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종합예술 결정체… 지구촌 ‘보물서고’
책은 종합예술품이라는 주장이 있다. 19세기 유럽에서 펴낸 아름다운 책과 마주하면 이런 생각에 절로 동의하게 된다. 책의 매력이 고흐의 그림이나 로댕의 조각 작품에 못지않음을 보여주는 박물관이 있다. 파주시 헤이리 예술마을에 있는 한길책박물관(관장 김언호·박관순)은 책에 대한 통념을 바꾸게 하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인문·예술학 출판을 선도해온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책의 문화, 책의 미학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설립한 한길책박물관은 ‘북하우스’ 안에 있다. 밖에서 보면 그랜드 피아노를 연상시키는 이 독특한 건물은 건축가 김준성씨가 설계한 것으로 2008년 ‘제19회 김수근 문화상’을 수상한 작품이란다. 한길사의 책들을 진열해놓은 책방 ‘북하우스’와 카페가 있다. 계단 없이 박물관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완만한 경사길 벽면에 책들이 가득하다.
■ 책과 책방들의 아름다운 풍경
현재 지하 1층 전시관에는 김언호 대표가 세계의 아름다운 서점을 돌며 찍은 사진전 ‘책들의 숲이여 음향이여’가 열리고 있다. 전시된 작품을 살펴보면서 책은 독립된 예술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800년 된 고딕성당에 들어선 마스트리흐트의 도미니카넌서점, 폐쇄된 기차역을 서점으로 바꿔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안위크의 바트 북스, 24시간 불 밝히는 베이징의 싼롄타오펀서점은 규모나 역사나 운영 방식에서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1902년 개점 이후 한 번도 문을 닫지 않았다는 도쿄의 기타자와서점, 부산의 자존심 같은 영광도서의 풍경도 만날 수 있다.
“책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름다운’ 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린 시절 화가를 꿈꾸었을 정도로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책을 만들면서 그 아름다움에 매료됐죠. 고서는 그 시대의 정신과 사상을 보여주는 문화재로 아름답고 위대한 흔적입니다. 아름다운 책에 꾸준하게 관심을 갖고, 오래된 책이나 판본들을 수집했지요. 예술적 가치를 지닌 책, 인류 공동의 자산이자 문화유산인 책을 통해 책이 담고 있는 시대정신을 이웃들과 함께 느끼고 싶었습니다”
김언호 관장은 양서를 펴내기 위해 아이디어를 얻고자 유럽의 책방을 순례하면서 운명처럼 19세기 영국의 예술가이자 위대한 출판인인 윌리엄 모리스(1834~1896)와 만난다. 모리스가 1891년에 설립한 켐스콧 공방에서 펴낸 아름다운 책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고 그의 예술혼에 빠져든다. 결국 거금을 들여 켐스콧 공방에서 펴낸 셰익스피어의 시집, ‘캔터베리 이야기’를 쓴 시인 제프리 초서의 ‘초서 작품집’ 등 53종 66권 전질을 구입한다. 출판인 김언호 관장에게 모리스는 영원한 스승이다. “아름다운 책을 출판하려고 모리스가 기울인 정성은 놀랍습니다. 여러 가지 활자체를 직접 디자인하고 종이와 잉크를 개발하기도 했지요” 모리스의 책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는 까닭은 무엇일까? 전시된 모리스의 책을 유심히 살펴보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나뭇잎과 꽃봉오리들이 반복 배치된 문양을 바탕으로 모리스가 디자인한 머리글 서체와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삽화가 어우러진 멋과 품격은 우리 시대에서 맛보기 어려운 황홀한 체험이다.
■ 책의 품격 높이고 아름다움 살린 모리스와 도레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친숙한 그림과도 만나게 될 것이다. 학창시절에 읽었던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독특한 삽화는 바로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구스타브 도레(1832~1883)의 판화 작품이다. 도레의 덕분에 ‘돈키호테’는 더욱 유명해졌다. ‘돈키호테’를 비롯해 ‘신곡’과 ‘장화신은 고양이’, ‘라퐁텐우화집’ 등의 삽화도 감상할 수 있다. 삽화 228점을 넣어 프랑스와 영국에서 엄청나게 팔린 ‘도레의 성서’도 있다. 왜 그림 성경이 등장했을까? 중세 유럽에는 9할이 문맹자였다. 스테인드글라스도 문맹자를 위한 그림 성경이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는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유명하다. 1797년에 출간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후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등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삽화가 들어 있는 성경책도 만날 수 있다. 영국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의 판화, 영국 삽화가 오브리 비어즐리의 ‘살로메’도 매력적인 작품이다. 서양의 고서들이 즐비한 박물관에서 근대 우리나라 유명 작가들의 육필원고를 만나는 것도 뜻밖의 즐거움이다.
1층과 지하 1층 기획전시에 이어 2층과 3층 상설전시실 순서로 둘러보면 된다. 2층에 마련된 영상물을 보면 박물관에 전시된 책과 관련된 정보를 종합적으로 얻을 수 있으니 빠트리지 말고 들러보길 권한다. 16~19세기 유럽의 아름다운 고서들, 18~19세기 출판인쇄술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판화와 시대정신 가득한 신문·잡지 등 국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출판물이다. 시대와 지역별로 전시해놓은 ‘아라비안나이트’ 판본의 섬세한 삽화를 살피다보면 미술관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19세기 후반에 간행된 잡지 ‘Yellow Book’과 ‘Saboy’, 26세로 요절한 삽화가 비어즐리의 책들, 20권으로 구성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살바도르 달리나 후안 미로 같은 세계적인 거장들이 삽화를 그린 성경도 빼 놓을 수 없는 전시품이다.
■ 책의 향기 음미하며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상상
1976년에 창립한 한길사는 2022년 현재까지 3천500여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 중에는 40만부가 팔린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롯해 ‘함석헌전집’,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같은 베스트셀러도 여럿 있다. 김 관장은 출판의 정신과 뿌리를 씨알 함석헌 선생에게서 찾는다. 북하우스 1층 한복판에는 함석헌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다.
김언호 관장은 파주출판문화단지와 300여명의 문화예술인들을 설득해 문화마을 ‘헤이리’를 만들어낸 주역이다. 파주출판도시 건설이 진행되던 1994년 봄, 김언호 관장은 볼로냐 아동도서전을 참관하러 가는 길에 영국 웨일스 지방 폐허가 된 탄광촌에 들어선 고서마을 ‘헤이온와이’를 찾아간다. 이때의 인연은 헤이리 예술인마을로 연결된다. 김 관장은 헤이리의 환경을 고려해 서점, 갤러리, 카페, 박물관을 두루 갖춘 복합문화공간을 열었다. 예술마을 헤이리에 한길책박물관이 탄생한 내력이다.
책박물관을 둘러보며 교육·과학·기술·예술 등 모든 것이 책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김 관장의 주장처럼 “책이야 말로 미래를 창조하는 원천”이다. 영화·뮤지컬·애니메이션 등 어떤 콘텐츠든 책이 그 가운데에 있다는 주장을 감히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에 책의 소멸을 예측했으나 종이책은 여전히 살아 있다. 김 관장의 주장대로 지식과 정보의 양보다 질이 높아져야한다. “인터넷에 들어가든지 스마트폰을 보면 웬만한 정보는 다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종이책을 읽어야 합니다. 좋은 책은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한길책박물관은 현재 ‘어린왕자, 나의 별을 찾아서’를 진행하고 있다. 11월30일까지 진행되는 이 행사는 생텍쥐페리가 1943년에 ‘어린왕자’를 펴낸 것을 기념하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된 다양한 ‘어린왕자’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세계서점기행’을 펴낸 바 있는 김언호 대표의 사진전 ‘책들의 숲이여 음향이여’는 10월2일까지 이어진다. 세계의 아름다운 서점을 통해 한 나라의 문화적 역량과 시민들의 품격, 장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도내의 여러 도시에서 이 전시가 이어져 다시 책을 가까이하는 문화, 아이들이 소리 내어 책을 읽는 운동이 일어나길 빌어본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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