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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9. 광주 얼굴박물관
정치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9. 광주 얼굴박물관

2004년 개관 ‘색다른 문화공간’ 사랑받아
진시황 병마용갱 무사부터 스타들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얼굴들...
극단 자유 연출가인 김정옥 관장 '열정 결정체' 한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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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연출가 김정옥 관장이 40여 년간 모은 수집품이 전시된 얼굴박물관은 광주시 남종면에서 2004년 개관했다. 얼굴 박물관 전경. 윤원규기자

얼굴 좀 봅시다!

박물관 입간판이 재밌다. 웃고 있는 한사람 얼굴이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서니 두 사람의 얼굴이다. 관람객을 마중하는 것일까. 박물관 벽면에 다소곳 두 손을 모으고 온화한 표정으로 망부석이 서 있다. 돌사람 아래에 다섯 나라의 언어로 얼굴을 나타내는 단어 Face(영어), Visage(불어), 顔(안, 중국어), Gesicht(독어), Cara(스페인어)가 씌어 있다. ‘아름다운 만남Ⅲ-20세기에 내가 만난 문화예술인’이란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얼굴박물관(관장 김정옥)은 2004년 5월에 개관했다. 이름에서 암시하듯 온갖 표정의 다양한 얼굴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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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전시장에 전시된 다양한 꼭두 인형들. 꼭두란 우리나라 전통 장례식에서 상여를 장식하는 나무 조각상이다. 윤원규기자

■ 평화를 꿈꾸는 얼굴박물관

박물관에 들어서면 진시황 병마용갱 무사와 철갑옷으로 무장한 중세 서양기사와 천진한 표정의 어린아이가 서 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는 사진액자들로 가득하다. 사진 속 얼굴이 어쩐지 익숙하다. 유명 탤런트와 연극배우들이기 때문이다. 얼굴박물관을 설립한 주인공은 극단 자유의 연출가이며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인 김정옥 관장이다. 집무공간에도 얼굴을 주제로 한 소품들이 가득하다. 김 관장과 부인 조경자 여사의 모습을 조각한 테라코타는 안준철 학예실장이 선물한 작품이다. 91세의 원로예술인은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며 대안을 촉구한다. “어떤 보수정권이 보수정권답지 않은 어설픈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국공립 박물관의 입장료를 무료화해 참여정부의 진흥정책에 힘입어 창립된 많은 박물관이 문을 닫았다. 오늘까지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박물관을 특수문화재단으로 인정해 주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다” 1966년에 극단 자유를 창립해 60여년을 활약한 한국 연극계의 원로답게 생각은 여전히 진취적이다. “우리 극단처럼 해외공연을 많이 다닌 단체는 없을 것이다. 우리 연극인들이 80년대에 한류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기여한 셈이다” 청춘시절에 한국전쟁을 겪은 김 관장은 평화를 무엇보다 강조한다. “우리에게 비무장 정신이 필요해요. 나는 비무장지대가 한반도 전체로 확장되면 좋겠다는 그런 꿈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어요”

한반도의 평화를 꿈꾸는 김 관장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 6·25전쟁, 민주화운동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한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영화를 공부하러 간 프랑스에서 연극에 빠져든다. 귀국하여 극단 ‘자유’를 창립하고,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로 재직하며 지금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그 사이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한국영화학회 회장, 국제극예술협회 세계본부 회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두루 지낸 한국 문화예술계의 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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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옥 관장이 삶을 회고하며 만나온 예술가, 문화인, 시인 등 ‘아름다운 만남’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윤원규기자

■ 얼굴로 우리 시대를 이야기하다

김 관장의 연출가로서의 감각과 기량은 박물관 특별전을 기획할 때도 발휘된다. 2004년 개관 특별전 ‘한국적 형상과 석인(石人)’을 시작으로 ‘종이오리기와 석인’(2004~5), ‘무속화와 무속공연’(2005), ‘세계의 배우-20세기의 표정’(2006봄), ‘한국의 장승과 벅수’(2006가을), ‘선비와 머슴사이’(2007봄), ‘예술가의 얼굴과 창조적 인연’(2007가을), ‘일제 감점기의 꽃단지’(2008), ‘한국예술가 100인의 얼굴’(2009), ‘22인의 예술가 그들이 표정’(2010), ‘석인의 얼굴, 예술가의 드로잉’(2011), ‘아르 브뤼, 한국’(2012), ‘세계의 미술가 50인의 얼굴’(2013), ‘세계의 인형과 꼭두극’(2013), ‘꽃단지와 꽃병’(2014), ‘아홉 가지 아름다운 만남’(2014), ‘세계의 초상화 50선’(2015), ‘화려한 행차, 저승가는 길’(2016), ‘생과 사를 연기하다’(2017), ‘아름다운 만남’(2018), ‘햇빛 밝은 아침’(2018), ‘20세기 기억의 공간에 떠오른 100인의 얼굴’(2019), ‘20세기 스크린의 영원한 얼굴’(2020), ‘세계의 인형전’(2021)으로 이어졌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아름다운 만남 얼굴Ⅲ’은 얼굴 박물관의 핵심 주제다.

■ 돌사람과 그림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위로와 격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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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전라지방의 동자석. 얼굴박물관 제공

김정옥 대표가 지난 40여년간 수집해온 소장품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김준철 학예실장의 안내를 받아 박물관을 둘러보며 사람의 얼굴에 담긴 풍성한 사연에 새삼 놀란다. 맨 처음 만나는 유물은 불상이다.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주는 불상은 쇠로 만들었건 나무 혹은 흙으로 만들었건, 긴 세월에 귀가 떨어지고 코가 사라져 버렸어도 표정이 더없이 평화롭다.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령은 허연 수염이 허리까지 늘어졌지만 얼굴은 십대 소년처럼 홍안이다. 현대 유명 조각가의 작품도 있다. 커다란 단체사진 속에 익숙한 얼굴이 여럿 보인다. 김정옥 관장 옆에는 연극, 영화, 드라마에서 종횡무진 활동하는 배우 김혜자 씨와 박인환 씨를 비롯해 ‘오징어 게임’에 출연해 골든 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오영수 씨의 얼굴도 보인다.

이제부터 특별전이 열리는 공간이다. 극단 자유의 이병복 초대 대표, 단원으로 활동했던 배우 추송웅의 얼굴이 반갑다. 1세대 연출가인 유치진, 이해랑, 차범석의 얼굴도 보이고, 권옥연, 김환기, 천경자, 백영수 같은 유명 화가들도 등장한다. ‘광장’을 쓴 소설가 최인훈,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가수 백년설과 남인수도 있다. 유명 시인들과의 인연이 궁금하다. 그 까닭을 학예실장이 들려준다. “젊은 날에 시를 쓰셨어요. 일찍 등단하셨지요” 김현승, 박성룡, 구상, 서정주, 신동문, 법정스님도 가깝게 지낸 인물들이다. 이제하와 함께 ‘문지’의 시집 표지화를 그린 김영태 시인과도 각별한 사이다. 특별전을 소개하는 도록의 표지화가 바로 김 시인이 그린 김 관장의 얼굴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카스트로가 ‘문화예술을 사랑한 정치인’으로 등장하는 사실도 흥미롭다. “카스트로가 연설을 할 때 관장님이 너무 피곤해 졸다가 잠이 들었다고 하시더군요. 유일하게 잠이 든 사람이었다고 해요” 특별전에 등장한 인물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분들이다.

“이 상여는 프랑스에서도 전시되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신문에 실린 기사도 스크랩되어 있다. 상여에 부착했던 인형들의 종류도 참으로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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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전시장에는 관석헌이란 한옥과 석인 수백점이 자리하고 있다. 윤원규기자

■ 마을 주민들과 펼치는 축제의 공간

아래로 내려다보니, 중앙에 무대가 있고 뒤편으로 좌석이 계단식으로 놓여 있다. “관람객들이 옛사람들을 만나는 박물관이자 동시대의 배우들이 펼치는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극장이지요” 박물관은 이곳에 마을 주민들을 자주 초대한다. 이웃과 어울려 연극을 보고 영화를 감상하는 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문을 열자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누마루와 대청이 있는 멋진 한옥이 나타난 것이다. 한옥에 얽힌 내력이 흥미롭다. 시인 김영랑의 고향이자 고려청자로 유명한 전라도 강진에서 옮겨져 온 집으로, 서울 목수 김춘연, 허균을 동원해 백두산 소나무로 지었다는 사연이 기록된 상량문도 있다. “이 집은 본래 장춘실(長春室)이란 이름을 가졌었으나 이곳으로 옮기고 관장님이 ‘관석헌’(觀石軒)이란 이름을 지었지요. 이 한옥에서 차를 마시거나 가족모임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룻밤을 지내며 한옥체험을 할 수 있지요”

돌사람들이 가득한 마당을 보면 ‘관석헌’이란 이름을 지은 까닭을 금방 알 수 있다. 천년의 세월을 건너온 돌사람과 마주 선다. 돌사람의 표정이 압권이다. 부릅뜬 눈, 뭉툭한 코, 닳아서 희미해진 입을 가진 돌사람의 표정은 배우들에 못잖게 매력적이다. 왜 돌사람에 빠져드는지 알 것 같다. 계단을 올라가 상여를 만난다. 너무나 우아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을 주는 유물이다. 석공이라 불리던 이름 없는 조각가들이 만든 돌사람은 우리의 민화 못지않게 뛰어난 예술성을 지녔다. 돌사람과의 아름다운 만남으로 박물관까지 설립한 김 관장은 이 세계 유일의 얼굴박물관이 계속 이어지길 소망한다. “다른 나라에는 얼굴박물관 같은 곳이 없어요. 그 소중한 의미를 앞으로 잘 이어가고 싶어요”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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