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 소녀를 백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당신의 딸이, 당신의 부인이, 당신의 어머니가 이런 일을 당한다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 주십시오.” 존 그리셤 원작의 영화 ‘타임 투 킬(A Time To Kill)’ 속 대사다.
미국 남부 미시시피의 한 소도시, 술과 마약에 찌든 백인 남성 두 명이 식료품을 사들고 가던 한 흑인 소녀를 무참히 성폭행해 강에 던져버린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곧바로 범인들이 체포되지만, 백인 우월주의가 극심한 미시시피에서 이 극악무도한 인간들에게 중형이 내려지기는커녕 당장 석방될 상황에 놓이게 된다. 조금의 반성의 기미도 없이 형식적인 재판에 들어서는 순간, 피해자의 아버지가 법정에서 총을 쏴 범인들을 현장에서 즉사시킨다. 영화는 현장에서 체포된 아버지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제이크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사법제도가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할 때, 우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영화는 진지하게 되묻고 있는 것이다.
최근 개정 공탁법이 시행되면서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몰라도, 형사공탁금을 걸 수 있도록 개선(?)됐다. 피해자의 성명·주소·주민등록번호 등 인적사항을 특정해야 가능했던 기존 공탁 방식으로 인한 부작용을 막겠다는 것이다. 형사사건의 경우, 피고인이 유리한 형량을 받기 위해서는 피해자와 형사합의를 하거나 적어도 피해금원을 공탁해야 하지만, 피해자의 동의가 없는 이상 인적사항을 확인하기 어려웠기에 일부 가해자들이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알아내고자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거나 아예 합의를 종용하며 2차 가해 행각을 벌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에 피해자의 개인정보 보호와 피해 회복을 위하는 동시에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모르는 경우에도 공탁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자 형사공탁제도가 개정된 것이다.
하지만 개정 취지와는 별개로 피해자의 동의 없는 공탁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가해자의 형량 줄이기를 위한 방편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비판 역시 유효하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다며 엄벌을 탄원할 경우 내지 가해자에게 진지한 반성이 없는 경우에 있어서도, 단지 형사공탁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가해자를 선처하는 것이 과연 정의에 부합할지는 의문이다.
용서는 국회도 법원도 아닌 오직 ‘피해자’만이 할 수 있다. 국회의 손을 떠난 개정 공탁법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될지, 이제 법원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영화 속 소녀의 아버지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배심원들이 눈을 감고 피해자를 백인이라 상상했던 결과다. 법원 역시 부디 자신이 심판받고 싶은 그대로, 다른 이를 심판해 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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