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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4. 여주미술관
정치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4. 여주미술관

여주의 ‘문화 오아시스’... 예술혼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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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호 작가의 특별전 ‘저만치 혼자서’가 열리고 있다. 윤원규기자

“노년기에 접어들며 이제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사회적 가치로 환원할 일을 생각했다. 기부나 경제적 후원은 오히려 쉬울지 모른다. 대신 나의 주변에는 미술이 있으니, 따로 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말하자면 자본과 재능을 함께 사회에 환원하는 일이다. ...마침 여주 지역에 연고가 있어 미술관 자리를 잡았다. 여주는 깊은 역사적 전통 문화를 가진 지방이지만, 현대화 과정에서 예술은 좀 지체된 듯싶다. ...여기에 여주 미술을 위해 샘 하나를 판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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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시민들에게 미술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자 2019년 개관한 여주미술관은 여주시 점봉동에 위치하고 있다. 윤원규기자

■ 여주 미술을 위해 샘 하나를 파다

여주미술관(관장 박선영) 설립자 박해룡 명예관장의 작품집 <박해룡 청색시절-삶에 물들이기>에 실린 말이다. “2017년 미술관 건립을 기획하고, 2018년 설계하고, 곧 착공하여, 2019년 개관할 수 있었다. 참으로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얻은 요행이었다” 짧은 글이지만 속도감이 느껴진다. 설립자는 88세의 고령에도 화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현역 작가다. 고려제약(주)의 설립하여 대표이사를 지낸 박 명예관장이 사재를 털어서 건립한 여주미술관은 여주시에 건립된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다.

여주시 세종로 394-36에 자리 잡은 여주미술관에도 가을이 깊었다. 밤에 내린 비로 떨어진 붉은 단풍잎들이 늦가을 햇볕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야트막한 산허리에 자리를 잡은 미술관은 사방이 툭 열려있다.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둘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했다면 정문 왼편으로 낸 오솔길을 선택하게 된다. 철로 받침목을 징검다리처럼 놓아 만든 계단이 운치를 더해주는 작은 길이다. 정문과 가까운 언덕에 언월도를 비껴든 빼빼 마른 사나이가 우람한 황소를 타고 달리는 조각상이 서 있다. 중국 조각가 지앙 차우의 작품으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새롭게 해석한 재미있는 작품이다. 미술관의 독특한 지붕과 하얀 벽이 산뜻하다. 미술관을 설계한 이는 국민대 건축과 박길용 명예교수로 설립자의 아우다. 그는 “자연 속에 건축물이 들어갈 때 가급적 덩치를 작게 하는 것이 설계자의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하는 자연친화적 건축가다. 그는 자연 속에 자리 잡은 여주미술관의 특징을 이렇게 소개한다. “건물의 형태를 M자 모양의 지붕 2채가 맞붙어 4채가 엮인 것 같은 형태로 만들어 건축물을 잘게 나누어 몸집을 줄였다. 경사지붕을 통해 내부에서 큰 어미 새의 날개와 같은 모습의 천장을 연출시켜 관람객으로 하여금 안락함과 웅장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통으로 이어진 건물 아래에서 공연을 열 수 있도록 조성된 공간을 지나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니 중정이 나타난다. ㄷ자형의 건물이 품은 중정에도 아담한 조각품과 나무들이 서 있다. 잎을 모두 떨군 탓에 수형이 완전히 드러난 화살나무 두 그루가 마주보고 서 있는 풍경이 정겹다. 미술관 주변은 온통 나무들이다. 나무들 사이사이로 곳곳에 조각 작품들이 있다. 카페 ‘돈키호테’에서 차를 마시고 우산을 든 맨발의 소녀상을 지나 단풍잎으로 붉어진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미술관에 가득한 늦가을 정취에 빠져든다. 박소윤 관장의 안내를 받아 최선호 작가의 특별전 ‘저만치 혼자서’를 둘러본다. “11월 14일에 작가를 초대하여 ‘미술관과 문화’라는 전시 기념 특강을 열었습니다. 미술관의 역할이 지역사회에 문화자산이자 사회공헌의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본 강연이었어요”

‘저만치 혼자서’라는 제목이 은근하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1전시실은 아주 널찍하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모두 공부했다는 최 작가의 작품은 검정과 파랑과 하양의 단색과 단순한 구도가 특징이다. 잠시 서 있어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비결은 색일까, 구도일까? “가운데 파란 색은 비로 천연염료 ‘쪽’이에요” 박 관장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쪽의 빛깔이 은근하며 그윽한 조선 여인의 마음을 나타내는 듯하다. 캔버스에 살짝 번진 푸른 빛깔에서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물론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이고 해석될 수 있겠지만, 내 눈엔 그렇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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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와 잔디가 가득한 야외전시장을 거닐며 다양한 조각 전시품을 감상할 수 있다. 윤원규기자

■ 미술관, 즐거움과 행복을 만들다

개관 기념 특별전의 주제는 ‘프랑스 예술가들이 누리는 표현의 환희, 박해룡의 삶에 물들이기’였다. 앙드레 브라질리에, 에르베 로왈리에 등 프랑스를 중심으로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12명의 프랑스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과 박해룡 작가의 작품이 전시됐다. 건강한 리얼리즘과 그림은 사람들과 편안하게 소통되어야 한다는 박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작품들이다. 이어진 하반기 기획전은 ‘HAPPY! 여주 FANTASY’展으로 ‘즐거움과 행복’을 전면에 내세웠다. ‘행복’을 전시 슬로건으로 삼고, ‘판타지’를 소통의 방법론으로 삼아 여주 시민과 관람객들에게 다가선 전시였다. 초청 작가 유정혜, 임정은, 김동현, 작가 수요일 4인이 참여했다.

박선영 관장은 개관 초부터 여주 지역의 학교와 공공기관을 쫓아다니며 여주미술관을 알렸다. 그러나 개관 직후인 2020년 초에 터진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와중에 마련한 기획전이 ‘이른 봄나들이-예술가의 작업실’이다. 어려움에 처한 지역 작가들을 응원하고 연대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기획이었다. 여주를 비롯하여 이천, 양평 광주에서 활동하는 45인의 작가와 박해룡 명예관장이 참여했다.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대표 작가의 작업실 재현과 작업실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한 곳에 모아 관객에게 예술가의 삶이 어떠한 지를 선보이고 각 지역에 어떠한 예술가들이 살고 있는지를 소개했다.

개관 1주년이 되는 2020년 6월에는 국제전을 마련했다. 여주시에 자리 잡은 미술관의 위상과 정체성을 탐구한다는 취지에서 주제를 여주의 역사와 환경을 끌어들인 ‘여주(驪州)-검은 말의 땅’으로 잡았다. 말을 주제로 삼은 이 전시에 19세기 청나라의 말 장식 유물 및 조각상을 비롯해 국내외 15인의 현대 미술가들의 66점(입체 22점, 평면 44점)에 이르는 다양한 조형 작품들이 소개됐다. 당시 전시되었던 작품 몇몇은 지금도 감상할 수 있다. 중국 도자기와 유물을 한데 결합해서 만든 성동훈의 해학미 가득한 기마상과 돈키호테, 붉은 말이 그것이다. 2021년에는 서용선의 ‘만疊산중서용선繪畵’을 열었다. 1951년생의 서 작가는 작업의 양과 일관성, 시도와 대상의 다양성에 있어서 돋보이는 중견 작가다. ‘만첩산중’이라는 제목처럼 100여 점의 회화를 감상하다보면, 산중을 헤매는 경험을 가지게 된다고 하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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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미술관 곳곳에 작품들이 숨어 있다/ 여주미술관의 설립자 박해룡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제2전시실. 말, 풍경, 사람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윤원규기자

■ 지역 미술관의 사명을 생각하다

1전시실의 지나 네모꼴의 2전시실은 설립자 박해룡 작가의 작품을 상설로 전시하는 곳이다. 바닥에 붉은 색깔의 도자기로 만든 말들이 질주하고 있다. “벨기에 조각가 아니타 플리레커의 작품인데 세라믹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개관 1주년 때 전시했던 작품이죠” 벽에 걸린 작품에도 대부분 말이 있다. 88세 노년의 박 작가가 왜 말을 사랑하는지 알 것도 같다. 뺨이 발그레한 중년의 여성이 미소 짓는 그림이 눈길을 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설립자 박해룡 작가의 아내이다. 박 관장이 액자를 내려 글자가 쓰여 있는 액자 뒷면을 보여준다. “딱부리, 들창코, 그러나 천사. 그라고 나으 아내. 그라고...2021. 7. 박해룡 웃으며 울면서 그렸다”

지난해에 세상을 떠났다는 아내의 생전 모습을 그리며 눈물짓는 박 작가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 화가를 꿈꾸었던 박해룡 작가는 71세가 되는 2005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 그동안 10여 차례의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박 관장에게 여주미술관의 비전을 물었다. “미술관의 공공의 역할을 자주 생각합니다. 여주미술관을 지역 내 문화예술인들이 소통하고 화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일, 지역 내 다문화 가정이나 저소득층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미술 교육도 개관 때부터 꾸준하게 진행하고 있지요. 관람객들이 미술과 편하게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미술관이 즐거운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죠”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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