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족쇄 ‘여성’, 편견 맞서 ‘女成’, 함께하는 ‘女行’
국립여성사전시관(관장 정영훈)은 2002년 서울 여성플라자에서 개관했다가 2014년에 현재의 정부지방고양합동청사로 이전한다. 같은 해 9월, 이전 개관 특별전으로 ‘북촌에서 온 편지-여권통문’을 연다. 1898년 9월1일 이소사와 김소사의 이름으로 발표한 ‘여권통문(女權通文)’은 한국 여성운동사의 분수령을 이루는 선언이다. 여성의 평등한 교육과 직업, 참정권을 요구하는 이 선언은 1908년 3월8일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궐기로 시작된 ‘세계 여성의 날’ 보다 10년이나 앞선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권통문을 토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단체 ‘찬양회’를 조직하고 1899년에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힘으로 순성여학교를 세운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우리 여성의 역사가 이제까지 제대로 쓰이지 않고 보이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의식이 국립여성사전시관 설립의 출발점이다. 국립여성사전시관은 5천년 우리 역사에서 누락되고 유실된 여성의 소중한 경험과 기억을 오늘에 되살리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여성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
전시관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1층과 2층에 마련된 전시실을 둘러본다. “2층 상설전시실은 ‘과거를 담아 미래를 열다’라는 주제로 연대와 분야별로 역사발전에 기여한 사람들과 역사의 궤도를 바꾸었던 사건들, 국난의 시기에 있었던 아픈 기억들, 그리고 세계 인류의 존엄성과 평화의 가치를 일깨우는 여성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전시기획을 담당하는 이동은 학예사의 설명이다. 고대부터 6·25전쟁까지 상상과 상징을 통해 ‘여성의 역사’를 다룬 디지털 패널 앞에 선다. 영상 작품 ‘위대한 유산’은 한국 여성의 역사를 환상적으로 보여준다. ‘변화와 대응’에서 현대사의 주역으로 등장한 한국 여성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타자기를 비롯한 낡은 전시물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기억과 기림’은 여성들의 수난사이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된 이후에도 생존을 위해 침묵을 강요당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고 기리는 공간이다. 유리관 안에 다소곳 손을 모은 소녀 인형들이 서 있다. “이 안에 있는 인형은 현재 생존해 계시는 할머니들과 같습니다” 2014년에 설치할 때보다 개수가 여럿 줄어들었다. 위안부들에게 지불했던 군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송, 소장 및 증언 속기록도 전시되어 있다. 위안부 문제는 ‘과거사’로 불리지만 ‘현재진행형’이다. 알록달록한 조각보는 무엇일까? “통일을 염원하며 DMZ 평화걷기에 참가한 여성들이 조각을 이어 만든 작품이지요” ‘협력의 기록’은 우리 삶 속에 놓인 온갖 폭력을 없애려는 여성들의 다양한 평화운동을 기록한 공간이다. 평화운동은 여성운동과 맞물려있음을 색동 조각보가 보여주고 있다.
■ 가족의 틀, 전환, 확장
1층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가족의 역사-틀, 전환, 확장’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가족’을 다루는 전시다. 1부는 ‘틀-가족의 역사, 제도를 통해 보다’이다.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틀’은 사실 시간과 공간,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과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족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해왔다. 흥미로운 것은 역시 사람들의 이야기인 2부 ‘전환, 틀을 바꾼 사람들’이다. 전통시대를 지나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우리 여성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장년층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근대 유물도 있다. 지금 봐도 세련된 디자인의 모자와 양산, 구두와 장갑은 1920년대부터 세상의 통념을 전복시킨 신여성의 필수품이다. 구두 한 켤레에는 온갖 사회적 차별과 편견, 억압을 물리치며 권리를 쟁취해낸 여성들의 눈물과 기쁨이 들어 있다. 1980년대에 제작한 가족법개정 포스터 한 장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이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갓을 쓴 남자가 재산과 상속, 자녀와 친족까지 네 가지를 모두 안고 있고, 한복을 입은 여성은 빈손으로 서 있다. 포스터를 발행한 곳은 가족법 개정에 앞장 선 ‘사단법인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이다. 이태영 변호사의 친필 원고, 김영정의 안경과 안경집, 이우정의 국회의원 배지, 박영숙의 친필 원고 같은 전시물들은 한국 여성운동사의 성과를 보여주는 빛나는 보배들이다. 한 장의 종이에 보수와 진보에 속한 유명정치인들의 이름 셋이 들어있다. 홍보를 담당하는 김예지 대리가 설명이 재미있다. “가족법 개정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여와 야,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 없이 한목소리를 냈던 증거물이죠” 1인 가구가 비약적으로 늘고 있고,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기는 문화가 형성된 지 이미 오래다. 앞으로 가족은 어떻게 변화할까? 이런 고민은 3부 ‘확장, 확장된 가족’에서 만나볼 수 있다. 단순히 자료만 나열하지 않았다. 공간을 시간의 흐름을 느끼도록 배치한 것이나 기증 유물을 입체적으로 전시한 발상이 산뜻하다.
■ 여성의 눈으로 과거를 살피고 미래를 준비하다
올해로 개관 20주년을 맞은 여성사전시관의 이념과 활동을 특별기획전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지난 2021년의 특별기획전은 ‘세상을 짓다-조리서로 읽는 여성의 역사’였다. 17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리서와 식재료, 조리 도구, 부엌의 형태 등을 통해 음식문화사를 살피는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성 구별 없이 모두가 함께 요리하는 시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질문을 던졌다. 2020년 특별기획전 ‘방역의 역사, 여성의 기록’은 코로나19가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시점에서 방역의 역사를 여성의 시각으로 살피는 기획이었다. 방역의 개념이 생겨난 구한말, 근대적 보건위생이 정착되는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방역의 역사를 80여점의 유물과 사진, 영상을 통해 조망하며 그 안에 보이지 않던 여성의 이야기를 끌어냈다. 특히 2020년 현재 코로나19 방역에 헌신하는 동시대 여성들의 활약을 기록했다는 사실이 돋보인다. 2019년 특별기획전 ‘여성 직업 변천사’도 흥미롭다. 지난 100년의 여성사를 여성의 일과 노동의 변화, 앞으로의 과제를 살펴보는 기획이다. 당시를 알려주는 사진과 영상기록물 등 100여점의 자료를 통해 여성들의 직업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 왔는지를 살피도록 했다.
■ 국립여성사박물관 설립을 향해 쉼 없이 움직이다
국립여성사전시관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여러 도시를 찾아가는 ‘순회전’도 그 하나다. 2021년은 ‘여성독립운동가’를 주제로 세계여성박물관 충북미래여성플라자(1차), 평등한 가족의 달 온라인 갤러리展 수원도시공사(2차), 충북미래여성플라자(3차), 창원시청 로비, 여성회관 창원관, 여성회관 마산관(4차), 충북미래여성플라자(5차)로 이어졌다. 2019년에는 ‘여권통문’과 ‘여성독립운동가’ 콘텐츠를 가지고 중랑구청 잔디광장, 전남여성문화박물관, 동작구청 별관 야외마당, 고양어린이박물관 야외잔디마당, 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 화정중앙공원, 도봉구청 1층 로비갤러리, 고양시 여성커뮤니티센터, 광명시민회관 전시실, 김포시아트홀 전시관, 수원시가족여성회관 갤러리, 전북 고창군 동리국악당, 북촌문화센터, 충북 청주시 그랜드플라자호텔 2층, 신한은행 백년관, 고양어린이박물관 1층 다목적실 등에서 시민들과 만났다. ‘유물과 함께하는 여성사아카데미’를 비롯한 다양한 강연회로도 시민들과 만나고 있다.
국립여성사전시관은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국립여성사박물관이 곧 건립될 예정이다. 이미 터까지 확보한 상태로 2024년에 개관할 예정이다. 정영훈 관장이 당부의 말을 덧붙인다. “여성의 의식주와 생활사 등에 관한 수집된 소장품은 현재까지 약 6,500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여성 관련 유물이나 자료를 소장하고 계신 개인이나 단체가 있으시면 저희 전시관에 기증해 주십시오. 기증자의 고귀한 뜻을 살려 잘 보존하고 깊이 연구하여 널리 활용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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