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어 ‘에페케인’이란 말은 ‘멈추다’, ‘삼가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판단 중지를 뜻하는 ‘에포케(Epoche)’가 나왔다.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의 현상학에서도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일상적 관점을 괄호 안에 넣어 생각과 의식을 멈춰 순수한 체험, 순수 의식을 얻는 걸 말한다. 너무나 당연하고 더구나 객관이라고 아는 걸 괄호 안에 넣기는 쉽지 않다.
불교에서 아상(我相) 이야기도 비슷하다. 내가 있다는 생각, 내가 만들거나 내게 주입된 관념을 버리란 말이다. 왜? 집착과 분열과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개인 안에서 저런 것들이 생기면 혼자 괴롭지만, 사회에서 저런 것들이 쌓이면 사회적 갈등이 일어난다.
공부와 학문에서는 정답과 오답의 구분이 제법 확실하다. 그러나 감각, 감정, 생각, 의식 등에서는 그런 구분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건 동물, 인간, 동양인, 한국인 그리고 어느 집안 사람으로서 타고난 유전적 특성들과 살면서 굳어진 상(相), 곧 나의 상 때문에 나타난 거지 그게 꼭 옳고, 그것과 다른 게 그른 건 절대 아니다.
일본의 혐한(嫌韓)이나 유럽인의 유대인 혐오가 다 그렇게 만들어졌다. 우리 사회 안에도 그런 게 얼마나 많겠는가. 다름은 상대를 존중할 때 다양성이 돼 모두에게 도움을 준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을 때 다름은 왕따를 낳고 혐오와 갈등을 낳는다. 심하면 살인이 나고 인종 말살 전쟁이 난다.
나도 여전히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일어나곤 한다. 저 짓은 왜 하지? 저걸 어떻게 먹지? 거긴 왜 가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어느덧 그럴 때마다 아상과 에포케를 되뇐다. 공부 때문에 유럽에 나가서 지내던 딸이 객원교수를 명받아 일시 귀국해 모처럼 외식하기로 했다.
딸이 태국 레스토랑을 골랐다. 전 같으면 벌써 한마디 나왔을 텐데 에포케, 잘 참았다. 걱정과 달리 음식도 제법 맛있었다. 나 자신이 외국에서 꽤 오래 생활했는데도 낯선 음식에는 유난히 사리는 편이다. 의식 한편에 모름지기 ‘음식이란...’ 생각이 상이 돼 박혔던 탓이다. 그래 봤자 부모님이 남겨 주시고 자라면서 입에 익은 것뿐인데 말이다.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조금 더 들어가 보면,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그것이 반드시 실재고 그게 본디 모습이라고 할 수도 없다. 시야가 다르고 시력도 다르며, 시각정보를 해석하는 뇌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물며 학교에서 배운 독서나 경험으로 얻은 지식도 마찬가지다. 진리로, 공리로 인정된 것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자기 지식이 더 낫다고 우기지는 말아야 한다. 우길 게 아니라 그냥 증명해 보여주면 된다. 무엇보다 서로 상대를 존중해 다양성의 꽃을 피우면 좋겠다.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독교육복지연구원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