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인장을 잘 새긴 유금, ‘아스트로라브’를 만들다

▲ 아스트로라보(실학박물관제공)
▲ 아스트로라보(실학박물관제공)

거문고를 잘 탄 탄소 유금

유금(柳琴, 1741~1788)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중 한 사람인 유득공의 숙부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서호수 등과 교우한 북학파 실학자 중의 한명이다. 평생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고 학문과 예술을 즐기며 북학파 벗들과 교유한 인물이다. 

유금은 거문고를 좋아하여 자를 탄소(彈素)라 하고 원래 이름이 유련(柳璉)이었으나 이 이름 대신 거문고 금(琴)자를 써서 유금으로 개명하였다. ‘탄소’는 ‘탄소금(彈素琴)’의 준말로 소금을 연주한다는 의미이다. 탄소라는 자와 유금이라는 개명에서 보듯이 거문고를 매우 사랑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유금은 음악뿐만 아니라, 인장을 잘 새기는 재주가 있었고 수학과 천문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의 서재를 기하학의 기하를 따서 ‘기하실(幾何室)’이라고까지 불렀다.

아정 이덕무는 친한 벗 유금의 서재 기하실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고라니 눈같이 뚫어진 울타리 그림자가 비추는데 / 麂眼疏籬影斜수펄들은 미친듯이 나물꽃을 희롱하네 / 雄蜂狂嬲菁花

유금은 북경 연행을 모두 3번이나 갔다 왔다. 물론 서자출신인 자신의 신분 탓에 공식적으로 간 것은 아니었지만,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연행을 다녀 온 뒤 유금으로 이름을 개명했고, 서양선교사들의 서적도 탐독했다.

유금은 1776년에 사은부사였던 서호수를 따라 연경에 갔다. 이때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등 벗들의 시를 각각 100수씩 총 400수를 뽑아 만든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편찬하여 이조원과 반정균 등 청나라 문인들에게 소개하였다. 유금은 귀국길에 이들의 서문과 비평을 받아 왔다. 『한객건연집』을 통해 유득공과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등의 이름이 청나라 문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조(朝)·청(淸) 문인들의 교유가 『한객건연집』을 통해 더욱 활발해졌고, 조선 후기 문화와 학술사에서 유금과 북학파 문인들의 위상이 높아졌다.

천문학과 수학을 좋아한 실학자

유금은 천문학과 수학을 좋아했다. 자신의 서재를 “기하실”이라 붙였는데 기하는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소개한 서양의 수학인 『기하원본』에서 따온 것이다. 유교경전을 읽고 해독하는 것이 선비들의 최고의 도였던 시대에 천문학이나 수학은 말단 학문이었다. 공부해 봐야 과거시험에도 나오지 않았고 선비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학문으로 여겨졌다. 

천문학과 수학에 몰두한 유금이었지만, 그가 남긴 저술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인장 새기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책에 인장 찍기를 즐겨한 그였지만, 그의 책은 거의 다 사라지고 없다. 

연암 박지원은 유금이 인장을 새길 때면 돌을 쥐고 무릎에 받치고서 어깨를 비스듬히 하고 턱을 숙인 채, 눈을 깜빡이며 입으로 후후 불면서, 먹 자국에 따라 누에가 뽕잎 갉아먹듯 파 들어가는데 마치 실처럼 가늘면서도 획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친한 벗 이덕무가 하루는 그 모습을 보고 “자네는 그 굳은 돌멩이를 힘들게 새겨서 무엇에 쓰려고 하는건가?”물었다. 

“천하의 모든 물건에는 주인이 있고, 주인이 있으면 이를 증명할 신표가 있어야 하네. 그러기에 열 집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고을이나 백부장(百夫長)까지도 부절(符節)이나 인신(印信)이 있었던 것일세. 주인이 없으면 흩어져 버리고 신표가 없으면 어지러워지거든.”

유금의 아스트로라브

오늘날 아쉽게도 그가 새긴 인장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의 손길이 천문기구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나타났다. 유금이 만든 아스트로라브가 세상에 공개된 것은 2002년이다. 2002년 일본 시가현 오오미하치만시의 토기야(磨谷)가 일본 동아천문학회 이사장인 야부 야스오에게 검토를 의뢰하면서부터이다. 토기야의 조부가 1930년경에 대구에서 구입하여 패전한 후 일본으로 가져온 것이다.

처음 이 아스트로라브가 일본에서 공개될 때는 누가 만든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앞면 위쪽 고리 부분에 ‘유씨금(柳氏琴’)이라는 인장이 고문헌 연구자인 박철상에 의해 해독되면서 이 귀중한 작품의 제작자가 유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아울러 아스트롤라베에 청동 고리에 새겨진 “북극출지 38도(한양의 위도) 1787년에 약암 윤선생(이름 미상)을 위해 만들었다(北極出地三十八度 乾隆丁未爲約菴尹先生製)”라는 기록을 통해 제작연도도 알게 되었다. 이후 동아시아 전통 천문학의 권위자인 미야지마 카즈히코 교수에 의해 18세기 동아시아인이 만든 것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학계에 보고되었다.

아스트로라브는 14세기 기계시계가 고안되기 전까지 고대와 중세 여행자들에게 가야 할 방향과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가장 정교하고 정확한 천문시계였다. 명나라 말기에 클라비우스(Christoph Clavius, 1538~1612)의 아스트로라브 해설서인 “아스트롤라븀(Astrolabium)”(1593)을 명말의 학자인 이지조(1569~1630)와 마테오 리치가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1607)로 제목을 붙여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아스트로라브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혼개통헌(渾蓋通憲)’이라는 이름으로 청과 조선에 전래되었고, 일본은 16세기에 서유럽을 통해 직접 전래되었다.

유금의 아스트로라브는 한중일 통틀어 자국에서 제작된 것으로는 현존하는 유일한 전형적 형태의 아스트로라브이다. 동아시아 특히 조선시대 서양근대 과학의 전래와 수용을 고찰하는 데 있어 귀중한 유물이 아닐 수 없다.

글_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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