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도 창조다] 노년의 무한도전 ‘성남 실버영상제작단’

보청기 ‘카메라맨’ 돋보기 ‘앵커’의 생생뉴스… “인생 2막 큐~”

노년기에 찾아온 고독과 외로움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노인세대가 급증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황금기를 맞이한 노인도 있다. 스마트폰 사용은 기본. 영상촬영과 편집 등 고급 미디어 기술을 섭렵한, 젊은이보다 더 스마트한 성남미디어센터의 ‘실버영상제작단’이 주인공이다.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무게에 움츠리기보다 새로운 지식과 인간관계를 통해 스스로 몸과 마음을 젊게 만든 실버영상제작단을 만났다. 그들은 행복한 노년을, 나아가 아름다운 노인문화를 창조하고 있었다.

지난 7월26일 오후 5시 찾은 성남미디어센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일과를 마친 후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중절모에 검정 구두까지 한껏 멋을 낸 노신사 이창민씨(85)의 한쪽 어깨에는 묵직한 가방이 들려 있다. 가방 속 살짝 보이는 물건은 다름 아닌 촬영카메라. 그의 강렬한 기운은 여느 열정적인 방송국 PD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듦은 어찌할 수 없다. 귀에는 보청기가 꽂혀 있다. 그럼에도 잘 들리지 않아 연방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카메라 이야기만 나오면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이 촬영카메라가 얼마냐고? 모델명 알려줄 테니 인터넷으로 찾아봐 얼마나 비싼 것인지…. 하하”

카메라를 만진 지 어느새 10년. 그에게 카메라는 신체의 일부이자, 행복매개체란다.

이씨처럼 카메라와 사랑에 빠진 노인들이 센터 2층의 강의실에서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다. 책상 위에는 필통과 노트, 파일 등 한창 공부하는 학생들의 책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옆에 개인 카메라 가방이 나란히 걸려 있다는 것이 차이점일 뿐.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자니, 생전 처음 듣는 전문용어들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주제는 최근 촬영한 작품이야기인데, 무엇이 그리 좋은지 웃음소리도 끊이질 않는다.

이들은 성남문화재단이 설립ㆍ운영하는 성남미디어센터의 시민제작단이다. 시민제작단은 문화재단이 시민의 영상 커뮤니티를 육성하는 한편, 지역의 다양한 이야기를 시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소통하기 위해 기획한 모임이다. 현재 시민영상제작단, 실버영상제작단, 대학생기자단, 라디오제작단 등 총 4개 팀이 있다.

그 중 실버영상제작단은 지난 3월 영상제작활동이 가능한 만 65세 이상의 성남시민을 대상으로 공개모집했다. 선발된 제작단원 10명은 매달 총 2개 주제의 ‘시니어가 전하는 행복뉴스’를 완성한다. 현장과 스튜디오 촬영은 물론 편집과 내레이션 녹음까지 전 과정을 직접 해내고 있다.

“만든 이 자막이 올라갈 때 말이야. 배경을 단색보다는 영상 위에 덧씌우는 게 낫겠어”, “아니오, 그러면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안 될 것 같아요.”

제작 영상 시사회마다 벌어지는 열띤 토론은 상영 전 통과의례다. 3분 남짓한 영상을 본 후 밀려드는 아쉬움과 소중함도 매번 느낀다.

가장 젊다는 이유로 남자 뉴스 앵커 자리를 맡은 김윤종씨(65)는 “첫 촬영 때 긴장해서 ‘컷’ 소리와 함께 얼굴이 경직됐어요. 지금도 긴장하지만 다들 재미있게 촬영을 진행해 항상 즐기면서 촬영에 임하고 있습니다. 다 함께 만든 영상, 하나같이 모두 소중해요”라며 미소 지었다.

장애물도 있다. 쏟아지는 뜨거운 햇볕과 장맛비는 평균 연령 70세 노인에게 버거운 상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실버영상제작단을 힘겹게 만드는 것은 촬영 전 생각과 다른 현장상황에 시민들의 인터뷰 거부다.

신정수씨(71)는 “촬영현장에서 시민이나 관계자가 인터뷰를 거부하면 가장 힘들다”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결해낸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제작단의 최고령자인 이관배씨(92)는 외국인 관광객 인터뷰에 도전장을 내고 멋지게 성공했다. 왕년의 영어회화 실력을 뽐내며 외국인 인터뷰를 마친 후, 한글자막까지 완벽하게 제작했다.

이들의 자랑거리는 이 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서울노인영화제에서 아련한 옛 첫사랑의 기억을 담은 단편영화 ‘기분 좋은 날’로 본선까지 진출했다. 비록 수상의 기쁨을 맛보진 못했지만, 첫 본선 진출이라는 값진 경험이었다고.

정계옥씨(68ㆍ여)는 “은퇴 후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라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집중하면 그만큼 더 좋은 질의 인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외로움과 무기력 등 노년에 마주한 ‘적’에 맞서 자신과 주변을 보듬으며 전진하는 그들은 힐링의 참뜻을 보여준다.

실버영상제작단은 이 순간도 촬영하고, 편집하고, 기획회의를 한다. 그렇게 그들은 죽음에 한발 다가서는 시간을 찬란한 삶으로 재창조하고 있다. 그들의 무한도전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야 하는 이유다.

류설아기자ㆍ박준상기자 parkjs@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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