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인천] 죽음 권하는 ‘플랜 75’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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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제 인천언론인클럽 회장

서울 이태원에서 핼러윈축제를 즐기려던 10·20대 청소년들이 대거 압사한 참극은 23년 전 청소년 56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천 인현동 화재사건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사고 직후 현장 취재를 하며 접했던 화마의 흔적과 매캐한 화염 냄새가 아직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다. 핼러윈을 맞아 N포세대 청년들이 코로나19로 억눌렸던 답답함을 분출하려다 세월호처럼 침몰하는 듯해 암담하기 그지없다. 인간 실수에 의해 발생하는 재난의 일상이 계속되고 있다.

세계 최저출산율에다 만성적인 청년층 취업난, 연금 고갈, 초고령 사회 등의 난제를 어찌 풀어나갈 수 있을까. 최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일본 영화 ‘플랜 75’는 조만간 다가올 일본의 미래를 그렸다.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 일본에서는 75세 이상을 ‘후기(後期) 고령자’라고 칭한다. 영화에선 사회보장, 의료비, 연금 고갈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75세 국민 누구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죽음을 신청한 후기 고령자의 안락사를 도와주는 정부는 10만 엔의 위로금을 주면서 마지막 온천 여행을 다녀오도록 한다. 자발적 죽음을 권유하는 정책이 ‘플랜 75’다.

한국 사회에서도 노인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 연금을 축내는 ‘연금충’, 매미처럼 시끄럽게 잔소리만 해댄다며 ‘할매미’라는 노인 비하 속어가 떠돈다. 파우스트는 지상에서의 향락과 권력을 누리기 위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파는 계약을 맺는다. 우리도 파우스트처럼 영혼 없는 세상에 산다는 한탄 소리가 나올 법하다.

과학기술 발달로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세기인데도 유토피아는 거리가 멀고 디스토피아가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리스어 ‘ou(없다)’와 ‘topos(장소)’를 합성해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의 유토피아는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에서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출산, 결혼을 기피해 노인 인구만 증가시키는 세태에서 벗어나려면 ‘플랜 75’ 같은 디스토피아 정책이 아닌 ‘국가 대개조 플랜’이 필요하다. 통계청의 출생아 추이를 보면 1981년 86만7400명 태어났는데 2001년 56만 명, 2021년 26만600명으로 줄었다. 40년 사이 신생아가 30% 수준으로 격감했다.

요즘 여성가족부 폐지 운운하는데, 양성평등이나 출산에 대해 너무도 근시안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단순히 출산율 증대가 아니라 양육, 보육, 교육, 주택, 고용, 보험, 연금, 양극화 등을 총체적으로 고려한 국가 혁신이 추진돼야 인구 위기에서 탈피할 수 있다. 여성가족부가 인구문제의 컨트럴타워인 부총리급 부서로 격상해야 실마리가 풀릴 수 있지 않을까.

박희제 인천언론인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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