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입은 하나요, 귀는 둘이다. 이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로 더하라는 의미다. 곧 듣기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남의 말을 귀 기울여 주의 깊게 듣는 것을 ‘경청(傾聽)’이라고 한다. 경청의 한자어는 ‘기울 경(傾)’과 ‘들을 청(聽)’으로 이루어졌다. 즉, 잘 기울여서 열심히 들으라는 뜻이다. 진정한 경청은 상대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은 물론 그 내면에 깔려 있는 동기나 정서에 귀를 기울여 듣고, 더 나아가 이해된 바를 상대방에게 피드백까지 주는 것을 말한다.
만년에 공자(孔子)가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서 회고한 ‘이순(耳順)’이란 타인의 말이 귀에 거슬리지를 않는 경지이며, 어떤 말을 들어도 이해를 하는 경지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든 걸 관용하는 경지다. ‘이순이 곧 경청’이다. 공자도 60세가 돼서야 비로소 “이순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정도로 어려운 것이 경청이다.
‘이청득심(以聽得心)’이라는 격언이 있다. 역시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사자성어로 “잘 듣는 것으로 마음을 얻는다”는 뜻이다. 옛날 노(魯)나라 왕이 바닷새를 궁궐로 데려와 술과 육해진미를 권하고, 풍악과 무희 등으로 융숭한 대접을 했지만, 바닷새는 어리둥절해 슬퍼하며 아무것도 먹지 않아 사흘 만에 죽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
노나라 왕은 바닷새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이 즐기는 술과 음식 그리고 음악이 바닷새에게도 좋을 것이라 착각하고 밀어붙인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상대방 입장을 고려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오늘의 우리도 독단적 고정관념과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또 다른 바닷새, 상대방을 당황케 하고 죽이고 있지는 않는지. 진정한 소통은 단순한 의사전달을 넘어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상호작용을 통해 이뤄진다. 이 진정한 소통은 바로 ‘경청’에서 출발한다.
바닷가 소라는 사람의 귀를 닮았다. 소라에 귀를 대고 기울여 보라, 바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내 앞의 사람의 말에 정성껏 귀를 기울여 보라, 그 사람의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청득심,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지혜다. 판단하려는 나를 비워 내고 나의 내면에 또 상대의 말과 마음에 귀 기울이면, 새로운 나와 너를 발견할 수 있다. ‘내 안의 너, 네 안의 나’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면, 진심과 진실의 목소리가 들린다.
경청,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를 살리는 창조적 공존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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