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0년 전 이곳에 米친〈米친: 쌀농사에 미친〉 농부들이 살았다
쌀은 세계인의 절반 이상, 아시아인들의 주식으로 먹는 곡물이다. UN은 2004년을 ‘세계 쌀의 해’로 제정했으며, 농촌진흥청은 8월18일을 ‘쌀의 날’로 정했다.
쌀(벼)은 한국인에게 너무나 정겨운 이름이다. 한 알의 쌀, 한 톨의 볍씨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관장 이도연)은 5천년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벼농사에 얽힌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고 체험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은 고양시농업기술센터 내에 위치하고 있다. 잔디가 곱게 깔린 박물관 마당 한쪽에 짚으로 만든 두 채의 움집이 있다.
신석기시대의 ‘원추형 집’과 청동기시대의 ‘직사각형 집’은 관람객을 한반도의 고대사로 데려다 주는 상징물이다.
그 옆에는 한반도 모양의 자그마한 논에서 자란 10여종의 벼가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 볍씨 한 알에 깃든 인류의 역사와 자연사
박물관에서 커다란 볍씨가 매우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쌀알을 토해내려는 듯 껍질이 살짝 벌어진 이 볍씨의 이름은 ‘가와지볍씨’란 이름을 가졌다. 일산 신도시 개발에 앞서 지표조사와 문화유적의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91년 6월에 이융조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이끄는 발굴 팀이 대화동 가와지마을 논바닥에서 까만 토탄층 가래나무 층위에서 볍씨를 발견한다.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한 이 교수는 이 볍씨를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국 베타연구소로 보내 연대 측정을 요청한다. 방사성탄소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5천20년 전의 볍씨로 밝혀졌다.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을 밝혀줄 뿐 아니라 한반도 벼농사가 청동기에서 출발했다는 기존 정설을 뒤집었다. 발굴팀은 벼 줄기와 낱알을 연결하는 ‘소지경(小枝莖)’ 흔적 등을 근거로 가와지볍씨가 우리나라 최초의 경작 벼라고 결론짓는다. 가와지볍씨의 역사적 의미는 5천년 전 한반도 농경문화의 기원이 바로 한강문화권을 중심으로 한 고양 지역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 볍씨는 학계에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앞서 여주 흔암리나 김포 가현리에서 발견된 볍씨의 연대보다 2천년이나 앞선 5천년 전의 볍씨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너비 7mm 남짓의 작은 볍씨 한 톨은 농경문화가 일본으로부터 전파됐다는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다. 한반도 최초의 재배 벼가 발견되자 외국에서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1994년 9월17일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가와지볍씨를 자세히 소개했다.
■ 세계서 가장 작은 유물로 세운 박물관
가와지볍씨 발굴 10년이 되는 2001년, 고양시농업기술센터는 가와지볍씨의 가치를 집중 조명하는 학술발표회를 열고 연구원들은 가와지볍씨의 중요성을 피력하며 조상대대로 쌀농사를 지어 온 고양에 볍씨 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같은 해 11월에 발굴 당시에 출토된 토기와 볍씨를 전시하는 ‘농심테마파크’ 문을 연다. 2013년 열린 고양600년 학술세미나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과 고양가와지볍씨의 재조명’과 국제학술회의 ‘고양가와지볍씨와 아시아 쌀농사의 조명’은 박물관 건립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2014년 4월 마침내 전시관 이름을 ‘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으로 변경하고, 같은 해 11월에 ‘고조선과 고양가와지볍씨’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었다. 박물관으로서 출범에 걸맞게 ‘농업의 미래를 위한 박물관(2015)’과 ‘세계의 선사농경과 5천20년 역사의 씨앗, 고양가와지볍씨(2016)’라는 학술회의를 연달아 개최하며 위상을 높여나간다. 또한 2016년에는 특별전 ‘고인류문화연구소 소장품 한국선사시대 농경연모 특별전’을 열었다.
2019년 4월29일에 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을 정식 등록하고, 9월에는 남양주 우석헌자연사박물관과 업무 협력을 체결한다. 이를 계기로 특별전 ‘혁명의 씨앗, 광물’와 ‘벼, 타임캡슐을 열다’를 연달아 열어 시민들의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낸다. 볍씨 한 알에 담긴 시간의 흔적과 화석에 기록된 다양한 생물종의 공존과 진화의 열정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읽어내고,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두 박물관의 협업이 신선하다. 협업과 융합의 노력으로 볍씨 한 알을 매개로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공생과 상생의 중요성을 확인한다. 작은 공간에서 매우 큰 의미를 담은 전시이다. 두 박물관의 협업과 융합이 빛을 발한다.
박물관은 현재 2천813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소장품은 가와지에서 발굴한 5천20년 전 신석기시대의 볍씨 5톨과 청동기시대 3천년 전의 볍씨 90톨을 보관하고 있다. 박물관은 네 곳으로 공간을 나누어 주제를 담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제1전시실 ‘고양가와지 유적실’은 1991년 5천20년 전 가와지볍씨가 출토된 대화리 가와지마을 발굴현장을 50분의1로 축소하여 재현한 곳이다. 당시의 사진을 통해서 발굴현장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돋보기기 장착된 특수용기 안에 든 5천년, 3천년 전의 가와지볍씨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슴 설레게 한다. 평균 길이 7.03㎜, 너비 2.78㎜에 불과하다는 가와지볍씨를 돋보기를 통해 유심히 살펴본다. 저 볍씨 한 알에 고양에서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흘린 땀방울과 수확의 기쁨이 배어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볍씨가 더욱 크게 보인다. 전자현미경으로 벼의 줄기 부분과 낱알을 연결하는 부분을 ‘소지경’이라 부르는데, 이 부분을 확대한 사진을 살펴본다. 가와지볍씨는 사람이 훑은 흔적이 보인다. 자생벼와 달리 재배벼의 소지경은 표면이 거칠다.
볍씨를 발굴한 지역에서 출토한 주먹도끼와 토기를 만나볼 수 있는 제2전시실은 주제가 ‘선사시대 농경생활’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에 담긴 뜻밖의 사연이 무척 흥미롭다. “빗살무늬토기는 벼를 비롯한 곡물을 담는 그릇으로 알고 있으시죠? 연구자들이 빗살무늬토기에 쌀을 넣어 밥을 지어봤는데 아주 맛있게 익었어요. 아마도 불기운이 토기의 바깥 면에 고르게 닿았기 때문일 것이에요” 정현진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미소를 짓는다. 박물관은 유물과 상상력이 만나야 즐거운 공간이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사용한 돌도끼를 든 원시인을 소재한 만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3전시실은 ‘조선·근대 농경문화’를 알려주는 공간이다. 누구나 다 알듯이 한강은 농사와 유통을 비롯해 한국인의 생활문화의 현장이자 중심지였다. 벼농사가 발달했던 고양시의 과거로 안내하는 유물들과 마주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지게와 호미 같은 물건들이다. 벼의 줄기를 이용해 많은 물건을 만들어 사용했다.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 서민들이 애용했던 짚신, 벼를 비롯해 곡식과 열매를 말리는 멍석, 곡식을 담는 가마니, 거름이나 흙, 재를 담았던 삼태기 등 지금 아이들의 눈에는 낮선, 어른들의 눈에는 익숙한 물건들이다. 감동스러운 것은 농기구를 비롯해 전시된 유물들이 모두 1991년 당시 신도시 개발에 반대하던 지역 농민들이 기증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 쌀 한 알에 담긴 과거와 미래
가와지볍씨는 한반도 최초의 벼 재배현장이 한강 유역인 고양시가 중심이었음을 알려주는 소중한 유물이다. 문제는 가와지볍씨가 야생벼가 아니라 재배벼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볍 알이 이렇게 많은 사연을 전달해 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 볍씨에는 5천년 전 단군조선의 역사도 담겨 있을 것이다.
고양시의 쌀 사랑도 각별하다. 지역 농업인을 돕기 위해 고양시가 나서서 ‘고양 쌀’ 소비 촉진에 앞장서고 쌀 팔아주기 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볍씨 한 알로 시작된 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으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유물을 가지고 박물관을 세운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쌀은 미래의 자원이다. 고양시가 볍씨 연구에서도 세계를 선도하는 도시로 자리매김하길 소망한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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