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2.남양주 모란미술관

 

푸른 소나무 우듬지와 파란 하늘빛이 조화로운 정원 가장자리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조각품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국광 작가의 ‘적(積)-만남의 장’이 나이테를 드러낸 나무처럼 자신의 속을 보여주며 말을 걸어온다. 미술관 카페 ‘발자크’에서 차를 마시며 정원으로 눈길을 돌린다. 넓은 정원의 중앙에 꿈틀거리며 춤추는 듯한 최만린 작가의 ‘태(胎)’를 배치한 의도를 알 것 같다. 아기를 잉태한 엄마의 배 속처럼 아늑하다. 남양주시 화도읍에 자리를 잡은 모란미술관(관장 이연수)에도 가을빛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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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하기 좋은 잔디밭이 펼쳐진 대지 2만8천㎡(8천500여평)의 야외조각 전시장에는 다양한 조각이 전시되고 있다. 윤원규기자

 

■ 시와 노래가 흐르는 미술관

 

넓은 잔디밭 너머로 두 개의 감각적인 건축물이 있다. 밝은 노란색의 사각형 건물은 수장고이고, 비스듬하게 우뚝 솟은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은 ‘노래하는 탑’이다. 잠시 벤치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미술관에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건축가 이영범이 설계한 ‘노래하는 탑’은 바람이 불면 맑은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던 곳이다. 노래하는 탑 안에 특별한 조각품 두 점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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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조각 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 중 한 명인 오귀스트 로댕의 ‘발자크’가 전시되고 있다. 윤원규기자

 

현대 조각의 길을 연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이 1898년 완성한 석고상 ‘발자크’와 한국의 대표적 조각가 김세중의 ‘피에타’이다. ‘발자크’에 대한 로댕의 발언이 놀랍다. “이 작품은, 나의 필생의 역작이며 미학적 동력이다. 이것을 창조한 날부터 나는 새로운 인간이 됐다.” 작품과 함께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더한 바람이 작가에게 또 있을까. 김세중의 ‘피에타’와 함께 로댕의 ‘발자크’는 모란미술관의 애장품이다. ‘피에타’를 조각한 작가 김세중(1928~1986)은 지난 10일 소천한 한국 시단의 거목 김남조 시인의 남편이다. ‘피에타’는 물론 김남조 시인과 이연수 관장의 특별한 인연도 모란미술관의 소중한 자산이다.

 

시와 조각으로 삶을 노래한 김세중 작가와 김남조 시인, 그들은 작품과 예술혼으로 모란미술관에 살아 있다. 모란미술관 곁에 모란공원이 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이처럼 우리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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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극사실회화를 선보인 이석주 작가의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장 전경. 윤원규기자

 

■ 달리는 말과 시계, 낡은 책은 무엇을 보여줄까

 

현재 진행 중인 2023 모란미술관 특별기획전의 초대 작가는 ‘이석주’다. 한국 구상화의 원로 작가인 이석주는 추상미술이 한국 화단을 주도하던 1970년대 극사실회화를 선보이며 구상회화의 새로운 흐름을 끌어낸다. 극사실적 표현을 통해 현실에서 마주하는 개인의 정서나 느낌을 표현했던 작가의 대표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다.

 

이석주 작가의 안내에 따라 초기 작품을 전시한 1층부터 2층으로 이동하며 작품을 살펴본다. 1970년대 군사독재와 불안정한 청년기의 고민이 느껴지는 ‘벽’과 ‘일상’의 연작은 1970년부터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1977년 작 ‘벽’은 마치 붉은 벽돌이 튀어나올 듯하다. 벽은 단절을 상징하지만,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러니 부정하거나 버릴 수 없다.

 

인간이 살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들이다. 1987년 작 ‘일상’은 시계와 구두를 통해 반복되는 현대인의 삶을 보여준다. 시계 판에 새겨진 숫자가 ‘111’, ‘00’, ‘99’처럼 제멋대로다.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것은 여전하지만 인간은 결국 늙어 죽는다. ‘일상’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늘씬한 말이 사랑스럽다. 자세히 보니 그 아래는 시계가 놓여 있고 지평선 너머 연기를 뿜으며 열차가 달리고 있다. 열차 앞부분은 선명하지만, 뒷부분은 흐릿하다. 철판을 잘라 붙여 만든 ‘창’은 1999년 작인데, 매우 실험적이다. 바늘이 없는 시계가 걸려 있고, 창엔 꽃이 담긴 화병이 있어 주제는 비슷하다.

 

스승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가 창에 뚫린 예수의 가슴에 손가락을 넣는 장면을 담은 ‘사유적 공간’은 259×388의 대형이다. 두 사람 아래는 역시 대형 시계 판이 놓여 있다. 우리의 눈에 익숙한 명화들이 이석주 작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점이 흥미롭다. 작가의 그림에는 카라바조, 렘브란트를 비롯해 20세기 화가 에드워드 호퍼 같은 거장들의 작품이 등장한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과 관객에게 생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말은 늘씬하고 강인하며 시곗바늘은 길다. 작가는 말과 시계를 통해 빠르게 지나가는 인생의 덧없음을 말하려는 것일까. 그의 작품에 공통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바로 눈부시게 밝은 빛이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상이지만, 매 순간 감사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최선의 삶이겠다.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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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인생 등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임병선 작가의 ‘사람들-오늘’. 윤원규기자

 

■ 어머니 품처럼 따스하고 편안한 미술관

 

모란미술관 야외 공원은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으로 풍성하다. 잔디밭과 나무 아래서 멋진 조각 작품들과 만난다. 3만3천㎡(1만평)에 달하는 넓은 모란미술관의 산책로를 따라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즐겁다. 뒷짐을 진 할아버지 뒤로 염소들이 줄지어 따르고 있다. 여유와 인정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벌거벗은 여덟 명의 사내들이 커다란 통나무를 어깨에 메고 힘겹게 서 있다. 무게를 감당하는 사내들의 허벅지에 힘줄이 뚜렷하다. 한 사내는 탈진한 듯 곧 쓰러질 것 같은데 뒤에 있는 사내가 몸을 받쳐줘 겨우 서 있다. 통나무에 새겨진 사람들의 얼굴과 마주하고 흠칫 물러선다. 우리에게 익숙한 얼굴들이기 때문이다. 임병선 작가의 ‘사람들-오늘’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곰곰이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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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시 화도읍에 위치한 모란미술관은 1990년 개관 후 다양한 현대 미술품을 수집, 전시하고 있다. 윤원규기자

 

흥미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왜 캔버스가 나무에 걸려 있을까? “지난해 초대전 ‘자연하다’를 열었던 김아타 작가가 설치한 것입니다. 바닷가에 혹은 모래밭에 숲속에 세웠던 캔버스를 이번에는 모란미술관 정원에 세운 것이지요. 김 작가님은 ‘자연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신정원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캔버스를 다시 살펴본다.

 

한 해 동안 비바람을 맞으며 자연이 그려낸 그림이 신기하다. 마크 브뤼스의 1992년 작 ‘우리 집’은 모두의 바람처럼 안정되고 튼튼하다. 김영중의 ‘사랑’은 그윽하고 웅숭깊다. 산책로를 따라 만나는 작품과 대화하다 보면 머릿속이 가을 하늘처럼 투명해진다. 모란공원 곁에 조각미술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운 사람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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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하기 좋은 잔디밭이 펼쳐진 대지 2만8천㎡(8천500여평)의 야외조각 전시장에는 다양한 조각이 전시되고 있다. 윤원규기자

 

■ 만남과 인연을 소중히 하며 달려온 33년

 

“1990년 4월 개관했으니 올해 33주년이 됐습니다. 30주년이 되던 2020년 펴낸 ‘모란미술관 30주년 1990-2020’에 그간의 실험과 성과와 성장의 과정이 정리돼 있습니다.” 이연수 관장은 ‘모든 것에 감사한다’라는 말로 33년의 여정을 들려준다. “30년의 하루는 축복으로 감사한 날들이었지요.” 개관전 주제를 ‘21세기를 향한 조각의 새 표현 전’으로 잡은 것에서 짐작되듯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고 새로운 형식을 선보인다. 출발부터 조각의 현실을 냉철히 진단하며 방향성을 제시한다.

 

1992년 ‘국제조각심포지엄’을 열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을 기르고 지원하는 일에 앞장섰다. ‘모란미술대상’과 ‘모란조각대상’으로 역량 있는 조각가를 발굴하고 지원해왔다. 건축, 설치, 조각을 아우르는 ‘모란 폴리 2015 국제공모전'은 한국을 넘어 세계를 아우른 국제대회였다. 모란미술관의 저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모란미술관에서 만난 사람은 많지만 고(故) 이경성 관장님과의 인연은 특별합니다. 오랫동안 미술관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셨고 미술관의 길을 이끌어 주신 분입니다.” 평론가 이경성 선생(1919~2009)의 뜻대로 모란공원에 묘소를 마련한다.

 

멀지 않은 곳에 평론가 김윤수 선생의 묘소도 있다. 모란공원에 가면 무덤 사이에서 눈에 익은 조각품을 발견할 수 있다. 모란공원은 모란미술관과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미술관을 거닐며 조각 작품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홀가분해진다. 자연의 품에 안긴 모란미술관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아늑하고 따스한 위로와 휴식의 공간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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