EU 회원국 중 독일은 미국의 이번 조처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독일과 러시아를 잇는 ‘노드 스트림 2’ 천연 가스관 사업에 자국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도 미국의 제재에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는 “미국이 러시아에 전면적인 무역 전쟁을 선포했다”며 “새 미국 행정부와 관계 개선을 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은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가운데 중국은 미국의 대러 제재 처리에 반색하는 모양새다. 미국의 러시아 제재가 강해질수록 중국이 러시아와의 무역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본다는 게 중국 통상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바이밍 중국 국제무역경제협력연구소 연구원은 중국의 한 관영매체 인터뷰에서 “미국의 러시아 제재가 강화할수록 유럽연합(EU)과 러시아의 경제협력은 방해를 받게 된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동쪽(중국)으로 눈을 돌리게 돼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펑위쥔(馮玉君)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원 러시아연구소 연구원은 “중국은 일대일로의 틀 안에서 러시아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면서 “인프라 개발에 대한 투자를 가속할 것이다”고 전망했다. 중국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대일로’ 구상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러시아 제재 강화로 중국이 러시아와의 경제협력 기회를 많이 얻게 될 것으로 내다보면서 이런 기회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중국이 대러시아 무역 구조를 개선하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민훈기자 후원: 경기문화재단

[경기 새천년, 유라시아에서 길을 찾다] “롤모델은 한국” 자원부국 카자흐스탄… 중앙亞 맹주 급부상

지난달 17일 카자흐스탄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쇼핑몰 ‘메가 실크웨이’는 얼핏 우리나라 한 도시의 쇼핑몰을 방문한 느낌이었다. 가장 좋은 위치인 1층 로비에 팝업스토어 ‘프리미엄 코리아’를 설치했기 때문이다.한국의 화장품과 건강식품 등을 진열해 놓은 이곳에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이 곳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아스타나 엑스포’ 역시, 카자흐스탄이 얼마나 한국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지 오롯이 드러났다.이 엑스포는 신재생에너지를 주제로 한 국제 행사로, 한국관을 최대 규모로 조성했다. 유독 북적이는 한국관 앞에는 사람들이 세 줄 이상의 대기줄을 형성하며 입장을 고대하고 있었다.그러나 카자흐스탄은 국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미지의 땅이다. 향후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나라 중 한 곳으로 손꼽히는 카자흐스탄이 한국에 대해 높은 호감도를 보여주는 지금, 경기도가 우선 전략적으로 교류에 나서야 할 때다. ■ 자원 많지만 운송 인프라 부족해 현재 카자흐스탄은 국내에 단순히 ‘자원이 많은 나라’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은 동서양 문화가 혼재돼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데다, 이를 기반으로 경제 발전 가능성 또한 커 주시해야 할 국가다. 카자흐스탄은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면적이 넓은 국가지만 인구는 한국보다 적은 1천 700여 만명으로 인구밀집도는 세계 215위다. 중요한 특징은 원유 매장량이 세계 17위로 중앙아시아 국가 중 자원이 가장 많은 지역이라는 점이다. 산업 분야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제조업 분야’가 약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생활용품과 화장품 등 공산품을 주로 해외에서 들여온다. 우리나라 제품은 중국보다 품질이 좋고, 유럽·일본보다 가격이 낮아 이 특성을 노려봄 직 하다. 그러나 교류의 문턱이 낮아보이지는 않는다.카자흐스탄은 사회주의 국가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에 행정 처리가 아직 미숙하다. 일처리가 느리기 때문에, 유통기한이 짧은 식품류 등을 취급할 때 주의해야 한다.쇼핑몰 ‘메가 실크웨어’에 팝업스토어 매장을 설치한 황수연 프리미엄 코리아 대표는 “엑스포 이후 한국 기업의 진출이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면서도 “카자흐스탄 시장이 가능성이 높다고 무작정 뛰어들지 말고 이 나라 특유의 문화와 현실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중국,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 맺으며 중앙아시아 ‘맹주’로 부상중 유라시아 열차탐사단이 중국에 첫발을 내딘 롄윈강은 카자흐스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었다.지난 2013년 롄윈강시와 카자흐스탄 국유철도주식회사는 국경통과 물류통로 및 화물중계기지 합작협약서를 공식 체결했다. 2~3일 걸리던 통관 절차는 이제 불과 2~3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기차에 실린 화물은 실크로드를 가로질러 카자흐스탄까지 철도로 이동한다. 탐사단은 중국과 카자흐스탄이 협력해 국제변경합작구로 조성한 호르고스도 방문했다. 이곳은 각 국가의 물품을 면세 가격에 구입할 수 있어 쇼핑 명소로 인기가 높다. 향후 무역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 관광산업으로까지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다.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2013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위해 러시아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유라시아 경제연합에 대해 논의했으며 향후 러시아와의 관계는 더욱 우호적으로 흘러갈 것으로 전망된다. 카자흐스탄은 국제 영향력이 큰 중국·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관문 역할을 한다. 이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급격한 경제발전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외교 관계를 영리하게 끌고 가고 있어 향후 중앙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굳힐 것으로 점칠 수 있다. ■ 국제 행사 유치로 카자흐스탄 세계에 선보여… 세련되고 현대적인 모습 눈길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와 현 수도 아스타나는 어떤 미래를 그리는지 드러내는 도시다. 이중 알마티는 카자흐스탄의 최대 도시다. 이곳에서는 천산(天山)의 만년설이 훤히 보인다. 실크로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천산 산맥은 중국의 신장웨이우얼자치구,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의 4개국에 걸쳐있다. 현재 수도인 아스타나는 마치 게임 속에서 만들어진 도시처럼 보인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건물과 조형물이 주를 이룬다. 아스타나는 나자르바예프가 수도 천도를 진행하며 급격히 성장했다. 당시 30만이었던 인구가 83명(2014년 기준)까지 급증했다. 카자흐스탄은 이 두 곳의 대도시에서 국제 행사를 치르며 자국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전진기지로 구축했다. 지난 6월10일부터 9월10일까지 3개월간 진행되는 ‘아스타나 엑스포’는 카자흐스탄이 아스타나를 전 세계에 소개하는 장이다. 아스타나가 지향하는 미래상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지하자원 수출이 주수입원인 카자흐스탄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 지 주목된다. 손의연기자 사진=신춘호/유라시아 열차탐사단 인터뷰 김대식 주카자흐스탄 대사“아직 사회주의 국가 잔재 남아 기업들 꼼꼼한 준비 후 진출을”“카자흐스탄의 가능성을 피상적으로만 보고 접근하면 안 됩니다.”김대식 주카자흐스탄 대한민국 대사의 말이다. ‘2017 아스타나 엑스포’ 한국의 날 하루 전인 지난 7월17일 김대식 대사를 만나 한국과 카자흐스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115개 국이 참여한 아스타나 엑스포에 한국관이 가장 큰 규모로 조성되고, 반응도 가장 좋다.이와 관련 김 대사는 “한국과 카자흐스탄은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한국에 대한 인식은 좋은 편”이라며 “한국과 관련한 행사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있다”고 설명했다.김 대사는 세계에서 좋게 인식되고 있는 한국의 이미지를 잘 활용할 것과 카자흐스탄을 단순히 가능성이 큰 국가로 생각해 막연히 뛰어들지 말 것을 강조했다.먼저 김 대사는 막대한 자원,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지리 요건 등 카자흐스탄의 ‘첫인상’만을 보고 섣불리 다가서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앞으로 협력이 이뤄지려면 차근차근 장벽을 돌파하고 필요한 것을 갖추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당장 진출해서 얻을 이익보다는 현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장벽의 예는 아직 카자흐스탄이 자본주의화 덜 돼 있는 것과 인프라가 덜 갖춰져 있다는 것 등이다. 카자흐스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한국으로 가져가려고 할 경우, 운송로가 제대로 구축돼 있지 않아 중동 지역보다 운송료가 더 발생할 수 있다.김 대사는 “카자흐스탄이 지닌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선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며 “큰 나라라고 무조건 진출하기보다 큰 그림을 그리며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노력을 동반해야 실패하지 않는다”고 조언했다.손의연기자후원: 경기문화재단

[경기 새천년, 유라시아에서 길을 찾다] 시진핑의 야심 ‘일대일로’… 道, 中내수시장 공략 절호의 기회

중국은 연 성장률 10% 내외 고속성장기를 지나 연 성장률 7~8%인 중고속 성장 시대에 도달했다.중국은 그러나 스스로 저성장 시대인 뉴노멀 시대, 중국식 표현으로 신창타이(新常態)에 직면했다고 판단하고 향후 성장 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전방위로 공격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 오래전부터 동서부 지역 격차를 줄이는 위한 목적으로 서부 대개발을 추진해 왔다.여기에 일대일로 정책과 맞물려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향하는 길을 마련하려고 시안을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유라시아열차탐사단은 중국 서부 지역의 현재를 둘러보는 동시에 경기도가 동반 성장하려면 선점해야 할 요소들을 확인했다. ■ 화려한 역사 품은 중국 서부 지역 지난달 6일 유라시아열차탐사단은 중국 정주에서 까오티에(고속철도)를 타고 시안으로 이동했다. 국토가 넓은 중국은 사람이나 화물 이동 시 기차가 필수다. 고속철도를 자체 개발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외국의 기술이전 등을 통해 고속철도를 도입했다. 탐사단이 탄 열차는 최고 시속 300㎞를 웃돌며 2시간30분가량을 달려 시안에 도착했다. 중국 서부권 도시 중 가장 먼저 찾은 시안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중국의 13개 왕조가 수도로 삼은 곳으로,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 알려졌다. 혜초 스님을 비롯해 우리나라와도 깊은 인연을 자랑한다.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혜초가 바로 시안의 대흥선사에서 불경을 번역했다.대흥선사는 265년~289년 축조, 시안에서 제일 오래된 사찰이다. 탐사단이 마주한 대흥선사는 산맥처럼 겹겹이 보이는 황금빛 지붕의 사찰 건물과 수많은 불상 등 길고 긴 역사를 방증하며 건재한 모습이었다. 시안시의 또 다른 곳에도 혜초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저우즈현의 사찰 선유사 옆에 세워진 혜초기념비가 그것이다. 이 밖에도 전통적으로 중국의 서부 지역 교통 요지이자 중요한 무역지였던 우루무치를 비롯해 실크로드의 거점인 둔황, 가욕관, 투루판 등에서도 과거 서방과 교류한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다. ■ 시안, 과거 영광 고스란히 재현 중 “2014년도만 해도 스모그가 심하고 먼지가 많았지만 지금은 도로에 물을 뿌리는 차가 항상 있어 깨끗해졌다. 이러한 단편적인 현상만 봐도 시안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시안에서 거주하며 무역 컨설턴트로 근무 중인 조선족 허금희씨는 중국 서부 지역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음을 이 같은 사례를 들어 전했다. 실제로 탐사단이 직접 찾아간 시안, 우루무치, 둔황 등 실크로드의 핵심 지역은 현재 일대일로의 주요 거점으로서 과거의 영광을 이어가고 있었다.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넓고 깨끗한 도로가 돋보이는 시안은 누가 봐도 세련되고 발전한 도시였다. 한국 기업의 투자가 활발한 지역으로 이 같은 고속 성장세를 이끄는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대표적이다. 중국 개혁개방 이후 75억 달러를 투자해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건설했다. 단일항목 중 가장 큰 규모의 프로젝트였으며, 한국기업이 외국 투자 중에서도 단일 항목만 따졌을 때 제일 큰 규모다. 이때 시안은 적극적으로 삼성전자가 필요한 사항을 회의를 통해 논의 후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외국 기업 유치에 나섰다. 이강국 시안 총영사는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시안 지역도 해외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최대한 지원책을 펼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며 “정부가 국가정책을 결정하면 각 지역에서 일사불란하게 뒤따르는 특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 때문에 중국이 중요한 정책 결정을 내리면 국내에서 언론을 비롯해 정부 부처, 기업 등이 세밀하게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 우루무치, 카자흐스탄과 유럽으로 향하는 발판 중국 서부 지역의 또 다른 핵심 거점 도시는 우루무치다. 카자흐스탄과 육로로 이어지는 지역이며, 유럽으로 향하는 관문이라 중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시진핑 주석이 지난 2013년 중국이 일대일로의 중심지로 꼽는 카자흐스탄에서 처음으로 해당 정책을 발표한 것을 놓고 볼 때, 이 카자흐스탄을 잇는 우루무치의 중요성은 분명해 보인다. 이에 탐사단은 지난달 12일, 우루무치 중에서도 컨테이너 물류를 관리·검사하는 해관(세관) 일대를 방문했다. 컨테이너 전용 화물차가 끊임없이 드나들었고, 유럽으로 보낼 화물과 중국 국내로 갈 화물을 실시간으로 나눴다.해관 맞은 편으로는 우루무치 서역 화물열차가 출발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루무치 동역과 서역, 북역에서는 화물열차가 주를 이루고 남역에서는 여객이 주로 이동한다.이 역들을 통해 지난해에만 230개 열차가 카자흐스탄과 유럽으로 향했고, 올해에는 500개 열차를 운행할 예정이다. 하루에 한 편 이상의 열차가 화물을 싣고 전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무역의 중심지인 우루무치는 위구르족의 테러 여파로 공안이 많이 보였지만, 호텔과 상점이 즐비해 상당히 발전한 도시라는 인상이 컸다. 이와 관련 이상만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현재 중국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서쪽으로 나가는 ‘서진(西進)’으로 정책적, 경제적 목적을 다 가지고 있다”며 “카자흐스탄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아랍, 유럽까지 연결되면 미국 봉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일대일로와 연계한 진출 고려해야 중국이 중앙아시아, 유럽 등과 가까운 서부 지역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국내 기업들도 중국 서부 지역에 진출하는 상황이다. 이에 경기도는 지난 1일 일대일로 시대에 한국 기업의 중국 내륙 진출을 돕기 위해 충칭에 경기통상사무소(GBC)를 열었다. 도가 중국 내륙 지역에 이 같은 지원사무소를 설치한 것은 처음이다. 국내 지방정부도 중국 서부 지역의 발전 가능성과 적극적인 교류의 중요성을 파악한 것이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중국의 현 상황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볼 것으로 주문하고 있다. 이관규 코트라 시안무역관장은 “중국은 전에 투자와 수출 위주로 경제성장을 견인했지만, 지금은 내수시장 키우기에 집중하고 있어 우리도 내수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며 “제조업에서 벗어나 소비, 서비스 시장을 육성해 산업이 고도화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개인 소비시장 규모는 지난 2015년 4조 2천억 달러에서 2020년 6조 5천억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중국 소비시장은 여성이 주도하는 경향이 있어 가정용품과 영유아용품, 패션용품이 유망하다. 또 노인인구가 증가해 실버시장이나 의료기기도 진출할 만한 분야로 꼽힌다. 시안에서 만난 김손희 전 삼성물산 본부장은 “중국은 현재 일대일로라는 타이틀만 내걸어도 일단 호의적으로 반응할 만큼 전 부문에서 일대일로를 강조하고 있다”면서 “한국 정부와 기업이 여기에 편승해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상만 교수는 또 “중국 내륙에 사무소를 연 경기도가 이번 유라시아열차탐사단을 통해 평택항에서 롄윈강, 중국 서부, 카자흐스탄, 유럽까지 가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만큼 그 성과를 바탕으로 향후 연결망을 잘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의연기자 사진=신춘호/유라시아 열차탐사단 후원: 경기문화재단

[대한민국의 새 길-원로에게 듣는다] 변기영 몬시뇰 천주교 원로사목자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1970년대 ‘성지’란 말이 쓰이지도 않았던 천진암 성역화에 반평생을 쏟아 천주교 성지로 만든 신부가 있다.그 누구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던 때, 천진암 성지를 개발하면서 반평생을 쏟은 원로사목자 변기영 몬시뇰이 그 주인공이다. 변 몬시뇰은 천진암 성지의 교과서이자, 산증인으로 통한다. 변 몬시뇰의 천진암 성지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다.지금은 천진암 성지를 떠나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에 소재한 양평성당 곡수공소에서 조용하게 지내고 있지만, 변 몬시뇰의 24시간은 여전히 천진암 성지를 향해 있다.특히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건립을 위한 노력과 천진암 관련 모든 사료를 자료화시켜나가고 있는 변 몬시뇰은 요즘도 밤낮없이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www.msgr-byon.org)과 천진암성지(http://www.chonjinam.org)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직접 관리하며 한국뿐 아니라 세계인들과 교회 및 사회에 도움이 될 것들은 알리고 소통한다. 변 몬시뇰이 천진암 성지와 함께 한 세월이 자그마치 40여 년. 76세의 나이에도 변 몬시뇰의 눈동자는 맑게 빛났다. 변 몬시뇰의 미소와 눈빛 그리고 검은 머리는 신부로서 외길을 걸어오며 얻은 ‘산골 바보의 증명서’이기도 하다.지난 7월 25일 변 몬시뇰을 만나 대한민국의 정치계와 종교계, 그리고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선행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지혜와 조언을 들어봤다. -공소는 본당보다 작지만 지역을 아우르며 과거 한국교회 성장의 뿌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요즘 양평성당 곡수공소 생활은 어떠한가. 매 주일미사 주례와 강론 등으로 바쁠 것 같은데. 한 때 곡수리는 300 여년 간 곡수장이 제법 크게 열리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올해 곡수초교 1학년 신입생이 3명뿐이었다. 곡수리 공소에는 매주 평균 75세 이상 노인 신자들 약 35명 내외 정도가 주일미사에 참석하며, 주변 군부대의 장병이 25명 내외가 매 주일 미사에 나오는데 그중에 10여 명은 영세 예비하는 군인들이다.양평 지역은 한국 천주교회 창립선조들 중에 하느님의 종, 권철신ㆍ권일신 형제의 고향으로 자발적인 진리탐구 정신으로 이 곡수리 공소도 사제나 수도자나 전교사가 파견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입교한 공소역사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가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에 대한 ‘몬시뇰(Monsignore)’이라는 명예 호칭이 다소 생소하다. 2005년 6월 몬시뇰로 임명되셨는데 몬시뇰의 역할과 의미는. 몬시뇰(Monsignor)은 본래 주교(episcopus)와 대주교(archiepiscopus)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인데, ‘교황의 전속 사제’로 선임된 사제(Cappellanus)를 일반 사제들과 구별해 주교나 대주교처럼 같은 존경 호칭으로, 즉, Monsignor, Mon Signor, My Lord 등으로 부르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지금 주교와 대주교와 몬시뇰들을 부를 때는 다 똑같이, 몬시뇰이라고 부른다. 마치 왕조시대에 정일품(正一品), 정이품(正二品) 하는 행정계통의 3정승 6판서와 각 도의 감사 관료들과는 달리, 종일품(從一品), 종이품(從二品) 하는 시종관(侍從官)들이 궁중에 있었듯이 교황을 모시는 특수 임무를 띠고 봉사하는 시종직으로서 시작됐으나 최근에는 그 용도와 의미가 많이 달라지고 변질됐다고 볼 수 있다. -천진암은 한국천주교회 신도들의 신앙의 고향으로 통한다. 천진암 성지와의 인연, 그리고 스토리가 궁금하다. 전 세계 교회 역사가들과 근세의 역대 교황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천주교회는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한국인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교회를 세웠다고 격찬했다. 그러면 실제로 구체적으로 한국인들 누가, 한국 어디서, 어떻게 진리를 탐구했으며, 교회 신앙공동체를 결성했느냐에 대답하는 것이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 개척과 성역화의 이유와 동기와 목적이라 할 수 있다.천진암을 한국천주교회 발상지이며, 이벽과 한국교회 신앙의 제1세대 양반 학자들이 1779년을 전후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천주교신앙의 공동체를 결성했음을 발표하자, 북경에서 이승훈 진사가 프랑스 선교사 죠셉 드 그라몽 신부한테 영세한 1784년을 내세워 천진암 성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승훈 진사의 북경 북당에서의 영세를 내세우면서 한국교회 출발지로 삼으면, 북경 북당을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라고 해야 하고, 프랑스 선교사 죠셉 드 그라몽 신부를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로 받들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역대 교황들의 공식 강론과 선포도 모두 허위로 처리해야 할 것이다. 지난 200여 년간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광암 이벽 성조의 묘를 비롯해 선조의 묘를 잊어버리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까닭이 바로 역사 망각 때문이었다. -천진암 성지에 건립 중인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대성당’은 어디까지 와 있는가. 천진암대성당 건립은 온갖 어려움과 공격적인 비협조 속에서도 정말 기적적으로, 가장 빨리 진척되고 있는 편이다.36년 전만 해도 천주교회 소유의 토지가 단 한 평도 없던 이곳,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 그동안 화전하던 토지나 산자락까지 조각 땅 270여 필지를 하나둘씩 매입해 모아서 현재 한 덩어리 36만 여평이 됐고 거듭된 10 여년 간의 무사고 터 닦기 공사로, 3만여 평의 대성당 터 수평 대지가 중심부에 2단계로 이뤄졌으며, 국내외 최상의 저명한 전문 학자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15년 여에 걸쳐 입안된 설계도가 확립되고 다듬어져 마침내 완성됐다.현재 토목공사를 마치고 기초공사 중이며 한국천주교회 창립 300주년(1779~2079년)이 되는 2079년까지 100년 프로젝트다. 오늘도 주님의 집 건축은 황소걸음처럼, 뚜벅뚜벅 같은 발걸음으로 후퇴나 정지나 노선 이탈을 모른 채 한 걸음씩 내딛고 나아갈 뿐이다. -사람들이 종교를 대하는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절박하고 진지했는데 이제는 종교를 ‘가져 보면 좋을 것 같은 기호품’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종교인들의 정체성 자각이 시급하다. 경제발전이 국가존립의 유일한 목적이 될 수 없듯이 더욱이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빵 5개로 5천여 명을 먹였고, 나병환자들을 고치고,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시는 등 기적을 행했다고 해서 그분이 안과 병원이나, 무료급식센터 개설을 위해서 강생하신 것은 아니었다.더욱이, 로마 대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니셨듯이, 종교와 정치는 비록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그러나 서로 구분(distinction)될 수 있고, 구분돼야 한다. 마치 같은 사람의 몸과 건강에 관해서 내과의사와 외과의사의 각기 다른 업무가 있듯이 말이다. -통일, 저출산, 세대 간 갈등 등 우리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천주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회문제를 모두 종교가 맡아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인들은 사회적으로 유능하고 만능의 인격자들이 아니며, 오히려 무능한 사람들이 많은데도 유능한 체하며 정치, 사회, 여러 문제 해결에 뛰어 드는 것은 용감한 일인지는 몰라도 현명한 태도는 아닐 수 있다. 우리 종교인들은 사회 문제에 대해 우선은 좀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부님은 1971년 8월 27일 수원 주교좌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후 경기도와 남다른 인연을 이어오셨다. 내년이면 ‘경기’ 정명 천년이 된다. 전국 최대 지방자치단체이기도 한 경기도가 새로운 천년을 위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야 할까. 프랑스 인권혁명 200주년이 되던 해 파리를 간 적이 있었는데 전부터 잘 알던 프랑스 노인 신부님이 식사하면서 “오늘의 프랑스 파리는 프랑스만을 위한 파리가 아니고, 더구나 파리만을 위한 파리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며 우리 파리는 전 세계를 위한, 세계 인류를 위한, 세계 인류의 파리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경기도는 한국을 위한 경기도의 차원을 넘어, 전 아시아 민족들을 위한, 아시아를 위한 경기도가 돼야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특히, 경제발전만을 위주로 하는 각종 경제시설과, 오락과 유흥과 사치와 향락 위주의 아시아의 축(axle)이 되기보다도, 인류 정신문화의 거울이 되는 적어도 ‘아시아 문화를 주도하는 경기도’가 되도록 해야 한다. -끝으로 힘든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으로부터 부양받지 못하는 첫 세대’라는 의미의 ‘막차세대’로 불리는 중년 세대에게 등 우리 사회 각 구성원에게 게 꼭 전하고 싶은 조언과 용기의 메시지가 있다면. 양심과 상식을 지키고, 경위(經緯)와 역사를 아끼며, 자아를 가꾸는 인생을 살도록 합시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본분을 충실히 해야 한다. 특히 종교인들은 정치적인 면을 줄이고 종교인의 삶에 집중해야 한다.변기영 몬시뇰은…1940년 용인 출생1971년 사제 서품1971년 수원교구장 비서 겸 교구 기획관리실 보좌1972년 용인본당 주임1974년 수원교구 사목국장 겸 가톨릭농촌사회지도자교육원 원장1976년 신장본당 주임,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 개척 착수, 이벽성조 시복시성 추진 착수, 동 위원회 결성ㆍ총무1980년 주교회의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사무국장, 순교자시복시성추진부장1982년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소 소장1985년 천진암 성지 주임 겸 천진암본당 주임, 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건립 주임1992년 천진암 박물관 관장2005년 베네딕도 16세 교황, 몬시뇰로 임명2012년 사제정년 은퇴대담=이선호 문화부장/정리=강현숙기자

[대한민국의 새 길-원로에게 듣는다] 김장환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 목사·극동방송 이사장

1934년 수원의 한 가난한 소작농의 집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80여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서 존경받는 원로 목사가 됐다.한국전쟁 때 미군 하우스 보이를 하던 이 소년은 목사가 되고 난 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그 바탕에는 기독교 복음 전파라는 큰 뜻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기적이 일어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ㆍ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다.최근 김장환 이사장은 종교계 원로로서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간 한미 정상회담 성사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일보 창간 29주년을 맞아 김장환 이사장으로부터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 들어봤다.김 이사장은 대한민국이 국내·외적 위기에 직면한 상황을 우려하면서도 “대한민국은 좋은 나라고 희망이 있는 나라”라며 인터뷰 내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통합을 강조했다.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정치권이 성과를 내야겠다는 조급한 마음으로 대북정책을 펼쳐서는 안 된다”며 “통일은 100년을 내다보고 준비해야 한다. 서로 왕래하며 동질감을 느끼고 통일에 대한 공감대를 이루는게 우선”이라고 조언했다.다음은 김 이사장과의 일문일답이다.-최근 한미 정상회담이 성사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됐다. ‘보수 원로 목사가 국익을 위해 진보 대통령을 도왔다’는 평가까지 나오는 등 우리 사회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졌는데 한미 정상회담을 돕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우연히 됐다고 보는데 하나님의 배경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1976년 6월 카터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과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카터 대통령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하면서 1차 회담에서 팽팽히 맞섰다.당시 저는 카터 대통령이 침례교 집사인 데다 조지아 지사 때 몇 차례 기도해 준 게 계기가 돼 가까워졌다. 그 인연으로 2차 회담을 앞두고 여의도 침례교회로 함께 자동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박 대통령 칭찬을 많이 했다. 박 대통령은 애국자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틀어진 관계를 중재할 수 있었다. 저는 지금도 매년 1천 달러씩 카터 센터에 기부하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제가 침례교 세계연맹 회장을 할 때 2005년 영국 버밍엄에서 대회를 했는데 카터 대통령 내외를 초청해 강연도 했고 지금도 심심찮게 편지로 왕래하고 있다. 내년도에는 어린이 합창단을 데리고 카터 대통령이 주일학교 교사로 있는 침례교회에 가서 찬양을 해주기로 했다. 이 같은 인연이 이어지면서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과 조지 부시·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및 펜스 부통령 간 연결고리가 됐다. 미국의 빌리 그래함 목사의 아들이자 트럼프 대통령의 종교적 멘토로 알려진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가 문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흥남철수 당시 부모님이 내려왔고 거제에서 태어나 대통령이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중간에서 역할을 해줬다. -북한이 ICBM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남북관계는 물론, 한·미·일-북·중·러 관계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어떤 대북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보는지. 임기가 5년이니까 성과를 내야겠다며 조급한 마음으로 대북정책을 펼쳐서는 안 된다. 뭔가 가시적인 업적을 위해 서두르기보다는 북한이 도움을 요청할 때 대화하고 도와줘야 진정한 통일이 가능해질 것이라 본다. 어떻게 북한을 살리고 남북통일을 이룰지는 100년을 내다보고 해야 한다. 급하게 하면 졸렬한 작품이 나오는 법이다. 5년 동안 서두르기보다는 통일의 초석을 두는 게 중요하다. -한반도 긴장 상태가 더욱 악화하고 있다. 국민의 염원인 ‘통일’에 대비해 우리 정부와 사회가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할까. 개인적인 생각으로 단일민족이라는 것만 내세워서는 통일이 이뤄지기 어렵다고 본다. 우리가 통일해야 하는 이유는 한반도를 반으로 갈라 서로 싸우다가는 과거의 아픈 역사를 또다시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나. 우리의 국력을 강하게 키우려면 통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와 북한이 대등한 생활력을 갖고 왕래해야 한다. 왕래가 없는 통일은 위험하다. 5년이고 10년이고 서로 왕래하면서 동질감을 느끼고 통일에 대한 공감대를 이뤄야 한다. 우리 목사들이 새벽마다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데 한 번은 젊은 목사에게 ‘통일이 돼서 이북에서 네 식구가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살겠다고 하면 얼마나 살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다. 일주일, 한 달은 가능하지만 1년은 어렵다고 하더라. 그런데 1년 이상 함께 살 수 있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힘든 일이지만 인내심을 갖고 준비해야 한다. -최근 다양한 사회문제 중 가장 큰 문제로 ‘저출산’ 문제를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있다면 제안해 달라. 생활이 윤택해지고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넉넉히 살 수 있게 되니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생기는 것 같다. 우리가 가부장 제도로 오래 살았는데 우리 어머니가 자녀를 10명 낳으셨다. 그 시대는 다 그랬다. 반면 지금은 아이를 적게 낳아서 귀하게 키우려고만 하다 보니 훈육도 제대로 안 되고 우리 사회에 병폐가 많다. 구조적으로는 우리나라가 아이를 낳아서 교육하고 결혼시키는 데 돈이 많이 들고 힘이 드니 안 낳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구가 줄어들고 학교도 문을 닫는 등 국가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국민운동을 전개해서 아이 낳는 걸 장려해야 한다. 그러려면 국민 정서와 생각, 사상, 이념을 선도해야 하는데 그 역할을 언론사가 해야 한다. 올해 창간 29주년을 맞는 경기일보의 어깨가 무겁다. -취업난에 희망을 잃어가는 청년들, 빈곤에 허덕이는 노인들, 치열한 삶을 살면서도 행복 수치는 낮은 중장년층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구성원들에게 전하고 싶은 희망 메시지가 있다면. 대한민국은 좋은 나라다. 희망이 있는 나라다. 우리가 어렵다, 어렵다 하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일자리가 없어서 청년 취업난이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좋은 일자리만 가려고 고집하니 취업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젊어서 열심히 노력해 자기 몫을 한다면 앞으로 무궁한 발전을 할 것이다. 우리나라 노인들은 자식 키우느라 소 팔고 땅 팔아 교육했는데 정작 자신들의 노후대책을 못 세웠다. 지금 자라는 자녀 세대에 대한 교육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노후대책을 세우는 것도 필요하다. 내 자식이 나중에 나를 돌봐주겠지라고 생각하기보다 나름대로 노후대책을 세워 안정되게 지내고 남는 것은 사회에 환원하고 가면 된다. 그러면 앞으로 노인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경기일보가 창간 29주년을 맞았다. 마지막으로 경기일보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수원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수원의 인구가 3만 명이었다. 지금은 120만 명에 육박했는데 인구만 보더라도 수원이 엄청나게 변했고 경기도는 말할 것도 없다. 이는 외형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는 물론 교육과 국제관계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는 것이다. 故 심재덕 전 수원시장이 수원에 존경하는 세 사람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선경 그룹(현 SK)의 故 최종현 선대회장이다. 최 선대회장은 수원농고와 농대를 나와 형인 최종건 창업회장과 선경을 일으켰다. 두 번째는 송영복 씨로 영복여중·고교를 세운 분이다. 끝으로 세 번째는 김장환 목사라고 했다. (웃음) 한 사람은 사업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교육을 일으킨 사람이다. 저에 대해서는 성직을 통해 수원을 발전시켰다는 맥락에서 존경한다고 했다. 저로서도 영광이다. 대부분 돈을 벌면 서울로 가는데 저는 고향을 지켜보겠다고 나름대로 많이 노력했다. 늘 고향인 수원, 나아가 경기도를 잊어본 적이 없다. 서울은 제가 아니어도 일할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경기일보가 29주년을 맞았는데 저 역시 도민들에게 앞으로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해 얘기할 수 있어 영광이다. 경기일보가 앞으로 더 크게 성장해 도민들의 소식은 물론, 사상과 이념 등을 선도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은…대담=이선호 문화부장 / 정리=송우일기자

[경기 새천년, 유라시아에서 길을 찾다] ‘한민족 DNA’ 지킨 고려인… 유라시아 대륙 진출의 인도자

새콤달콤 시원한 육수에 말아내 토마토와 계란 지단, 고수를 고명으로 얹은 국수. 처음으로 맛본 고려인의 음식은 ‘국시’였다. 탐사단원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아쉽게 느낄 정도로 맛이 기가 막혔다.이때 김상헌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는 “경기도 안산에 있는 고려인 마을에 가면 국시를 먹을 수 있다”며 단원들의 아쉬움을 달랬다.단편적인 예이지만, 그토록 가까운 곳에 고려인 3만여 명이 모여 사는데도 도민은 물론 많은 국민이 고려인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중앙아시아 국가 카자흐스탄에 사는 고려인을 만나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살피고,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본다.■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 고유문화 지켜내 올해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을 맞아 각종 매체에서 고려인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고려인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벨라루스 등에 사는 한인 교포를 뜻한다. 한인들은 1850년부터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옮겨가 살았다.이후 러시아의 스탈린이 계획경제를 시작한 가운데, 1920~1930년대 한인들은 공동체를 이뤄 생활하며 언론, 문화시설, 교육시설을 갖추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의 갈등이 발생한 1937년, 소련은 삶의 터전을 닦아놓은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고려인 4만 명이 숨지는 등 고려인은 먼 타지에서 혹독한 삶을 보냈다. 역경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은 주목받는 소수민족으로 성장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먼 타지에서도 한국어와 고유문화를 지켜왔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는 한인종합예술극장인 고려극장, 고려일보로 이어진 한글신문 레닌기치, 음식문화 등이 예다. 레닌기치를 발굴해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진행했던 김상헌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가 “우리 고유의 문화가 한국보다 카자흐스탄 고려인 문화에 더 많이 남아 있다”고 설명할 정도다. ■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의 위상 눈부셔 카자흐스탄 곳곳에서 전자제품 매장인 ‘테크노돔’이 눈에 띄었다. 매장 안에는 삼성과 LG를 비롯한 한국 제품이 압도적으로 많이 진열돼 있었다. 테크노돔은 중국 전자제품이 주를 이루던 카자흐스탄 시장에 한국 제품을 비롯한 질 좋은 제품을 공급하며 카자흐스탄 최고의 유통기업 중 하나로 성장했다. 이 테크노돔을 이끄는 대표가 바로 고려인 김 에두아르트(김 에드워드)다. 국내에서는 고려인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는 시선이 다수이지만,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의 위상은 높다.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은 1991년 소련이 붕괴된 후 교육열과 성실함을 보여줬고, 인정받았다. 부지런하고 믿음을 준다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현재 정계, 재계, 학계 등 여러 분야를 이끌고 있다. 카자흐스탄 포브스가 지난 5월10일 카자흐스탄의 부자 상위 50위를 발표했다. 이중 고려인은 역대 최대 수인 7명이나 이름을 올렸다. 김 에두아르트 테크노돔 대표의 경우 27위를 차지했고, 1위는 김 블라디미르, 21위 김 비아체슬라프 Kaspi은행 회장, 31위 박유리 Lancaster Group 이사, 33위 김 블라디슬라프 Kazmineral 대주주, 36위 강 세르게이 CAPEC 이사, 43위 츠하이 야코프 Temirzhol energo 대주주 등이 순위에 들었다. 정계 진출 또한 눈부시다. 채유리 전 상원의원, 김 게오르기 상원의원, 김 비올례타 전 대법관 등을 꼽을 수 있다. 알마티에 있는 카자흐스탄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이런 고려인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2층 소수민족 전시관에서는 고려인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의상, 음식, 혼인, 악기 등 다양한 문화를 보여주며 옛날 기록물까지 세세하게 전시해놓았다.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 수가 10만여 명으로 전체 인구 중 0.6%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 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단어 몇 개에도 애정담아 탐사단은 지난달 15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질료니 바자르를 찾았다. 질료니 바자르는 알마티에서 제일 큰 재래시장으로 카자흐스탄인의 생활 모습과 다양한 물품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이색적인 곳이다.큰 규모의 시장 건물 안에 말린 과일, 생과, 채소, 소·돼지·닭·오리·말고기 등 판매 구역이 나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품목에 따라 판매하는 민족이 다른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곳에서 고려인은 반찬을, 러시아계는 정육을, 이란계는 견과류를 주로 취급하고 있다. 이 낯선 광경을 보던 중, 한국의 재래시장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여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찬을 파는 고려인 아주머니들이다. 그들이 펼쳐놓은 좌판에는 새콤달콤하게 무친 당근 절임, 고사리 무침 등 한국과 비슷한 반찬과 김밥이 가득했다. 이곳에서 만난 고려인 상인 말리나씨(65)는 “부모님은 연해주에서 왔고 한국에 가 본 적도 없지만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안다”며 “부모님께 한국식 반찬을 만드는 법을 배워 20년간 판매하고 있는데 한국인 방문객이 오면 특히 더 반갑다”고 말했다. 시장을 나와 공원을 지나던 중 또 다른 고려인 김 릴랴 알렉산드로브나씨(70)와 만나 대화를 나눴다. 한국 이름은 김순실, 친아버지가 함경북도 청진의 시당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고 한다. 그는 탐사단의 고된 여정을 묻고 걱정하며 따뜻한 응원의 말을 건넸다. 말리나씨와 김순실씨처럼 카자흐스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고려인은 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친근감을 느끼고 있는 분위기다. 실제로 고려인 청년들은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익히지는 못하지만,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거나 따로 배우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수교가 이뤄지고 한국 대사관이 자리 잡은 후 한국 정부가 고려인 청년들의 한국어 교육을 지원하는 것도 한몫 하고 있다. ■ 국가마다 다른 상황의 고려인, 통일 한국 대비해 면밀히 분석해야 고려인과 협력해야 한다는 말은 한국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왔다. 매번 이슈가 되지만 진전이 없어 이제는 고려인 사회에서 ‘못 믿겠다’고 할 정도다. 문제는 고려인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김상철 한국외대 중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고려인을 바라보는 한국의 현재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과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은 처한 상황이 다름에도 중앙아시아로 묶어 생각하고, 도움을 줘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국가 간 문제를 차치하고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것 등이다. 모든 고려인이 카자흐스탄 사례처럼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성급한 일반화는 자칫 고려인과의 관계 형성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려인 사회는 소련이 붕괴된 후 25년이 지난 지금, 국가와 지역 단위로 특성이 분화됐다. 김 교수는 앞으로 고려인 사회의 특성을 명확히 파악하고 이를 접근 방식에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기준으로 고려인을 생각하지 말고 고려인의 기준으로 한국을 생각해야 한다”며 “고려인은 이미 국제화돼 한국보다 다민족, 다자사회에 익숙하다”고 강조했다. 고려인에 대해 김 교수는 한 가지 더 조언했다. 고려인이 향후 남북한 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것. 고려인은 함경도와 평안도 방언을 사용한다. 현재는 남한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지만, 조상과 정서를 살펴보면 북한이 그 뿌리다. 특히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체제 전환을 겪었던 만큼 통일 한국에서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통일 시대에 갈등을 풀 수 있는 중간자로서의 고려인과 동반 성장할 수 있는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손의연기자 사진=연합뉴스·신춘호 유라시아 열차 탐사단후원: 경기문화재단

[가업 잇는 100년 기업] 김포 대우포장기업

바야흐로 반려동물 인구 1천만 명 시대를 맞고 있다.반려동물이 단순한 애완동물을 넘어 가족구성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해외의 한 조사기관에 따르면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개선할 수 있고,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사회성 강화와 정서적인 안정, 신체적 면역기능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이렇듯 반려동물은 사람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친구이자 가족으로서 많은 장점을 준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선 ‘펫로스 증후군(반려동물의 죽음으로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는 현상)’으로 인한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가족을 잃은 것 못지않은 펫로스 증후군의 피해를 줄이고자 ‘품위 있게’ 반려견을 보내고, 또 다른 반려견을 쉽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업이 있다. 국내 최초로 종이를 이용한 관(棺)을 만들어 장례 용품을 브랜드화시킨 ‘대우포장기업’의 이야기다.3대째 박스 제조를 해오다 최근 장례용품 브랜드 ‘이별이야기’ 사업체를 새롭게 런칭한 김록겸(60)ㆍ김희숙(29) 부녀를 만나 그동안 이어온 가업 이야기와 앞으로의 꿈에 대해 들어봤다. ◆ 50여 년 이은 종이박스 제작 가업…새로운 ‘종이관(棺) 사업’에 3대의 꿈 담아 김록겸 씨가 대표로 있는 대우포장기업은 종이박스를 만드는 제조업체다. 대구 달성군의 여느 농촌 청년이었던 그의 부친(79)이 1970년대 초 산업화 시작 이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상품 포장을 재가공하는 작은 공장을 운영하면서 시작됐다.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 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부친의 사업 악화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가업을 이었다. 직원과 거래처 간의 문제, 수금의 어려움 등으로 사업이 악화일로를 걸으며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기존에 흔치 않던 방수 종이, 반도체 보존 골판지 등 새로운 것에 대한 개발과 도전으로 연간 3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시켰다. 김포시 하성면에 자리 잡은 대우포장기업은 이제 그의 둘째 딸 희숙 씨가 3대째 가업을 이어받아 제2의 도약에 나서고 있다. 3대의 꿈을 담아 부녀가 함께 개발한 ‘종이관(棺) 사업’을 통해 장래용품 브랜드인 ‘이별이야기’ 사업체를 최근 새롭게 런칭하면서 부터다.희숙 씨는 “반려동물이 로드킬을 당한 장면을 수없이 목격하고, 펫로스 증후군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며 강아지를 키우는 입장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면서 “수년간 함께 해 온 가족을 품위있게 보내고, 또 쉽게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수 있게 도울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 하면 종이박스를 접목시킬까? 하는 마음에 남들과 차별화된 장례용품 콘텐츠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시작하게 됐다”고 개발 배경을 소개했다.이어 “최근 반려동물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동물화장 문화도 확산되고 있지만, 사망 시 입히는 수의가 반려동물을 위한 용품이 아닌, 사람이 쓰던 것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하는 구색 맞추기에 만연해 낙후된 실정”이라며 “종이관으로 시작했지만 부족한 면면을 보완해 죽음을 준비하는 시작부터 마지막 추모하는 메모리얼까지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대기업도 박찬 ‘이대 나온 여자’…이제는 사업가로 과감한 도전 이별이야기 대표를 맡은 희숙 씨는 이화여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재원이다. 졸업 후 국내 유명 대기업에 취업해 경영전략실에서 근무하던 희숙 씨는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와 3대째 물려받은 사업가 피(?)를 무기로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이에 대해 김씨는 “일본에서 유래한 반려동물 화장 문화 사업은 무작정 벤치마킹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철저하게 시스템을 파악해야 하는데 내겐 너무 어려워 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면서 “어렸을 때부터 지켜본 딸에게서 강한 사업 성향을 지녔다는 느낌을 받아 왔기 때문에 좋은 직장에 다녔더라도 후회는 전혀 없다”고 웃음을 내보였다. 희숙 씨 역시 “워낙 성취욕이 강해 회사에 있기보다는 내 회사를 맡아 사회적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며 “남들 보기에 아깝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향후 이 일의 끝에서 하나의 사회를 움직였다는 보람을 느낄 것 같다”고 소신을 밝혔다. 희숙 씨는 본격적인 사업 전선에 뛰어들며 열정의 온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이미 ‘장례지도사’는 물론 ‘반려동물관리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잘 몰랐던 분야인 만큼 열심히 공부해 선진국의 문화를 따라잡겠다는 야심 찬 포부로 가득하다. 하지만, 애로사항도 많다. 그는 “초기에 빨리 적응해야겠다는 생각에 어려움을 못 느꼈는데, 사실 요즘 포장ㆍ인쇄업은 효율성 때문에 대기업으로 몰려가는 사양산업이 되고 있다”며 “장기적으로 봤을 때 투자 가치가 있을까 하는 고민과 3대를 이어간다는 부담감, 책임감에 많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제조업 나름의 메리트와 아이디어가 현실화되는 단계의 경험, 기획ㆍ제조ㆍ마케팅 전 과정이 시장에 나오기까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에 희망을 본다”고 자신감도 내비쳤다. ◆ 부녀에서 이젠 사업 동반자로…갈등도 있지만, 시너지 효과 ‘UP’ 이제 부녀지간이라기보다 사업 동반자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듯싶다. 2년 전 장례용품 브랜드화 구상에 대한 시작부터 본격적인 기획, 출시와 인터넷 오픈을 한 최근 2개월 전까지 이들은 서로 다른 업무 스타일로 갈등과 대립의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고, 각자의 장점을 받아들이며 시너지 효과도 내고 있다. 희숙 씨는 “업무 스타일이 너무 다르다. 인원이 적어 다양한 의견을 낼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시행착오를 줄이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버지는 액션을 먼저 취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스타일이어서 답답할 때도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강한 추진력도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리스크를 안고서라도 목표를 이뤄내는 사람이 진정한 사업가 아니겠는가. 이런 점은 배우고 싶다”고 웃음을 내보였다. 김씨는 “제조업인 대우포장과 아이디어 회사인 이별이야기는 성격이 다른 회사로 상황에 맞는 대처를 해야 하는데 딸은 아직 어려서 그런지 추진력과 결단력 면에선 아직 부족하다”면서도 “고객의 니즈를 잘 파악하고, 보스가 아닌 리더의 특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2년 동안 서로 갈등과 보완을 이루다 출시한 이별이야기는 친환경적인 소재와 독창적인 디자인, 합리적인 가격으로 2개월 만에 별다른 홍보 없이도 반려인들의 큰 관심을 받으며 하루 20여 통의 주문 전화와 매일 100여 명이 넘는 인터넷 사이트 방문자 수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 반려동물 전체 시장 아우르는 ‘인프라 구축’이 목표…향후 ‘반려견 문화센터’ 건립도 장례문화의 상품화는 사실상 엔딩 사업이다. 하지만, 엔딩은 또 다른 시작과 맞닿아 있다. 이 업계에서 가장 열악하다는 ‘장례’ 분야에서 사업을 시작한 부녀는 앞으로 반려동물의 출생에서부터 살아가는 과정 전반에 대한 테마별 사업을 준비할 계획이다. 반려동물 시장 전체를 아우르는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김 씨는 “장례용품의 브랜드화 이후에는 반려동물이 사람들과 교감하는 문제를 다룰 계획”이라며 “사람을 근본으로 반려동물이 사람을 더 잘 케어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반려동물 문화센터’를 건립해 센터 내 공원 조성과 다양한 교육 콘텐츠, 반려동물 라이프 사이클에 맞춘 프로그램 교육도 진행할 계획이다.그는 “사실상 센터건립을 위한 부지 매입도 끝나 본격적인 사업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면서 “이 분야의 첫 주자로서 모범적인 콘텐츠를 구성하고, 내 회사ㆍ내 사업이라기 보다 반려시장 전체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가짐으로 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일본에서 건너온 화장 문화의 배울 점도 많지만, 앞으로 장례문화 시장을 구축해 일본으로 역수출하는 것도 또 하나의 목표”라고 덧붙였다. 희숙 씨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아직 두 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업계 관계자로부터 꾸준한 연락을 받으며 좋은 시작을 보내고 있다”며 “책임감을 갖고 반려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장례업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이어 “우리 삶에 녹아든 반려동물은 안정감과 상실감이 공존한다. 가족을 보낼 때 최소한의 예식을 갖추는 것이 펫로스 증후군을 극복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다”며 “착한 가격과 좋은 품질로 예식을 치를 수 있도록 준비한 만큼 반려인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남양주=하지은기자

[가업 잇는 100년 기업] 수원 매산시장 별미떡집

수원 매산시장에는 2대에 걸쳐 손맛을 내는 별미떡집이 있다.김성복 씨(68), 이기순 씨(65) 부부가 운영하는 이곳은 이제 아들 김창모 씨(36)가 가업을 물려받으려고 함께 일하고 있다. 이미 소문을 타고 시장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사러 오는 사람이 있을 만큼 ‘유명 맛집’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게는 소박하다.기계 5대 가운데 딱 한 대만 자동화 기계이고 나머지는 모두 반자동이다. 아들이 가업을 이어받을 만큼 세월이 흘렀고 자동 시스템이 척척 해내는 시대라 해도, 사람 손을 거쳐야 맛이 난다는 별미떡집만의 철학 때문이다.작은 점포가 옹기종기 모인 매산시장을 찾아 김 씨 부부와 아들 창모 씨를 만났다. 소박하고 덤덤하게 자신들의 전통과 맛을 이어나가는 이들의 장사 철학과 자부심은 거상(巨商)이었다.■ 창모씨와 네 남매 모두 키워낸 별미떡집 1975년 12월. 한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이 파고든 어느 날, 27살의 성복 씨와 24살의 기순 씨는 100일도 안 된 큰딸을 업고 안양에서 수원으로 넘어왔다. 노상 일을 하던 부부는 먹고살기 위해 수원 매산시장의 옛 이름인 역전시장에서 떡집을 차려 터를 잡기로 했다.보증금 10만 원에 월세 5천 원짜리 점포의 ‘공주떡집’. 기계도 하나 없이 떡을 찧을 절구 달랑 하나 빌려온 게 다였다. 변변한 도구는 없었고 당시 시장에 떡집만 해도 수 곳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자신 있었다. 형님들이 이미 떡집을 하고 있어 그동안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게 있었다. 개피떡, 반달떡을 만들려고 절구로 쳐서 손으로 밀어내고 만들어 대야에 싣고 나가 도매로 팔았다. 장사가 만만치는 않았다. 갓난아기를 업고 기순 씨도 함께 가게에 나가 튀긴 떡으로 끼니를 때우며 장사를 도왔다. “어찌 말로 하다겠어요. 첫날 판 게 350원어치야…. 그 뒤로도 장사가 안돼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당시를 떠올리던 성복 씨의 눈가가 어느새 빨개졌다. 몇 년 시간이 지나자 가게도 점차 자리가 잡혔다. 토ㆍ일요일 잔칫날엔 주문이 밀려들어 왔다. 부부도 신바람이 나 더욱 열심히 일했다. 비수기인 여름에도 하루 2~3시간만 잘 수 있을 만큼 일은 고되고, 바빴다. 연탄불을 피워서 시루를 만들고 부부가 손으로 모든 작업을 마칠 때면 밤 11시가 훌쩍 넘었다. 그러곤 새벽 2시에 일어나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네 남매 모두를 키워냈다. ■ 쉽지 않았던 가업승계 결심…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 매산 시장에서 40여 년간 이곳저곳 다니며 장사를 하다 보니 가게는 연탄불에서 석유 버너, 가스를 넘어 이제 전기를 사용할 만큼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부부는 힘에 부쳤다. “자식 중 누가 물려받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는 김 씨 부부는 떡 장사를 하면서 그 누구보다 자식들 교육엔 신경 썼다.각자 대학을 나와 갈 길을 가는데 쉽게 자식에게 가업승계를 건의할 자신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물린 탓인지 명절에도 떡이 들어간 떡국을 먹지 않는 자식들이었다. 그러던 중 막내아들 창모 씨가 “내가 해보겠다”고 나섰다. 어찌 보면, 아픈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창모 씨의 세 번째 손가락은 다른 손가락들과 크기가 다르다. “창모가 3살 때 내가 업고 떡을 만들다가 포대기랑 아기를 내려놓고, 잠깐 딴 일을 하는데, 포대기가 기계에 들어가서 아기가 그걸 빼낸다고 하다가 같이 손가락이 들어간 거야. 얼마나 아팠을꼬. 근데 울지도 않았어.” 어머니 기순 씨가 말했다.어릴 적 떡 기계에 손가락이 절반가량 절단된 사고를 당한 창모 씨는 7년 전인 29살부터 일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는 식품가공학과를 다니고, 대학교는 식품영향학과를 나왔다. 어찌 보면, 떡집과도 맞는 셈이다.대학 졸업 후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던 창모씨는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일을 조금씩 도왔다. 그러기를 몇 년 하다 보니 ‘내 일이 됐다’고 한다. “결심하기 전까지 쉽지는 않았어요. 부모님께서 고생하신 모습을 워낙 많이 본 데다, 떡 장사는 안 하겠다고 마음먹었었어요. 잘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죠. 많이 고민했어요.” 그런 창모씨는 이제 창업자인 부부에게 ‘기술자가 다 됐다’는 말을 들을 만큼 실력자가 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난 7년간 하루에 1번가량 쉬고 매일 떡집에서 16시간씩 보냈다. 이제 별미떡집엔 맛 전문 기순 씨가 인절미와 절편을 만들고, 아버지 성복 씨는 바람떡과 꿀떡을 만든다. 아들 창모 씨는 시루떡, 백설기 등을 만들고 떡을 찧는 일, 각종 다양한 일을 맡아 가업승계를 준비 중이다. ■ 전통의 손맛 잇고 젊은 트렌드 반영한 사업 계획 워낙 단골이 많은 떡집이다 보니 아들 창모 씨를 알아보고 응원하는 이들도 많다. 창모 씨는 기존에 있던 단골손님들에게 맛있다며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앞으로 자신이 이곳을 이끌어 나갈 생각에 설렘도 크지만, 어깨도 무겁다. “부모님께서 힘겹게 일군 사업을 제대로 해야죠. 하지만, 저만의 방법과 전략을 찾아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될 겁니다.” 아들 창모 씨는 앞으로 자신이 운영하게 되면 혼자 떡집을 운영할 계획이다. 종업원을 둘 형편이 될 때까지 욕심 내지 않고 할 수 있는 한에서 사업을 일궈나간다는 것이다. 자신이 운영하고서도 떡집이 안정되면, 요즘 트렌드에 맞춘 떡 카페를 만들 계획도 있다. 떡집에서 만든 떡을 카페에 납품해 이원화 시스템으로 가게를 운영할 예정이다. 가업승계를 위해 일을 배우는 데 전념하는 그는 요즘 시장 상인회에도 활발히 활동하며 젊은 활기를 시장에 전파하고 있다.그래서인지 경쟁력이 뭐냐는 질문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경쟁보다는 시장 주변 가게와 상인들과 함께 커 나갈 거예요. 시장이 살아야 우리 떡집도 살고, 옆 가게가 잘 돼야 우리 가게에도 손님이 오는 거니까요. 요즘 전통시장이 어려운데 우리 떡집뿐만 아니라 다른 가게도 함께 흥할 방법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 손님에겐 더 많이, 이익은 적게…아버지의 당부 자신만의 생존 전략과 현재를 살아내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창모 씨가 딱 하나 바꾸지 않는 게 있다. 바로 손맛을 내는 비법이다. 별미 떡집은 지금도 팥을 기계에 넣어 빻지 않고 직접 삶아 가게에서 손으로 빻는다. 40여 년 전 처음 ‘공주떡집’으로 김 씨 부부가 떡집을 열었던 당시 그랬듯 전통의 맛을 지키기 위해서다.명절에 그 많은 물량을 처리해야 하지만, 송편은 모두 손으로 만들어서 판다. 창모 씨는 “사람 손을 거쳐야 맛이 나는 건 세월이 변해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며 “자동화된 기계를 사용하기보단 손으로 직접 반죽을 넣고 앙금도 하나씩 집어넣고 해야 쫄깃한 맛이 난다. 이 방법은 당분간, 아마 오랜 세월 변치않고 지켜나갈 것 같다”고 말했다. 손맛을 내는 전통 시스템은 이어가지만, 창모 씨가 맛을 내는 또 다른 비법이 있다. 성모씨 부부가 연륜으로 맛을 낸다면, 그는 젊은이답게 정확성으로 맛을 낸다는 것. 저울에 재 비율을 일정하게 맞추다 보니 오차가 없다. 성복 씨는 “우리는 구형이고 아들은 신형”이라며 “이제 신형에 맞춰서 해야 하지만, 그동안 지켜온 것을 또 다른 가치도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아들을 보며 말했다. 바로 서민들이 먹기 좋게 가성비 좋은 떡을 만들고, 누구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맛좋은 떡을 만들어 달라는 거다. 참기름도 여전히 직접 짜다가 쓰고, 좋은 쌀, 좋은 재료만 고집해 손님들에게 넉넉히 인심 좋게 판매하던 김 씨 부부였다. 성복 씨는 “아들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양도 많고 저렴하게 판매해서 누구든지 배불리 맛좋은 떡을 먹을 수 있게 했으면 좋겠어요. 장사가 뭐 별거 있나요. 소비자 눈 속이지 않고, 좋은 재료 써서 정량으로 파는 거죠. 이익은 적게, 손님에게 더 크게 베푸는 거, 그게 장사꾼이 흐뭇한 거거든요.”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던 창모 씨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자연기자

[가업 잇는 100년 기업] 광주 전통장류 별미식품

소보꼬는 50년 전통 장류 제조업체 별미식품의 대표 브랜드다. 브랜드명인 소보꼬는 ‘소고기 볶음 고추장’의 줄인 말이다. 해당 브랜드는 한국 전통 고추장의 깊은맛에 한우, 전복, 새우의 영양을 더한 프리미엄 고추장을 선보이고 있다. 소보꼬는 꾸준한 인기와 훌륭한 제품 품질 등을 토대로 올해 7월 한국마케팅포럼에서 주관한 ‘대한민국소비자만족도 1위’ 시상식에서 식품(장류)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대표 장류 브랜드로 우뚝 선 소보꼬의 출발은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우리나라 대표 떡볶이 명소로 자리잡은 서울 신당동에서 소보꼬의 이야기는 시작됐다. ■ 별미식품의 시작 산업화 이전이었던 1965년 서울 신당동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동네였다. 당시 부촌으로 통하긴 했지만, 그건 극히 국한적인 이야기였다. 주변은 논밭천지였고, 집이 뜨문뜨문 있다곤 하나 개 중엔 판잣집이 많았다. 집집마다 화장실이 없어서 아침이면 공중변소 앞에 긴 줄이 늘어섰고, 새치기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변소 앞에선 늘 목불인견의 드잡이가 벌어지곤 했다. 속된 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의 풍경이었다. “별미식품은 제 조부모님께서 만든 장류업체예요. 평양이 고향이신 할머니께선 전쟁통에 피난민 대열 속에 섞여 서울 신당동에 자리를 잡으신 뒤 평양냉면집을 운영하셨어요. 장사가 무척 잘 됐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독실한 기독교신자이셨던 할머니께선 냉면집 손님들이 자꾸 술을 달라고 하시는 게 싫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결국 냉면집 문을 닫으시고 쌀고추장 장사를 시작하셨어요.” 별미식품 지현준 대표(34)가 들려준 회사의 시작이었다. 지 대표는 별미식품 창업주이자 초대 대표였던 고(故) 양재선 할머니의 손자다. 그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난 2015년부터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할머니께서 상당히 트이신 분이셨어요. 당시만 해도 쌀이 상당히 귀한 시기였잖아요. 고모님들 말씀에 따르면 할머니께선 쌀을 얻어서 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부가 가치를 만들어야지만 남는 게 있을 상황이었어요. 할머니께선 고민 끝에 쌀을 이용해 고추장을 만들기 시작하셔서 옆동네인 왕십리 곱창집에 쌀고추장을 공급하셨어요. 다행히 왕십리 곱창집 사이에서 할머니 쌀고추장에 대한 입소문이 나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거래를 시작한 몇몇 왕십리 곱창집에서는 지금까지도 고정적으로 저희 고추장을 써주고 계세요.” 너나없이 먹을 게 없던 시절, 고추장은 부동의 1순위 반찬이었다. 여기에다 왕십리 곱창집의 지지 덕분에 별미식품은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 점차 덩치가 커지면서 별미식품은 서울 상일동에 자그만한 공장도 차릴 수 있었다. 버젓한 중견기업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양 할머니는 회사 성장 과정에서 쌓은 부(富)를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썼다. 정기적으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쌀을 나눠줬고, 동네 어르신들을 위한 잔치를 열었다. 이런 나눔활동으로 양 할머니가 서울 중구와 서울시로부터 받은 표창만 수십 개에 달한다. 별미식품은 1983년 공장부지를 경기 광주 곤지암으로 옮겼다. 서울에서 입지를 확고히 다졌지만 상일동 공장부지에 고속도로 개설 공사가 진행되면서 20년 가까이 정든 터를 떠나야 했다. 광주 곤지암으로 이전하면서 별미식품사 대표 자리도 바뀌었다. 양 할머니의 아들인 지명섭씨가 대표 자리를 이어 받은 것. 별미식품의 두 번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 위기의 90년대 90년대로 접어들자 고추장업계 판도엔 큰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대상(현 청정원)과 제일제당공업(현 CJ제일제당)이 고추장산업에 뛰어들면서 시장은 두 기업에 의해 양분화됐다. 두 공룡기업이 차지한 고추장의 시장점유율은 90%이상. 남은 10%를 놓고 소상공인들이 경쟁을 펼치는 모양새를 띠게 됐다.문을 닫는 곳도 하나둘씩 늘기 시작했다. “90년대만 해도 광주에서 고추장과 된장을 만들어 판매하는 곳이 30여 군데는 됐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대기업이 고추장산업에 진출하면서 점차 사라져 이제는 저희 별미식품 하나만 남게 됐어요.” 지 대표는 90년대 일었던 변화의 물결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로 ‘사람’을 꼽았다. “할머니도 그러셨고, 아버지도 사람관리를 정말 잘 하셨어요. 당장 손해를 보셔도 한 번 인연을 맺은 거래처 사람들과는 약속을 꼭 지키셨어요.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셨어요. 베품의 연속이셨죠. ‘주인 행세 하지말고, 늘 직원들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할머니의 가르침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지 대표는 비결로 또 하나를 덧붙였다. “기본적으로 저희 제품을 찾아주시는 분들이 장맛은 쉽게 바꾸지 않으셨어요. 저희도 같은 제품을 계속 출시하면서 품질을 유지하다보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한 차례 고비는 넘겼지만, 위기는 계속됐다. 대량생산에 이은 박리다매식 대기업의 물량 공세에 별미식품사는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갔다. 매출도 반토막이 나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그야말로 존페의 기로에 몰리게 됐다. 지 대표는 “아버지께서도 너무 힘든 나머지 몇 번이고 사업을 접을까 생각하셨다”고 했다. 지 대표가 가업에 뛰어든 것도 이 무렵이었다. “어릴 적 고추장, 된장을 멀리했어요. 다만 요리하는 걸 좋아했는데 고추장, 된장이 좋은 재료인 만큼 세련되게, 맛있게 만들면 케첩이나 마요네즈처럼 좋은 제품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어요. 또 제가 장류업체 대표 손자로,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고추장, 된장을 만드는 일은 할래야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이런 생각들이 집안일을 거드는 방향으로 연결됐어요.” 내리막길을 걷던 가업을 일으켜 세우기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막막했던 게 사실이에요. 공장에서 일을 배우다가도 그 과정에서 한계가 느껴지더라고요. 정해진 것들만 배우니까요. 게다가 제품을 확산해야 하는데 이미 시장은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어 끼어들 틈이 없더라고요.” 한계를 실감한 지 대표는 2015년 중진공 청년창업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변화를 위한 포석이었다. ■ 소보꼬 그리고… 중진공 청년창업사관학교에서 교육 과정을 밟으면서 지 대표는 장류업계 뿐 아니라 유통, 식품업계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심층 인터뷰를 했다. “고추장하면 일반적으로 냄새나고, 조리하기 어려운 제품으로 생각하시더라고요. 더욱이 요즘 젊은 사람들은 간편식을 선호하는데 고추장은 참 괴리감이 느껴지는 제품이었죠. 그래서 프리미엄으로 사람들이 보다 접근하기 쉽고, 소스 하나로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고추장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소보꼬는 이렇게 시작됐다. 소보꼬의 반응은 지 대표도 놀랄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소보꼬가 처음 판매된 곳은 광주의 한 어머니들의 모임. 규모가 작은 커뮤니티인지라 지 대표 스스로도 ‘이게 과연 팔릴까’라고 반신반의했다고. 하지만 준비해 간 소보꼬 30병은 1시간 만에 동이 났고, 엄마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타면서 주문이 밀물처럼 쏟아졌다. 소보꼬는 이후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 등 프리마켓에서도 완판 행진을 이어갔고, 현재는 인터넷쇼핑몰, SM엔터테인먼트 SUM마켓, 쿠팡, 프리미엄 푸드마켓 등에서 활발히 유통되고 있다. 소보꼬의 인기에 힘입어 별미식품의 매출도 전년도 대비 60% 이상 껑충 뛰었다. 지 대표는 “소보꼬는 고추장 반, 한우 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며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물론이고 젊은 사람들 입맛에도 맞게끔 만든 게 주효한 것 같다”고 했다. 소보꼬 흥행에도 지 대표는 아직 ‘위기’라고 말한다. “소보꼬가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사정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고비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아직 다 극복했다고 말한 순 없죠. 지금도 일손이 부족한데 충원은 되질 않고 있거든요. 저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설령 오늘까지 하고 그만둔다고 해도 제가 가진 역량을 다 발휘하고, 주위 분들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란 생각으로 일하고 있어요.” 지 대표는 다섯살배기와 일곱살배기, 두 자녀가 있다. “아이들이 이 가업을 이어 백년가업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느냐”는 질문에 지 대표는 미소를 지었다. “고추장을 파는 것이 100년을 할 수 있는 사업은 아닌 것 같지만, 아이들이 무척 좋아합니다. ‘소보꼬’, ‘소보꼬 사세요’라는 말을 많이 하거든요. 아이들이 가업을 승계한다면 좋은 회사로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하하.” 조성필기자

[대한민국의 새 길-원로에게 듣는다] 일면 스님·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이른 바 현시대를 ‘갈등의 시대’라고 부른다.갈등이 끊이지 않는 정치권은 물론, 오래도록 극복되지 않는 남북갈등과 지역갈등, 여기에 최근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갑과 을의 갈등, 세대 간 갈등이 폭발 직전까지 다다르고 있다.대한민국 사회에 만연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해법은 없을까? 경기일보는 다양한 갈등 해결 방법과 삶의 가치 등에 대해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일면 스님에게 들어봤다.일면 스님은 조계종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으로 장기기증 확대에 앞장서고 있으며, ‘자비의 전화’ 운영, 13년 동안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합동 결혼식을 무료로 올려주는 등 부처의 자비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남양주시에 위치한 불암사에서 만난 일면 스님은 “행복은 자기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스스로를 귀하고 소중하다고 여기면 행동도 달라질 것”이라며 “자신을 귀하게 여기면 남도 귀하게 된다. 우리 안에 있는 스스로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최근 이주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에 주례로 참석해 잔잔한 화제가 됐다.이주노동자들의합동결혼식에 주례를 서시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불암사가 의정부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송산노인종합복지관에서 지난 2005년부터 돈이 없어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는 소외계층이나 다문화 가정,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무료로 합동결혼식을 거행하고 내가 주례를 맡고 있다. 13년간 80여 쌍의 결혼식을 진행했다. 복지관을 운영하는 것도 그렇고, 종교가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베푸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는 자비를 가장 소중한 가르침으로 품고 있다. 돈이 있고 시간을 내야 보시를 한다고 생각하는데 무재칠시(無財七施)라고 재물을 들이지 않아도 상대방을 위하는 일곱 가지 보시가 있다.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으로 사람을 대하는 안시(眼施), 늘 웃는 화안시(和顔施), 부드럽고 공손한 말투인 언사시(言辭施), 남의 짐을 들어주거나 행동으로 남을 돕는 신시(身施), 따뜻한 마음을 내는 심시(心施),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상좌시(上座施), 식사를 대접하거나 쉴 곳을 마련해주는 방사시(房舍施)가 그것이다. 무료 합동결혼식도 큰돈이 드는 것이 아닌 이분들과 함께 웃어주고 손잡아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좋아해 줘 내가 오히려 감사하고 갈 때마다 배우고 온다.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장기기증 문화조성에 앞장서고 있는데. 나 역시 간경화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지난 2000년 간이식 수술을 통해 새 생명을 얻었다. 만약 당시 나에게 간을 기증해 준 22살의 뇌사자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장기기증은 더불어 살아가는 징표라고 생각한다. 생명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피를 나눈다는 뜻이다. 장기기증은 곧 피를 나누는 부모 자식 간 혹은 형제간 인연을 맺는다는 것과 같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연인가. 만약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피를 나눈 혈연 사이처럼 상대방을 위한다면 갈등이나 혼란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생명나눔실천본부에서는 자살예방을 위한 다양한 활동도 펼치고 있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이야기를 해주는지. 자살률 세계 1위라는 사실에 종교지도자로 참으로 큰 책임감을 느낀다. 밝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고 강조하는 것이 종교인데 우리 종교가 제대로 역할을 못해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반성할 때가 많다. 자살을 개인적인 문제로 돌리는 시각에는 반대한다. 물론 성품이나 가정환경 등 지극히 개인적 요소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경우도 많겠지만 그러나 자살률이 세계 1위라는 것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점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를 공업(共業)이라고 하는데, 요즘으로 치면 경제적 불평등, 환경 문제, 세대 갈등, 교육 문제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다양한 사회 문제 중 가장 큰문제로 ‘저출산’문제를 꼽고 있는 전문가들이 많다.저출산에 따른 미래사회에 재앙이 우려되고 있는 시점인데, 저출산을 극복하려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인연에 따른 것이다. 인위적으로 조절해서는 안 된다. 저출산은 사회적 과제 이전에 생명에 대한 요즘 젊은 분들의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 없다고 결혼을 기피하고 키우기 힘들다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돈이 많고 사회가 양육한다고 해서 아이를 낳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명을 생명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고 조건과 상황에 따라 선택적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와 사회도 젊은이들이 마음 놓고 출산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주택과 의료, 교육 문제를 사회가 해결돼야 한다. 보육시설 확충이나 임신과 출산한 아내와 남편에 대한 배려 등 출산과 직접적 연관있는 것에 대한 지원 등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지난해 최순실 사태가 발생한 후 대통령 탄핵과 조기대선, 그리고 새 정부 출범 후에도 우리 사회의 갈등이 가라앉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갈등을 봉합하고 화합과 상생의길을 가기 위한 방법은. 사람이 모여 살아가는 곳에는 늘 갈등이 있다. 심지어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출가자 집단에도 무수히 많은 갈등이 있다.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도 제자들이 편을 나눠 싸운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갈등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닌가. 문제는 갈등의 생성이 아니라 갈등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할 것인가라는 것이 중요하다.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내가 옳다고 우기기 때문이다. 나는 옳다(是), 너는 그르다(非)고 나누고 분별하는 데서 갈등이 생긴다. 그런데 사실은 옳고 그른 것은 없다. 그냥 ‘일어난 일’에 불과하다. 무엇인가 인연이 생겨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냥 산(山)이고 물(水) 일 뿐이지 산이 옳고 물이 그르다고 하면 이게 서로 합의가 되겠는가. 이 엄연한 사실만 서로 인정하면 갈등이 생길 까닭이 없다. -내년이면 ‘경기’라는 이름이 생긴지 1천년이 된다.전국 최대 지방자치단체이기도 한 경기도는 새로운 천년을 위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 할까. 경기(京畿)라는 말은 왕이 있는 왕도를 보호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지금으로 치면 우리나라의 중심이라는 말이다. 불암사 역시 왕이 있는 한양을 보호하고 왕실과 백성의 안위를 지키는 사찰로 지정됐으니 경기도와 불암사는 같은 유래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세조 때 한양 외부 사방에 왕실의 발전을 기원하는 사찰을 뽑는데 남쪽은 삼막사, 북쪽은 승가사, 서쪽은 진관사, 그리고 동쪽은 불암사가 뽑혔다. 이 유래 안에 경기도의 미래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왕실이 무엇인가. 왕조시대에는 주인이다. 오늘날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평안케 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중앙과 지방 정부도 그 같은 역할을 수행하지만 특히 경기도가 그 중심이라는 것이다. 국민이 평안하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아야 하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고, 질병의 공포에서 벗어나야 하며, 자식을 키우는데 근심이 없다는 것이다. 경기도는 지자체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북한과 휴전선을 맞대고 있으며, 서울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그러한 자부심을 갖는다면 천 년 전 고려시대에 ‘경기’라는 지명이 생기고 지금까지 백성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켜왔듯이 앞으로의 천 년도 한국을 이끄는 중심 지자체로 위상을 굳건히 갖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끝으로 취업난에 희망을 잃어가는 청년들, 빈곤에 허덕이는 노인 분들, 치열한 삶을 살면서도 행복수치는 낮은 중장년층 등 우리사회 구성원들에게 꼭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태어나시면서 이렇게 외쳤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이 말뜻은 하늘 아래 하늘 위 인간이 가장 소중하니 세상의 모든 고(苦)를 떨치고 평안케 하겠다는, 부처님 탄생 선언이다. 이 말 속에 부처님 가르침과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들어 있다.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 즉 내가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인종, 피부색, 종교, 신분, 내 아버지가 누구이며, 어느 학교를 나왔고, 내 살아온 이력이 무엇이든, 지금 무엇을 하고 무슨 옷을 입고 어느 아파트에 살든지 관계없이 누구나 그냥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절대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존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조건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상대방뿐만 아니라 나도 나를 그렇게 바라본다.그래서 ‘난 죽어야 해’ ‘난 이렇게 살아도 싸’ ‘난 욕 먹어도 돼’하면서 스스로를 비하한다. 자기 비하가 자신을 점점 더 비참하게 만들고 삶을 어렵게 한다. 우선 자신을 비하하는 그 수렁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절대적으로 귀하고 소중하다고 여기면 행동도 달라질 것이다. 실제로 귀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귀한 행동을 하고 실천을 한다. 행복은 자기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일면 스님·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은…1959년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명허화상을 은사로 입산1968년 경남 합천 해인사 승가대학 대교과 졸업1979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승가학과 졸업1988년부터 대한불교조계종 제 9, 10, 11, 12, 13대 중앙종회의원1993년 학교법인 광동학원(광동중ㆍ고, 의광고)이사장2005년 대한불교조계종 군종특별교구 초대교구장2005년 사단법인 생명나눔 실천본부 이사장2012년 대한불교조계종 호계원 호계원장 역임2015년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38대 이사장 역임2015년 로스엔젤레스 동국대학교(DULA)이사장 역임대담 =이선호 문화부장 정리 =이호준기자

[개성·강화 2018 고려개국 1100년] 인천시 ‘江都의 꿈 실현’ 프로젝트

2018년 고려개국 1100주년을 맞는다. 강화는 남한의 유일한 고려의 도읍지다.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강화로 천도하면서 1232년(고종 19년)부터 1270년(원종11년)까지 39년간의 고려 도읍으로 황도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던 강도(江都)를 역사현장에 살려내기 위해 인천시가 강도(江都)의 꿈을 실현하고자 한다. 국내 최대의 고려 유적 보유 도시인 인천시가 역사적 가치 재조명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인천시는 ‘문화적 가치 창조를 통한 고구려 역사문화도시 인천’ 구현을 위해 ‘강도(江都)의 꿈 실현’이라는 목표로 5대 분야 20개 프로젝트를 추진중에 있다. 강도(江都)의 꿈은 고려 역사유산의 재정비, 고려 궁지,팔만대장경 판당에 대한 조사연구, 역사교류 확대 등이며, 궁극적으로는 고려역사문화단지 조성을 통해 잊혀진 고려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해 역사문화관광의 중심지로 인천을 우뚝 세우기 위한 사업이다. ■ 사라진 ‘고려궁궐’ 새생명 시는 궁궐 재건을 위해 고려 강화도성 시기 궁궐 미니어처 제작 및 소규모 전시관을 내년도에 개관 할 계획이다. 고려역사 체험을 통해 고려시대 당시 강화의 역사문화를 관광상품화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또 고려궁지 정궁 발굴 및 재건 사업을 2017년부터 2035년까지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고려 궁궐 및 성곽에 대한 발굴·재건을 통해 고려사가 갖는 역사성을 회복하고 역사문화유산 도시의 정체성을 확보해 정궁을 중심으로 역사문화단지 조성의 단초를 마련할 방침이다.시는 강도시기의 역사문화를 중심으로 고려·조선시대의 강화역사 전반을 보여주는 국내 대표 역사문화단지를 오는 2045년까지 단계별로 추진하고, 고려역사문화지구 지정 또는 고도 지정을 위해 인천발전연구원 정책과제로 기본구상을 수립중에 있다. 시는 경북 경주의 신라문화단지, 충남 부여 백제문화단지 처럼 강화에 역사문화단지를 추진 나갈 계획이다. ■ 찬란했던 ‘고려 기록유산’ 부활 시는 팔만대장경 판당(보관터)을 찾기 위한 학술조사를 통해 고려 강도(江都)시기 팔만대장경 판각 중심지로서의 강화 위상을 확인한다. 또 ‘(가칭) 평화대장경 간경도감 준비위원회’ 발족을 통해 고려역사의 가치 제고 및 전통의 현대화 실현을 통해 오는 2032년에 강화천도 800주년을 기념해 ‘평화대장경’을 봉안할 계획이다. 사라진 상정고금예문을 추적하는 미스테리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고려 강화도성 시기의 금속활자 인쇄술의 우수성을 내년도 고려개국 1100주년 기념사업과 함께 추진하고 있다. 시는 오는 2027년 강화에 세계기록유산 자료관을 개관하고, 강도(江都)시기 팔만대장경 판당지가 확인되면 해당 위치에 재건할 방침이다. ■ ‘근대 문화유산’ 가치 재창조 시는 프로그램 중심의 세계 최초의 신개념 ‘지붕없는 국립강화박물관’을 오는 2020년 개관을 목표로 설립·운영할 계획이다. 또 강화소재 7개소(조양방직 공장, 교통교회, 남관제묘, 전통한옥, 개량형 한옥 등)의 근대건축물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근대문화유산의 보호와 관리로 인천의 가치 재창조를 정립해 나갈 방침이다.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으로 불리는 송암 박두성 선생의 생가를 복원해 인천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을 기념할 계획이다. ■ 세계유산 등재·국보 지정 추진 시는 중요유산에 대한 세계유산 등재 및 건조물의 ‘국보’ 지정을 추진한다. 지난 2000년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지석표 등 총 70기가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시는 강화산성, 강화외성, 삼랑성, 강화돈대 26개를 ‘해양관방유적’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또 고려왕릉 4기(흥릉, 석릉, 가릉, 곤릉)도 고려개국 1100주년 기념사업과 연계해 등재를 추진중에 있다. 이와함께 강화 정수사 법당(보물 161호)과 강화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의 ‘국보’ 지정을 신청한 상태다. ■ 다양한 ‘고려개국 1100주년’ 기념사업 시는 강화 고려궁지 범위 조사를 위한 용역을 추진중이다. 사업예산 2억원으로 문화재청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와 강화군과 협력해 강화 고려궁지에 대한 용역을 2018년까지 추진한다. 강화 고려궁지의 정확한 위치 비정과 범위 확정은 강도(江都)시대 연구의 중요한 과제로 역사문화콘텐츠 확보의 기초이자 고려궁지의 범위 확정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고려궁지 범위에 대한 각종 문헌자료를 검토하고 있다. 문헌자료를 토대로 고려개국 1100주년인 내년도 하반기에 ‘3D그래픽을 제작’하고, ‘또 하나의 황도(皇都), 강화’란 제목으로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시는 강화 고려왕릉 및 고분 종합 학술조사도 진행중이다. 강화 고려왕릉 및 고분은 강도(江都)시기 고려를 보여주는 자료로 조사를 통해 고려 무덤양식과 장례풍속 연구의 기초 자료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강화 소재 고려왕릉의 피장자는 고종, 희종, 순경태후,원덕태후 등 4개 고분이며, 석릉 주변 고분군 등 훼손이 심한 고분은 순차 발굴할 예정이다. 시는 올해 세부 추진계획을 수립하고, 2018년엔 학술조사와 보고서를 발간하고, 2019년~2021년까지 발굴조사 결과보고서 발간 등을 통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초자료를 확보할 방침이다. 특히 남·북한 교류를 통해 강화~개성 고려왕릉 유물교류 및 사진전을 정례화해 출토 유물의 연관성과 유사성을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회를 추진할 계획이다. 또 내년 고려개국 1100주년을 기념해 UN 주최 남·북한 중학생을 대상으로 강화~개성 교차 수학여행을 추진한다. 시는 강도(江都)시기 불교문화유산 종합 조사·연구도 진행한다. 고려는 강화 천도 이후 개경과 같이 수많은 사찰이 설치됐지만, 위치와 규모에 대한 조사가 빈약해서 강화도 불교 유적 재건의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추진된다. 이밖에 시는 강화~개성간 자매결연 사업 추진을 위해 시 내부에 강화~개성 자매결연 추진 TFT를 설치하고, 정부 동의 및 지원을 통한 개성 방문을 추진할 계획이다. 시는 내년도에 인천시와 개성시 자매결연 제안 등 남북간 교류·협력을 통해 평화도시로서의 인천 위상을 확보할 방침이다. 이와함께 ‘아시아 속의 고려, 고려속의 인천’이란 주제로 국제학술회의 개최를 통해 인천 강화~개성간의 한반도 평화 및 다양한 사업 전개의 토대를 마련한다는 구상이다. 시는 올해 상반기 세부 추진계획을 수립하고, 대북 접촉승인 요청 등을 추진하고 있다. 허현범기자

[개성·강화 2018 고려개국 1100년] 고려와 영욕을 함께한 섬, 강화도

고려는 왕건 가문이 고려를 개국하기 전 신라시대 때부터 개경-해주-강화를 복심(腹心) 지역으로 삼았다. 태조 왕건(王建)은 이곳을 해상활동의 중심지로 활용하며 이곳의 지배력을 바탕으로 고려를 창건해 후삼국을 통일했다.고려는 대몽항전 때도 이 지역의 복심적 위치 특성을 살려 교통통신망 체계를 거의 그대로 이용했다. 고려는 강화(江華)로 도읍을 옮기며 군으로 승격시켜 강도(江都)라고 불렀다. 강도는 압도적인 전투력을 지닌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해 그 예봉을 피할 수 있는 해도(海島)였다. 조석간만의 차이와 한강임진강예성강이 합류하면서 만드는 물살을 이용해 방어에 유리할 뿐 아니라 섬 안에 비옥한 평야가 많다. 강도는 장기간 대몽항전에서 지리적 이점으로 전시수도로서 구심점을 제공했고, 민족체의 자주성을 지키고 일체성을 고양시켰다. 역사적으로도 오랫동안 교류의 길목으로 외국사신들이 왕래하고, 물자가 오가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었다. ■ 고려 개국에서 몽골 침입까지 태조 왕건은 신라 헌강왕 3년인 서기 877년 1월 송악군(松嶽郡)에서 출생해 918년 6월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919년 1월 송악의 남쪽에 도읍을 정해 그 군을 승격시켜 개주(開州)라 했다. 태조와 혜종에 이어 즉위한 광종은 960년 3월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로 고쳤다. 거란군이 1011년 1월 개경에 침입해 태묘와 궁궐, 민가를 불질렀고, 1126년 2월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다. 무관이 1173년 10월 3경·4도호·8목과 군현 역사(驛舍)의 모든 관직을 차지했고, 1174년 1월 승려들이 모반에 참여했으며, 1175년 8월 개경의 하급관리들이 남도 농민반란군과 연결해 정변을 계획하다 처형됐다. 1180년 1월 경성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1198년 5월 노비 만적의 난까지 일어났으며, 1227년 5월 개경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몽골군은 1231년 11월부터 12월까지 평주를 함락하고 광주(廣州), 충주, 청주 등을 공격했다. 몽골군 선발대가 개경을 위협하고 일부 병력이 충주까지 내려오자 고려조정은 화의를 요청했고, 몽골군이 1232년 1월 철수했다. ■ 몽골 침략 ‘강화 천도’ 고려는 그해 2월 몽골 침략군을 피하기 위해 천도문제를 논의했다. 몽골은 북계지역인 평안북도쪽에 다루가치를 파견해 경계태세를 무력화시키려 하고 개경에 관리를 파견해 국사를 다스리려 했다. 몽골군이 약탈전을 수행하면서 “지나는 곳마다 잔멸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나온 기록처럼 피해 참상이 심각했다. 집권층에 대한 항쟁도 이어져 최씨 정권은 불안을 느꼈다.고려는 거란 침입 때 육지 거주민을 산성으로, 해안 거주민은 섬으로 강제은신시키는 산성해도입보(山城海島入保) 정책을 실시해 효과를 봤다. 따라서 대몽항전때도 이 정책을 펼쳤고, 4개월 후인 6월 16일 강화(江華)로 도읍을 옮기며 강도시대가 시작됐다. ■ 맨주먹 백성이 ‘대몽항전’을 이끌다 최씨 정권은 왕들을 폐립시켰고, 교정도감과 정방을 설치해 권력을 휘둘렀으며, 무능력으로 대몽항전의 방도를 찾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농민들의 항전의지와 활약이 39년 대몽항전 수행을 가능하게 한 힘이 됐다. 몽골군의 제1차 침략 당시 농민항쟁군 우두머리가 최이에게 정예 5천명으로 적의 침략을 막는 작전을 돕겠다고 제의해 황주의 동선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적을 격퇴시켰다. 살리타이를 사살한 처인부곡의 전투(1232년), 승려 홍지가 지휘해 몽골군을 격파한 상주산성 전투(1254년) 등도 있다. 1236년 온수군에서 향리와 주민들이 몽골군을 물리쳤고, 1256년 대부도의 입보민들로 구성된 지방별초가 몽골병사 100여명을 격파해 패주시켰다. ■ 팔만대장경 조판… 교통·통신망 체계화 최씨정권은 불력으로 전쟁승리를 기원하고 민중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 조판’을 추진했다.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진 초조대장경이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대부분 소실된 상태였다. 16년 만에 완성된 대장경 판각사업은 민중의 광범한 참여가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39년 항전을 가능케 한 교통·통신망 체계도 주목된다. 고려왕조는 일찍부터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조운제와 역제로 대표되는 교통·통신망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개경을 중심축으로 수운을 통한 물자운송체계를 마련했고, 이를 운영하기 위한 제도가 뒷받침됐다. 해도를 전시 피난수도로 삼으면서 수십년간 나라를 이끌었다. ■ 강도서 개경 환도, 그리고 삼별초 1259년 고려정부와 몽골 사이에 강화가 성립돼 전투상황은 끝났다. 이때 최씨정권이 붕괴됐고 무신정권은 10여년간 항전을 기도했다. 하지만 1270년 무신정권 붕괴로 개경환도가 이루어졌다. 무신정권의 무력기반이면서 대몽항전에 참여한 삼별초가 항거에 나섰다. 그들은 종실 왕온(王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거점을 옮겨 대항했다. 1년여 뒤 삼별초는 고려조정과 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해상에서 항전했다. 삼별초의 항전은 1273년 여몽연합군이 제주도를 점령해 평정됐고, 이로써 40여년에 걸쳐 치열하게 진행된 대몽항전이 막을 내렸다. ■ 강화, 한반도 교류의 길목 강화는 오랫동안 새로운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태종무열 7년인 660년 당나라 무장 소정방을 덕물도(덕적도)에 가서 맞이했다는 기록이 있고, ‘신당서 지리지’에는 “진왕석교, 마전도, 고사도, 득물도(덕적도) 천리를 지나면 압록강 당은포구에 이른다”고 나왔다.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나온 해도(海道) 가운데 ‘자연도(영종도)→급수문→합굴→분수령’이 현재의 인천시에 해당한다. 급수문과 합굴, 분수령의 위치는 강화도와 석모·교동도 사이의 석모수로 가운데 어느 지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송사의 고려 열전에서 “예성강은 (중략) 강물이 여울져 흐르는데 이를 급수문이라 일컬으며, (중략) 3일을 가면 강기슭에 다다르는데, 여기에 벽란정이란 객관이 있다. 사신은 여기에서 40여리쯤 가면 고려의 국도에 이른다고 한다”고 나와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강화부 동쪽 갑곶나루를 지나서 바다로 들어가니 전라·충청도에서 배로 실어 온 곡식이 모두 이곳을 거치어 서울에 다다른다”고 나와있고, ‘명종실록’에는 ‘교동(喬桐), 강화(江華), 부평(富平), 인천(仁川), 남양(南陽)의 해로’가 언급돼있다. 조선후기의 조운과 관련해 ‘인천 수로’가 이용된 구체적 사례로서, ‘조행일록(漕行日錄)’에 영흥도와 영종진, 염하, 연미정 등의 지명이 등장한다.백승재기자

[경기천년 999+1, 경기도의 思想과 思想家] 22. 대동법의 완성자, 잠곡 김육

좋은 정치란 어떤 것일까. 국가가 탄생한 이래 언제나 던지는 정치의 본질과 목적에 관한 질문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조선의 정치가 김육은 이렇게 단언했다. “왕자(임금)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백성이 편안한 후에야 나라도 편안할 수 있습니다” (효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 조선의 벼슬아치들은 누구나 ‘민본’(民本)을 주문처럼 외고 ‘위민’(爲民)을 입버릇처럼 말했으나 백성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 관료는 흔치 않다. 더군다나 제도를 개선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정치가는 아주 드물었다. 투표로 정치인을 직접 선출하는 오늘날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 성균관 유생이 숯장수가 되다 잠곡 김육(潛谷 金堉1580~1658)은 30대에 경기도 가평의 잠곡에 들어가 무려 10년 동안 손수 농사를 짓고 숯을 구워 팔며 생계를 꾸렸던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훈구파에게 탄압을 받은 ‘기묘팔현’의 한 사람인 김식의 증손자이고 어머니는 조광조의 아우 조숭조의 손녀이다. 명문가의 후손인 그가 무엇 때문에 산골에 은거하며 밑바닥 생활을 했던 것일까. 임진왜란은 김육의 소년시절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강원도와 평안도를 거쳐 황해도를 떠돌아야 했는데 피난살이 중에 부친이 별세하여 열다섯에 가장이 됐다. 김육은 결혼한 이듬해인 1605년에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 대과를 준비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부친의 유언대로 집안을 일으키려는 뜻을 세우고 공부에 전념했던 결과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육은 명분을 앞세우는 괄괄한 선비였다. 이처럼 격정적인 성품은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림들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성균관 문묘에 모시자는 운동을 벌였다. 김육도 이에 적극 호응했다. 마침내 ‘오현종사’가 실현되었으나 광해군 정권의 실세였던 북인의 영수 정인홍이 자신의 스승 조식이 오현에 빠져 있다는 사실에 분개해 이황과 이언적의 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이때 성균관 유생들의 대표였던 김육은 유학자들의 학적부인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며 맞섰다. 이 일로 김육은 과거에 응시하는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항복 같은 대신들의 변호로 자격은 겨우 되찾았으나 벼슬길에 나가기는 어려운 처지가 됐다. 게다가 정국은 더욱 경색됐다. 1613년에 광해군 정권의 기반인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비롯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계축옥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김육은 자신과 가까웠던 많은 인사들이 유배를 떠나고 관직에서 쫓겨나는 현실에 분노했다. 이때 김육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과거를 포기하고 성균관에서 나왔던 것이다. 김육은 가족을 이끌고 경기도 가평으로 들어갔다. 귀거래를 단행한 대가는 혹독했다. 터를 잡은 잠곡에는 자기 소유의 토지는 물론 거처할 집조차 없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은거를 시작한 김육은 10년 동안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숯을 구워 팔면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 새벽에 파루를 치면 동대문을 가장 먼저 통과하는 숯장수가 김육이었다고 한다. ■ 대동법에 정치 생명을 걸다 인조반정(1623)은 김육의 운명을 역전시켰다. 그도 반정공신들의 추천으로 6품의 벼슬을 받았던 것이다. 잠곡 생활을 청산한 그해, 김육은 문과에서 장원을 차지해 뒤늦게 시작한 벼슬길이지만 탄탄대로였다.평안도 안변도호부사로 재직하던 1636년 봄, 김육은 진하사에 임명됐다. 명나라로 보내는 마지막 사행의 책임자가 된 김육은 대륙의 질서가 바뀌고 있는 현장을 목도했다. 북경에서 병자호란에 패배하여 삼전도에서 항복했다는 비보를 들으며 조선의 국가개혁을 생각하게 됐다. 김육은 이때부터 개혁의 방향과 목적을 안민으로 설정하면서 조세제도의 폐단에 주목했다. 조선의 기본 세법은 조용조(租庸調)였다. 조는 농지세인 전세이고, 용은 군역과 부역처럼 노동력을 제공하는 신역이며, 조는 그 지방의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납을 말한다. 여러 지방의 특산물을 임금에게 바친다는 의미로 시작된 공납은 국가 세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커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지방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산물을 부과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이러한 경우에는 어쩔 수없이 생산지에 가서 해당 산물을 사다가 납부해야 했다.그러자 이를 대행하는 방납이 이루어지게 됐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시작된 방납은 시간이 흐르면서 백성을 못살게 하는 제도로 굳어졌다. 방납업자들이 공납을 받아들이는 관리들과 짜고 농민들이 직접 납부하는 공물을 퇴짜 놓게 하고 자신들이 마련한 물건을 사서 납부하도록 농간을 부렸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김육이 제시한 세제개혁의 방안이 대동법이다. 대동법은 조용조 중에서 조, 즉 공납을 쌀로 통일해서 납부하도록 하자는 방안이다. 김육은 충청감사로 재직하던 1638년에 공납의 폐단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동법 시행을 주장했던 적이 있다. 그가 제시한 대동법의 논리는 간단한 것인데, 세금을 매기는 단위를 가호에서 농지 단위로 바꾸어서 모두 쌀로 납부하도록 하자는 것이다.이러한 주장은 김육 이전에도 있었다. 율곡 이이가 주장한 ‘대공수미법’과 유성룡이 임란 중에 실시한 ‘작미법’이 그것이다. 그러나 작미법은 양반사대부들의 거센 저항을 불렀다. 가호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면 지주나 소작인이 비슷한 액수의 세금을 내지만, 농지 크기로 세금을 부과할 경우에는 대지주들이 세금을 많이 내야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자 작미법은 곧바로 폐기되고 말았다. 그러나 제도를 고쳐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노력은 이어졌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영의정 이원익의 주장으로 경기도에서 대동법이 시작됐다. 대동법을 시행하는 관아를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란 뜻의 선혜청이라 불렀듯이 대동법은 일반 백성들에게 두루 혜택이 미쳤다. 김육은 효종에게 자신의 소신을 이렇게 피력했다. 중국인 화가가 그려준 송하한유도 “대동법은 역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니 진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비록 여러 도에 두루 행하지는 못했지만 기전(경기도)과 관동(강원도)에서 이미 시행해서 힘을 얻었습니다. 만약 또 양호(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시행한다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에도 이익이 되는 도로 이보다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중심에 김장생의 아들 김집과 송시열 같은 서인 명망가들이 있었다. 김육은 서인에 속했지만 당론보다 백성들의 생활안정이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인은 대동법을 찬성하는 김육의 한당과 이를 반대하는 김집의 산당으로 분열하고 말았다. 반대파들은 김육을 왕안석이라며 비난했다.신법을 통해 송나라를 뿌리부터 개혁하려 했던 왕안석(王安石)은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에게 나쁜 정치가의 대명사였다. 왕안석의 반대편에는 자치통감을 지은 사마광을 비롯해 당송팔대가로 유명한 소동파 같은 당대의 명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왕안석의 개혁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김육이 “안석과 같다”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대동법에 집중했던 까닭은 오직 한 가지, 안민(安民)이 정치의 목적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한 치도 흔들리지 않다 김육은 백성들의 살림을 넉넉히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시헌력이라는 서양의 역법을 도입하고, 수레의 사용을 힘써 주장한 것도 나라 경제와 백성들의 살림을 튼튼히 하기 위함이었다. 대부분의 관료들이 화폐 유통에 반대했으나 김육은 선혜청과 상평청을 주관하는 책임을 맡게 되자 실무에 밝은 역관과 서리를 발탁하여 화폐의 유통을 실험했다. 그 결과 이들이 많은 이윤을 남겨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 죽음 앞두고도 오직 대동법 걱정 김육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대동법의 차질 없는 시행을 효종에게 당부했다. “호남의 일(대동법)은 신이 이미 서필원을 천거해서 부탁했는데, 신이 만약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져서 일이 심지어 중도에 폐지될까 염려됩니다. 그가 사은하고 떠날 때 전하께서 힘쓰라고 격려하고 보내셔서 신이 하려고 하던 것을 마치게 하소서” 1658년 9월, 김육이 세상을 떠나자 효종은 이렇게 탄식했다. “국사를 맡아서 김육처럼 굳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김육의 간절한 바람은 사후에 이루어졌다. 1608년 경기도에서 시작된 대동법은 1708년 황해도를 마지막으로 전국에 시행되었으니, 실로 100년 만에 완성된 조선 최고의 민생정책이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경기천년 999+1, 경기도의 思想과 思想家] 21. 조선 사상계의 대표 지성, 서계 박세당

사드를 설치하느냐 마느냐.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긴장수위가 심상치 않다.동아시아 국제질서는 부상하는 신흥국과 기존 패권국간의 충돌로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는 패턴을 보여 왔다. 17세기 역시 명나라가 지고 청나라가 동아시아 질서의 패자로 부상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청나라가 동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서계(西溪) 박세당(1629~1703)은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병자호란(1636)을 겪는다. 인조반정 공신이었던 아버지(박정)와는 4살 때 사별하고 난리가 나자 어머니를 따라 원주, 청풍, 안동 등으로 이리저리 피난했고 호란이 끝난 후에도 청주와 천안 등지를 떠돌아 다녀야만 했다. 13살이 되어서야 고모부 정사무(鄭思武)로부터 학문을 본격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나약한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관직에 진출(33세)하는 듯했으나 주자를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주자학적 중화주의와 정쟁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벼슬을 버리고 수락산 기슭으로 낙향한다. 불과 8년여 만이었다. ■ 망해버린 명나라 숭배 ‘이상한 나라 조선’ 서계는 낙향한 뒤 청나라의 황금기가 시작되는 강희 7년(1668)에 서장관으로 연경을 방문해 청나라의 실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돌아온다. 이때 사행길의 책임자였던 동지정사 이경억은 현종에게 청나라에서 듣고 본 것을 이렇게 보고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번 저들의 사치가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이미 전쟁도 없고 땅을 남쪽 끝까지 얻어서 물화(物貨)가 집중돼 편안히 부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사용하는 기물은 화려하여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망할 조짐이 아닙니다”(현종실록) 라고. 그럼에도 조선 조정은 춘추대의를 앞세우고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해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숭배하는 명분론적 역사인식에 매달려 있었다. 병자호란으로 강토가 유린되고 인조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三拜九叩頭) 치욕을 겪으면서 60여만 명의 백성들이 심양으로 끌려가 노예시장에 팔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국가의 존망과 백성의 안위보다는 공자-맹자-주자-정몽주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의 역사만을 중요시했다. ■ 민생에 이롭다면… 사상의 장벽을 허물다 서계는 “날로 퇴폐되어 가는 세상을 가히 바로 잡아 구할 수 없어” 석촌동으로 은거는 하였지만 ‘먼 길을 가더라도 반드시 여기에서부터’(行遠必自邇) 시작해야 한다고 자각했다. 그리고 몸소 땀 흘려 농사를 지으며 색경穡經을 짓는다.색경 서문에는 “누구든 곡식과 채소 가꾸기를 배우려면 스승을 찾아야 하는데 경험 많은 농부를 제쳐두고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사농공상의 신분제 하에서 농사의 최고 스승이 바로 경험 많은 농부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주자학적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직업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도는 같다고(異業同道) 외쳤던 양명학적 사유가 짙게 배어 있다. 그만큼 서계는 민생에 이로운 것이라면 그 어떤 사상에도 개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이단시하고 있던 노자 도덕경과 장자(莊子)까지도 정사(政事)에 쓸모가 있다고 판단하여 과감히 주해한 것이 이를 잘 드러낸다. ■ 청나라와 싸울 것인가 화의할 것인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싸울 것인가 화의(和議)할 것인가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할 때 지천 최명길(1586~1647)은 화의를 주장한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청음, 동계와 삼학사 등은 절의(節義)를 주장하고 최명길은 화의를 주장했는데… 최명길은 이(利)를 취해 의(義)를 저버린 사람임을 면하기 어렵다”(宋子大全)고 평가한다.우암의 시각으로는 사직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절의를 주장한 청음 김상헌과 삼학사 등은 의(義)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조선과 조선 백성의 안위를 위해 동분서주한 최명길은 ‘명나라에 대한 대의’를 배신한 인물일 뿐이다. 서계의 입장은 우암과는 정반대이다.서계는 “무너지는 사직을 온전히 하고 위태로운 생민(生民)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또 누구의 공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잠자리를 편안히 하고 자손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은택인데 도리어 오늘날 말하는 자들이 그에게 힘 입었으면서도 그 사람을 헐뜯으니 너무도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西溪全書) 최명길의 화의는 그저 그럴듯한 ‘명분’이나 ‘말’이 아니다. 이것이야 말로 국가와 백성을 위한 ‘실질적인 공업(功業)’이라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 공도 모르고 우암이 그를 헐뜯는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 삼전도비문 쓴 백헌 이경석 ‘구사일생’ 백헌 이경석(1595~1671)은 인조의 부탁으로 삼전도비문을 써야만 했다. 그러나 이 행위 역시 도통론적 시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서계가 낙향한 바로 그 해 1668년 백헌이 현종으로부터 궤장(원로대신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왕이 의자와 지팡이 하사)을 받을 때 우암은 ‘수이강(壽而康)’ 즉 오래 살며 강건하다는 글로 백헌을 축하한다.하지만 이 글은 송나라 흠종과 함께 금나라에 잡혀가 항복문서를 쓰고 그들에게 아첨하며 부귀를 누렸던 중국의 역적으로 악명 높은 손적(孫)에 비유한 말이었다. 우암은 백헌이 ‘조선판 손적’이 아니고 누구냐 라고 비꼬았던 것이다.이뿐만이 아니었다. 효종 때 김자점이 조선이 성곽을 보수하는 등 북벌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청나라에 밀고하자 청나라에서 북벌계획의 전말을 조사차 사문사(査問使)를 파견한 적이 있었다. 조정이 큰 위기를 맞았다.이때 백헌은 “이 모든 일은 내가 주관한 일이오” “우리 임금은 전혀 모르는 일이며 모두 영의정인 내가 시킨 것이오” 하며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청나라는 “대국을 속인 죄”라고 하며 백헌을 극형에 처하려 한다.백헌은 효종의 구명운동 덕분에 겨우 목숨만은 부지하지만 백마산성에 구금됐다 영구히 재임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년 만에 석방된다. 우암은 “경인년의 일(백마산성에 구금된 일)이 아니면 개도 그의 똥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모욕적인 말도 서슴치 않았다. ■ “올빼미는 봉황과 성품이 달라서…” 우암에 직격탄 서계는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며 우암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는 백헌의 신도비문에서 “나라를 위해 그 집안을 잊었고 임금을 위해 그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결코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지 않았다.그리고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노성한 사람(老成人)은 업신여기지 말라 하였으니 노성한 사람의 중요함은 이와 같다… 감히 상서롭지 못한 자가 되는 것에는 역시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보복이 있을 것이니 이는 하늘의 도리다. 가히 두렵지 아니하랴” 그리고 마침내 직격탄을 날린다. “올빼미는 봉황과 성품이 달라서 이에 노하고 이에 성내네. 착하지 않는 자는 미워할 뿐 군자가 어찌 염려하리오”(西溪全書) 이는 우암을 올빼미에 견주고 백헌을 군자와 봉황에 비유한 것이다.노론은 서계가 우암을 우롱했다고 분노했다. 이로 인해 논어, 맹자 등 사서삼경에 대한 주자의 주석이 곳곳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 사변록은 결국 이단서로 규정되고 말았다. 시대 조류에 타협하지 않았던 서계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낙인이 찍혀 유배형에 처해 진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출 불가 상소를 올려 장형을 받고 진도로 귀양가는 도중 장독으로 노량진에서 죽은 아들 박태보의 충절 때문에 충신의 아버지를 유배 보낼 수 없다하여 유배만은 면한다. 이경석의 신도비는 죽은 지 84년이 지난 영조 30년(1754)에서야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받아 겨우 세워지게 된다. 삼전도비문을 지었다는 이유로 죽은 후에도 핍박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 아홉 길 산을 쌓는데 흙 한 삼태기가 모자라 서계 박세당의 정치적 행위와 사상 속에는 청나라, 도통론과 사공(事功), 명분과 실리, 절의와 화의, 책임윤리와 신념윤리, 역사인식 등의 문제들에 대한 고민과 질문들이 내장되어 있다. 서계는 ‘너’라면 어떤 선택을 할거냐고 묻는다.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절의가 중요한가 화의가 중요한가. 국가경영에 있어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차대한 정책을 결정할 때 원칙(經)이 중요한가 아니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시의적절한 우회전략(權道)이 필요한가. 명분과 힘이 충돌할 때 명분을 따를 것인가.아니면 현실적인 힘을 인정하면서 실리를 택할 것인가. 국가의 이익과 의리가 충돌할 때 국가와 백성을 위해 어떤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가. 국가적인 난제와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는데 위정자들의 책임윤리가 중요한가 아니면 개인의 신념윤리를 더 앞세워야 하는가. 서계가 궤산정에 올라 “아홉 길 산을 쌓는데 흙 한 삼태기가 모자라”(書經 여오편) 그간 쌓은 공이 모두 허사가 되는 일이 없도록 지금 여기 내 땅을 호미질로 일궈라 ! 라고 외치는 듯하다. 권행완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편집위원장(정치학박사)

[경기 새천년, 유라시아에서 길을 찾다_특별좌담회] 경기 새천년 유라시아 횡단열차 탐사를 말하다

경기도ㆍ경기문화재단 주최, 경기일보ㆍ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이 주관한 경기 새천년 유라시아대륙 열차횡단 프로젝트가 지난 3일 32일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대한민국과 경기도의 미래 비전을 찾기 위해 지난달 3일 평택항을 출발한 유라시아 열차 탐사단이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일까. 열차 탐사단이 현장에서 보고 체험한 내용을 좌담회를 통해 들어봤다.이번 좌담회는 이선호 경기일보 문화부장의 사회로 강진갑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 최종식 경기일보 기획관리실장, 김상헌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신춘호 방송대학TV 감독, 조창완 차이나리뷰 편집장, 이승영 청년기업가(SERCUS 대표), 성형모 경기문화재단 주임 등이 패널로 참여해 유라시아 프로젝트의 성과와 과제에 대해 토론했다. 사회 이선호 경기일보 문화부장 ■ 이선호 부장 : 32일간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중국부터 카자흐스탄, 유럽을 둘러보고 왔는데 소감이 어떤가. 강진갑 원장 : 이번 탐사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문명의 대 전환기 차원에서 봐야 한다. 평택에서 출발해서 롄윈강까지 배를 타고 가고, 12개국을 거쳐 철도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했다. 전체적으로 1만4천 여 ㎞를 지났다. 핵심은 실크로드를 지났다는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가 교류하던 실크로드가 18세기 말에 막혔다. 이후 실크로드가 교통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15세기 대항해 시대 배를 통해 교류가 시작됐다. 21세기 중국이 실크로드 활성화에 나섰다. 유럽과 아시아 간의 교류가 그동안 배를 통해 이뤄졌는데 다시 육로를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목적을 얼마나 달성했는지 좌담회에서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 신춘호 감독 : 기록 사진과 영상을 담당했는데, 현실에서 동선을 따라 이동해야 하는 일이 있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은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전체 일정을 기록 사진으로 남겨 유라시아 탐사 지역에 대한 기본적인 아카이브를 구성할 정도로 자료를 확보했다. 이 측면에서 의미 있었던 탐사였다. 이승영 대표 : 이번 탐사에서 경기도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조사를 하고 싶었다. 정책, 경제, 청년 분야 등 경기도가 유라시아 대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해외 정책과 어울릴 수 있는 경기도 정책, 외국 정책 중 경기도에 접목가능한 것을 찾아 개인적으로 정리해보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김상헌 교수 : 사실 이번 코스 중 7할 정도는 다녀왔던 적이 있다. 관심있게 본 것은 중국에서 카자흐스탄까지 연결되는 경로다. 특히 9월까지 호르고스부터 알마티까지 임시로 여객열차가 운행되고 있는데 국내에 소개된 적이 거의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경로는 원래 자동차로 넘어가는 코스다. 열차로 연결되면 하루 반 정도 시간을 벌 수 있다. 이번 탐사에서 중국과 카자흐스탄 국경이 바뀌는 현장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향후 이 지역이 허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최종식 실장 : 유럽에 만들어진 철로가 다른 교통 수단에 대해 기본적으로 시작 단계에 있다. 열차가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새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라 생각한다. 그런 공간을 직접 다녀온 것에 의미가 있었다. 중국 서부, 카자흐스탄, 러시아로 이어지는 새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 공간에 경기도가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을 확인한 과정이었다. 조창완 편집장 : 이번 여정을 준비하며 놀랐다. 중국 구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유럽 구간은 잘 알지 못해 도움받기도 했다. 그러나 시스템을 이용하면서 보니, 기차로 유럽을 여행하는 것에 대해 전혀 무리가 없었다. 젊은 사람들이 이 길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정도다. 이번 탐사는 사람들이 관심을 제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 이선호 부장 : 지역마다 다른 특성을 느끼고 왔을 것 같다. 경기도 정책에 반영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 철도로 횡단한 이번 프로젝트의 성과와 의의는 무엇인가. 강진갑 원장 : 한반도에 갇혀 산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프로젝트는 갇혀 있는 생각을 터버리며 유라시아대륙 전체로 시야를 넓히는 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중국이다. 경기새천년 또한 중국과 분리시킬 수 없다. 짧은 시간 넓은 세상을 봤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 전문가, 공무원 집단이 이 코스를 직접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학교 프로그램, 직장 연수 프로그램과 연결시키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신춘호 감독 : 투루판 역 광장에 모택동이 이슬람권 노인들과 악수하는 장면이 걸려 있다. 맞은편에는 시진핑이 위구르 어린이들과 사진찍은 것이 붙어 있다. 과거에는 민심을 얻기 위해 노인과 찍은 사진을, 지금은 중국이 미래 세대 이 지역까지 포용해나가겠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봤다. 이런 것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청년 층에 확대돼야 한다.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는 가운데 우리 역할을 찾아 나가야 하는 시점이다. 재계나 재단, 언론, 학자 등 각자 역할에 대해 앞으로 고민이 필요하다. 이승영 대표 : 친환경 에너지, 미래 에너지가 이슈다. 경기도에서도 친환경 자동차를 구입하면 주차장 이용을 무료로 할 수 있다든지, 세를 감면해준다든지 하는 지원책이 있다. 중국에서는 전기 오토바이가 이미 보편화됐다. 황무지를 풍력 발전하는 데 이용하는 것도 눈에 띄었다. 유럽에서도 전기차가 활성화돼 있었다. 카자흐스탄은 신재생에너지를 주제로 한 엑스포를 치르고 있다. 우리 경기도가 중국, 카자흐스탄, 유럽을 보고 적용할 부분이 많다고 느꼈다. 김상헌 교수 : 카자흐스탄은 바다가 없어 항구 확보에 노력 중이다. 중국 롄윈강에 투자한 것이 그런 차원이다. 중국 입장에서 봤을 때 한국이 들어갈 여지가 적은 건 맞다. 카자흐스탄에 있는 고려인과 연결해 카자흐스탄 수요를 타고 중국에 연결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현재 중앙아시아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철도밖에 없다. 그 경로를 확보하면 시장을 확대할 수 있어 유리하다. 경기도를 보면 롄윈강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모두 우루무치로 가고, 고속철은 호르고스를 향한다. 평택에서 연결할 수 있어 개발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신춘호 감독 : 기차로 향하며 본 풍경은, 우리가 과거에 생각한 중국 서부 지역이 아니였다.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풍력, 태양열, 전통 지하자원, 석유 등을 생각할 때 두려운 느낌마저 들었다. 중국의 일대일로 중 한반도를 거쳐 북극항로까지 가는 노선이 있다. 이것이 실현되려면 북한문제와 연계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풀리지 않으면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조창완 편집장 : 32일간 다양한 기차를 탔다. 중국에서도 가장 낮은 급부터 고속철도까지 거쳤다. 고속철도 첫 개통은 2008년 베이징에서 톈진으로 가는 구간이었다. 지난해까지 2만2천km가 연결됐으며 2035년까지 4만5천km를 완성할 계획이다.시안에서 만난 물류 담당자들은 운송시간이 확고하게 단축됐다고 말했다. 이미 물류 혁명이 이뤄진 것이라 본다. 경기도가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대일로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소외된다. 결국 중국이 서쪽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나라가 소외되지 않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이선호 부장 : 현지 사람들과 교류한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가 외국에서 어떻게 느껴지는 것 같나.신춘호 감독 : 기본적으로 한류 열풍이 저변에 확산돼 있다고 느꼈다. 카자흐스탄에서도 젊은 층이 한국 연예인 이름을 분명하게 얘기할 정도였다. 50대인 열차 차장이나 40대 중국 가이드도 한국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화하는 데 한류가 주요 소재였다.이승영 대표 : 외국 어디에서도 한국인, 한국 제품을 볼 수 있었다. 88올림픽 이후 해외에 나가는 게 자유로워졌는데 단시간 큰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직접 눈으로 본 결과, 한국 위상이 어느정도 높은 위치에 있는 것 같다. 유럽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에는 우리나라 대기업 광고판이 꼭 있었다. 그 나라 사람들이 광고를 보고 그 브랜드가 한국의 브랜드라는 것을 알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조창완 편집장 : 렌윈강에서 택시 탔을 때 조롱하는 어투로 “미국 때문에 꼼짝 못하지?”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우루무치에서는 현대자동차를 많이 봤다. 중국에서는 중국기업보다 한국기업을 가깝게 느끼는 몇 지역이 있다. 우루무치, 호르고스, 베트남과 가까운 도시 등은 상대적으로 한국에 대한 반감이 적다. 경기도가 경제무역특구가 조성된 도시를 노리면 가능성이 있다.■ 이선호 부장 : 유럽에서는 일대일로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강진갑 원장 : 중국이 주도적으로 철길을 연결하는 데 이에 대한 유럽의 반응이 궁금했다. 15~16세기 대항해시대 유럽이 식민지를 만들었지만,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아시아 경제가 발전하며 유럽으로 진출하는 변화가 일어났다.표면적으로는 유럽이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화물열차가 100번 와야 화물선 한 대 분량이라 아직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독일 함부르크 박물관에서는 일대일로를 주제로 기획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포르투갈 대사관 관계자한테서도 포르투갈이 일대일로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중국이 대외적으로 투자를 많이 해 포르투갈도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김상헌 교수 : 덧붙이자면 중국이 어느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다고 보는 것보다 그 지역에 뻗는 네트워크에 의미가 있다. 포르투갈은 EU 중 경제력이 열세인 국가다. 두 번의 IMF를 브라질 때문에 버텼다. 브라질이 독립했지만 포르투갈을 정신적인 모국이라 생각한다. 안 좋은 관계가 아니라 아직 네트워크가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런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관심 있게 봐야 한다.조창완 편집장 : 벨라루스에도 경제특구가 있다. 카스피해와 흑해 지나 그리스에도 항구와 같은 인프라를 개발했다. 산, 바다, 서구로 다 연결하고 있어 유라시아 대륙 끝인 포르투갈도 관심 가질 수밖에 없을 거다. 그리스에 투자했으니 포르투갈도 가능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다각도로 일대일로를 봐야한다.■ 이선호 부장 : 일대일로로 급변하는 정세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경기도의 역할은 무엇인가.강진갑 원장 : 핵심은 일대일로를 통해 중국과 유럽이 연결되는 것이었다. 새로운 철의 실크로드가 아시아와 유럽 관계에 끼치는 영향에 관심 있었다. 이 이야기가 3~4년 전에 나와 현장에서는 아직 잘 느껴지지 않는 단계다. 시안에서 만난 기업인들도 시장 진출에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봤다. 우리는 유라시아 지형이 바뀌는 곳에 가봤다.아시아에서 중국이 중심이 돼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이 패권국가가 됐을 때 우리에게 좋은 것만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사드 배치한다니까 중국 이해관계가 배치돼 경제적 제재를 가하고 있지 않나. 예민한 관심으로 중국의 힘이 커졌을 때 대책을 세워야 한다.최종식 실장 : 카자흐스탄과 중국 서부 지역에 중국 정부가 나서 새 공간을 만들고 있다. 경기도가 접근할 수 있다. 철도라는 선에 국한되지 않고 공간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또 공간과 열차를 얘기했지만 결국 사람 문제다. 기업과 청년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분할해서 생각해야 한다. 경기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는 상해와 광저우에서 중소기업을 위한 박람회를 하고 있다. 이것처럼 기업 초창기에 도움줄 수 있다. 카자흐스탄이나 시안에 중소기업 제품 가져가서 보여주는 식으로 후속내용을 만들 수 있다. 아울러 우리가 확인한 공간에 젊은 청년들이 가서 연구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후속 프로젝트가 필요하다.조창완 편집장 : 한중 관계를 계속 지켜봤다. 우리나라 대중국 수출이 재작년과 작년에 많이 떨어졌다. 올해 상반기는 괜찮았지만 하반기 수지는 나빠지고 있다. 자동차와 전자제품 중심으로 중국에 수출했지만 상황이 변하고 있다. 4차산업혁명에 대한 준비도 중국에 비하면 부족할 것이다. 쉽게 볼 문제 아니다. 경기도, 한국이 흐름을 인지하지 못하면 곧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우리나라 미래 먹거리를 고민해야 한다.신춘호 감독 : 독일 함부르크, 네덜란드 로테르담, 프랑스 파리를 열차로 내려왔다. 서유럽에서 느낀 것은 전기자동차가 눈에 띄게 활성화된 것이다. 우리도 4차 산업혁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성형모 주임 : 유라시아 열차 탐방단이 찾은 거점 지역 곳곳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활동을 엿볼 수 있었다. 중국 서안의 삼성전자, 호르고스 지역의 한국상품 면세점, 카자흐스탄에서 활동 중인 교수, 고려인 등 여러 사람과 뜻깊은 만남을 가졌다. 향후 유라시아에 이미 나가 있는 다방면의 인적 자원을 활용한다면 우리나라가 유라시아 횡단 기찻길을 효과적이고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이승영 대표 : 중국은 강한 중화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중국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뜻을 품었다 기지개를 켰다. 한국 뿐만 아니라 주변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 앞으로 미래를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고 느꼈다. 우리만의 특별함이 없으면 미래 세대가 살아남을 수 없다. 특별한 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한 것을 예로 들자면 ‘통일’이다.김상헌 교수 : 지역과 지역을 잇는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 지역 단위 전문가는 대단히 많다. 그러나 그 지역이 주변 국가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관심 갖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앞으로 미래 세대가 전체를 꿸 수 있는 공부를 하도록 해야 한다. 사회가 다음 세대에게 혜안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정리=손의연기자후원: 경기문화재단

[아이가 미래다] 너희들이 웃으면 대한민국도 웃는다

2020년 ‘인구절벽 시작’, 2026년 ‘초고령사회 진입’, 2031년 ‘총인구 감소’. 인구 문제와 관련해 전문가들이 진단한 대한민국의 미래다. 중앙정부가 지난 10년간 저출산 문제를 해결한다면서 쓴 돈만 100조 원이 넘는다. 그러나 출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인구동향’을 보면 지난 5월 출생아 수는 3만300명으로, 전년 동기대비 11.9%나 감소했다. 그런데도 정작 우리는 저출산 문제를 ‘남의 일’처럼 치부해버린다. ‘저출산고령화’ ‘인구절벽’ ‘지방소멸’ 등이 언론을 통해 연일 보도되고, 전문가들이 “대한민국의 위기”라며 소리치지만 어느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바로 ‘체감’이다. 대도시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로 붐빈다. 심지어 주말에는 웬만한 쇼핑몰이나 대형마트는 주차하는데만도 한 시간이 족히 걸린다. 산후조리원은 예약이 꽉 차있고, 어린이집의 대기순번은 50번대가 기본이다. 그런데 수도권을 조금만 벗어나 보자. 젊은이들은 이미 지역을 떠났고,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그친치 오래다. 남아있는 노인인구가 세상을 떠나는 20년 후쯤에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를 전문 용어로 ‘지방소멸’이라 일컫는다. 우리보다 앞서 저출산 문제를 겪어 왔던 일본은 지방소멸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리고 대한민국도 존립 위기에 처한 지방이 속속 늘어나고 있다. 실제 한국고용정보원은 30년 이내에 전국 228개 시·군·구 중 84개, 3천482개 읍·면·동 중 1천368개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 때문에 대도시보다 일선 기초자치단체에서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먼저 쏟아내기 시작했다. 존립의 기로에 놓인 그들은 생존을 위한 필사의 전략으로 ‘출산정책’을 택했다. 국내에서는 해마다 전국 지자체들과 해외 기관들이 전라남도 해남을 찾는다. 인구 7만 명의 작은 곳이지만, 4년 연속 합계출산율 1위를 기록했다. 해남은 2000년대 초 인구 10만 명이 무너져 내리면서 저출산 정책을 시작했다.전국 최초로 ‘출산정책팀’을 신설해 해남만의 출산정책을 만들어 나갔다. 그 결과 2012년부터 2015년까지 4년 연속 합계출산율 1위를 달성하는 성과를 보였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지자체들도 저출산 정책을 자문하기 위해 인구 6천 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인 오카야마현 나기초 마을 방문한다. 나기초 마을은 1990년대 일본이 지자체 합병을 진행했을 때 주민들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독자적으로 살아남았다. 나기초 마을은 인구 6천 명을 지키기 위해 2003년부터 출산에서 교육, 의료, 주택까지 양육가정의 전폭 지원했다. 이 결과 2014년 합계출산율 2.81을 기록했다. 나라도, 문화도 다른 두 곳의 성공 비결을 무엇일까. 바로 ‘지역맞춤형 정책’이었다. 존립을 위해 세워진 정책은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 시작됐다. 실제 정책이 필요한 임산부와 출산가정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그들에게 필요한 정책을 만들어 나갔다. 또 오랜시간 꾸준히 정책을 이어왔다는 점도 이들의 성공 전략 중 하나다. 해남과 일본은 모두 중앙정부에서 시작하기 이전부터 출산정책의 필요성을 깨닫고, 출산정책을 추진했다. 최진호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지금처럼 하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지역의 특색을 살린 정책과 효율적인 부분에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며 “아울러 지금 자라나는 세대부터 가족이 소중하다는 가치관을 심어주고, 20~30년 이후의 대한민국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출산,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다음 세대들에게, 지금 자라고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정책이 시작돼야 한다. 우리에게 아직 희망은 있다. 송시연기자

[경기일보가 맺어준 ‘1촌1사’] 포천 교동장독대마을-라인테크시스템

기계솔루션을 제공하는 라인테크시스템과 포천 교동장독대마을이 인연을 맺은 건 1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농어촌공사와 소프트웨어 관련 협력을 체결한 라인테크시스템은 1촌1사 운동에 대한 얘길 듣고, 솔깃했다. 당시 함께 1촌1사에 참여한 기업들은 모두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대기업이었다. 대기업만큼 막강한 인력과 자금지원은 자신 없었다.하지만 마을이 원하는 지원과 꾸준하고 지속적인 교류, 진정성만은 자신 있었다. 이를 포천 교동장독대마을이 알아본 걸까. 자매결연을 할 회사로 라인테크시스템을 선택했다. 가구 수도 32명, 회사 직원도 32명. 인연인 듯했다.마을과 회사는 일방적인 지원이 아닌 서로 강점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하기로 했다. 대기업들처럼 거액의 자금을 맡기거나 거창한 활동은 아니지만, 회사 사업의 특성을 살리고 마을 주민들에게 필요한 부분을 맞춤형으로 지원하는 방식이다.처음 라인테크시스템이 교동장독대마을을 찾았을 땐, 지금처럼 마을이 평화롭지 않았다. 한탄강, 지장산 등 수려한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뤘던 당시 교동마을은 한탄강 댐 건설로 이주 문제 등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그야말로 많은 관심과 새로운 발전방향이 필요한 시기였다.이에 라인테크시스템은 회사 내에 ‘교동사랑회 사회공헌위원회’라는 1사1촌 전담 조직을 아예 만들었다. 마을의 발전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교류를 하기 위해서다.이후 교동장독대마을의 모든 대소사에는 라인테크시스템이 함께 했다. 우선 IT 기업의 특성을 살려 정보화 혜택의 사각지대에 있는 농촌마을에 IT 기술 혜택을 제공하기로 했다. 마을의 집집마다 고장 난 컴퓨터를 수리ㆍ점검하고, 마을 홈페이지도 개설했다.자매결연 체결 후 매월 열리는 마을 발전 회의에는 늘 심재관 라인테크시스템 대표가 직접 참석해왔다. 2010년 마을소득 창출 프로젝트에는 심 대표가 함께 참여해 마을 도롱이 집 복원 계획을 함께 구상하고, 마을을 위해 홍보 계획 등을 수립했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마을회의에 심 대표 등 회사 임직원이 참석해 마을의 현안을 함께 풀어나가고 있다. 모내기와 수확 시기엔 빠짐없이 마을을 방문해 일손을 도왔고, 연말엔 회사로 주민들을 초청해 다과회와 함께 문화체험 행사를 연다. 또 사원 워크숍을 마을 체험관에서 열고 우수사원에게 주는 선물로 마을에서 난 쌀, 고추, 버섯 등 농산물을 사들여 농가 소득에도 도움이 되도록 했다.지난 7월 초에도 라인테크시스템에 입사한 신입사원 등 직원 17명이 마을체험관에서 1박2일로 워크숍에 참여했고, 이번에 회사에서 개발한 툴로 교동장독대마을 홈페이지를 리뉴얼 할 수 있도록 마을에 가르쳐 주고 있다.마을주민들도 회사에 대한 신뢰감과 끈끈한 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강석진 교동장독대마을 사무장은 “일부러 회사의 각종 회의를 마을에서 하며 전문적인 시스템을 마을에서도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지금까지 마을 회의에 참석해 마을의 발전에 회사가 함께 하고 있다”며 “소박하게 시작한 결연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지지로 바뀌어 서로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그렇다고 교동장독대마을이 지원만 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라인테크시스템은 마을을 보면서 많은 걸 배우고 느끼고 있다고 한다.심재관 대표는 “이주마을에서 전국 최초의 팜스테이마을, 많은 도시민에게 사랑받는 마을로 거듭났는데 여기에는 이수인 마을 대표를 비롯한 주민들의 변화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면서 “마을주민에게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배우고 해나가려는 자세를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심 대표는 이제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큰 행사가 있을 때도 마을로 함께 가 소개할 만큼, 그야말로 뼛속까지 명예주민이 됐다. 그는 “무엇보다 마을이 대한민국 최고의 농촌마을이 되도록 많은 사람이 마을을 찾고, 소비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자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