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문화원향토문화연구소장
인생을 논의할 때 누군가가 말했다. 늦었다 싶을 때가 늦지 않았다고. 도전하는 노력의 자신감이 희망일 때 힘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삶에 찌들어 여유도 없이 자신의 보다 나은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우리 안에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잘못과 그늘이 있었는지 미처 살펴보지 못했다. 젖은 베갯머리 찬바람 휘어드는 어느 길목 모퉁이 주린 배 움켜쥐며 낮은 고개도 힘겹게 넘어가는 무거운 구름 같은 우리의 인생살이.
예전부터 우리는 단 한번도 여봐란 듯이 잘살아 본 적도, 마음 편히 살아 본 적도 없는 나라였다. 6·25전쟁은 힘겹고 메마른 배고픔의 보릿고개는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진지는 잡수셨습니까’ 애처로운 인사를 주고 받으며 어렵게 살아온 우리였다. 잘 살아보세란 새벽잠을 깨운 새마을운동이 가난을 떨쳐버리는 능력만이 내일의 희망이었다. 1950년 전쟁이 휩쓸고 간 잿더미 위 이 나라 이 겨레의 가난의 상징이 보릿고개였다. 우리나라 봄철 기근을 가리키는 춘궁기는 지난 가을에 추수한 쌀이 바닥나는 5월과 6월에는 식량이 떨어져 굶주리게 되는 때 보리타작 때까지 보릿고개라 불렀다.
요즘 세대는 보릿고개란 말 자체도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그리 머지않은 세월의 저편에 묵은 곡식 다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고 농촌의 사정이 가장 어려울 때를 비유하는 말이다. 가난의 눈물로 얼룩진 구황(救荒)작물은 곡식 대용으로 들녘에서 마구 자란 뚱딴지 돼지감자, 피, 칡뿌리, 풀뿌리를 캐서 죽을 쒀 먹거나 소나무 껍질 속 연한 곳을 먹었다. 게다가 백토(白土)라 하는 입자가 매우 고운 흙을 물에 개어 쪄서 먹는데 소화할 수 없는 성분이라 배앓이를 해야 했다. 배고픔 속에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의 세계화와 첨단기술로 이들이 경제 부흥을 일으켰다. 꽃이 지는 아픔의 자리에 열매가 열린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눈을 뜨기까지 자원도 없는 우리는 기술집약 산업으로 우리 삶의 질 향상과 배고픔에서 배부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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