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처절한 전투… 그날의 ‘그린베레’ 부활

파주 적성면 설마리

1951년 4월22일, 파주의 봄은 처참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글로스터대대 소속 영국군 600여명은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에서 임진강을 굽어보며 중국군의 진격로를 막고 섰다.

글로스터대대가 사흘 밤낮 총격전을 벌이며 중국군의 공세를 차단하는 동안 한국군과 UN군은 방어선을 안전하게 구축하고 서울을 사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가는 가혹했다.

10배에 달하는 적군과의 혈전 끝에 탈출에 성공한 군인은 67명에 불과했고 59명이 전사, 526명이 포로가 됐다. 포로 가운데 180명은 부상병이었고 3년간의 포로수용 기간 중 34명이 또다시 목숨을 잃었다.

참혹한 전쟁을 치른 영국군 상당수는 십 대 후반의 소년들이었다. 그로부터 63년 후 또다시 찾아온 봄, 그들이 뿌린 피와 함께 희생과 헌신이 배어든 설마리에 추모공원이 조성됐다. 영국군 전적비가 있던 곳이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전쟁의 뒤안길에 스러진 영국군의 넋을 기리고 얼을 되새기며, 평온 속에 따뜻한 볕이 드는 ‘설마리의 봄’을 맞기 위함이다.

준공식이 코앞으로 다가온 4월 넷째 주 파주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을 찾았다.

따뜻한 봄볕 사이로 사이좋게 자리 잡은 나무와 꽃이 정갈하게 느껴졌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거대한 청록색 베레모였다.

높이가 2m, 길이가 4m에 달하는 이 청동 조형물은 글로스터대대가 60여년 전 쓰던 베레모를 그대로 따왔다. 추모공원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인상적이고 독특한 참전비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베레모 뒤에는 대리석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참전군인 전원의 이름을 새긴 암갈색 대리석 위로 까만 대리석에 전쟁 당시의 모습이 사진인 양 새겨져 있는 ‘추모의 벽’은 2.5m 높이에 길이는 35m에 달했다.

글로스터대대가 영국의 글로스터시(市)에서 출전을 위해 출항하는 장면부터 전쟁 후 부상을 입은 채 조국으로 되돌아가는 모습까지 공들여 새긴 대리석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흑백사진 같았다.

적군에 포탄과 총을 겨누며 밤을 지새우고, 그리운 고향에 편지를 쓰고, 포로수용소에서 십자가를 조각하는 장면이 하나씩 이어지며 짧은 전쟁영화를 보는 듯한 감상에 젖었다.

영국 대사관에서 하나하나 검증받은 글로스터대대의 참전 당시 사진을 손으로 직접 조각해 넣은 추모의 벽은 군인들의 회한과 아픔을 깊숙이 전달했다.

대리석 사진 10장씩을 옆으로 끼고 한가운데 들어선 회벽에는 ‘Their Name Liveth For Evermore -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추모의 벽 옆편 뜰 위로는 영국군 일곱 명의 황금빛 동상이 전진하고 있었다. 영국 대사관에서 고증을 받아 수류탄과 총, 복장을 원형 그대로 따왔다.

영국군의 얼을 살리기 위한 세심한 손길은 공원 곳곳에서 이어졌다. 공원 뒤편을 끼고 흐르는 설마천을 가로질러 구불구불한 다리를 건너니 기존에 있던 영국군 전적비 옆으로 2m가 훌쩍 넘는 십자가 조각이 눈에 띄었다.

포로로 잡힌 칸 중령이 북한포로수용소에서 예배에 사용하기 위해 조각한 십자가를 확대한 조형물이다. 베레모 조형물을 지지하는 대리석 바닥은 영국기인 유니언기 문양을 따왔고 그 아래 깔린 바닥 무늬는 태극이다. 한국이 영국을 껴안아 기억하고 보듬는다는 의미에서다.

공원의 공사를 맡은 구용우 북부그린조경 이사는 “베레모 조형물 하나에만 꼬박 5개월이 걸렸고 벽화의 풍화를 최대한 막기 위해 18명이 매달려 기계가 아닌 손으로 새겼다”며 “영국군의 희생을 최대한 기리는 방향으로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파주시와 회의를 몇번이나 했는 지 모른다”고 혀를 내둘렀다.

공원은 영국군 전적비가 자리한 설마리 일대를 안보교육 현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됐다.

7천831㎡ 부지에 마련, 국비와 도비, 시비가 각각 6억원, 3억5천만원, 3억5천만원씩 총 13억원 규모로 투입돼 지난해 3월 사업에 착수하고 23일 준공을 맞았다.

전적비는 1957년 전사한 영국군의 넋을 기리고자 건립, 지난 2008년 등록문화재 407호로 지정됐지만 그간 비석만 자리하면서 기념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찾는 이가 드물었다.

그러나 산과 천을 끼고 추모공원이 조성됨에 따라 행사 때는 물론 평시에도 등산 등으로 이 일대를 찾는 방문객들이 부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추모공원 조성에 앞장선 파주시와 6ㆍ25전쟁 기념사업위원회는 파주시와 글로스터시의 우의가 더욱 돈독해 지는 것은 물론 안보교육현장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파주시 관계자는 “이번 공원 조성을 계기로 역사 속에서 잊혀 가는 한국전의 교훈과 영국군 참전용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되새기고자 한다”고 말했다.

한편, 영국군 설마리전투 추모공원 준공식에는 영연방 한국전 참전용사 64명과 크리스 샤테텐 글로스터시장이 방문, 파주시민들과 함께 설마리 전투를 회고하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희생한 숭고한 영혼을 되새긴다.

박상돈성보경기자 boccum@kyeonggi.com

사진=전형민기자 hmjeo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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