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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5. 파주 ‘세계인형박물관’
정치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5. 파주 ‘세계인형박물관’

인간과 희로애락 함께, 지구촌 인형들 한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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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헤이리마을에 위치한 세계인형박물관은 세계 각국의 인형을 통해 그들의 삶과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박물관 전경. 윤원규기자

지구 마을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부산일보 기자 출신의 유만찬, 김진경 두 사람이 인터넷 신문을 시작한다. 부족한 재정을 메꾸기 위해 온라인 쇼핑몰을 열었는데, 주요 상품이 세계의 전통인형이었다. 두 사람의 관심과 흥미는 자연스레 전통인형으로 옮아갔다. 인터넷 쇼핑몰의 특성상 두 사람은 인형에 대해 공부하고 이름부터 의상까지 인형에 담긴 다양한 정보를 소개한다. 전문 실력을 갖추게 된 두 사람은 2013년 전통인형들 속에 담긴 풍부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담은 <갖고 싶은 세계의 인형>이란 책을 펴낸다. 그리고 2015년 5월, 파주 예술인마을 헤이리에 세계인형박물관(관장 유만찬)을 개관한다. “인형은 그 나라 사람들의 복식문화를 잘 보여줍니다. 전통 옷에는 많은 사실이 담겨 있지요. 오랜 세월과 풍토가 만들어낸 문화와 역사, 어떤 사건이 인형에 담겨 있습니다” 부관장이기도 한 김진경 학예사의 말이다. 짧은 시간에 80개국의 1천개나 되는 인형들과 모두 만날 수 없는 노릇이다. 가장 애착이 가고 재미난 이야기가 담긴 인형을 소개해줄 것을 부탁하자 두 사람이 나섰다.

■ 인형을 통해 세계인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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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네트 인형극을 관람 및 체험 해볼 수 있다. 윤원규기자

“각국의 인형들을 통해 지구 마을이웃들, 그리고 그들의 삶과 문화를 소개하는 공간이기도 하지요. 민속인형은 세계 각 나라 생활풍습과 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김 학예사가 노랑머리 인형의 치마를 뒤집자 갈색머리 흑인이 튀어나온다. 놀라운 반전이다. “엘사와 안나에요. 미국에서 유행했던 인형이지요. 미국에서 한때 인종차별 문제를 드러내는 상징처럼 여겨졌다고 해요”

코너에 놓여 있는 독특한 생김새의 모자들은 관람객들이 써 볼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 관람객들이 직접 조종해 볼 수 있는 인형 ‘마리오네트’도 흥미롭다. “르네상스 시대에 마리오네트는 이탈리아 교회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공연에 사용한 인형인데, 마리오네트라는 말도 성모 마리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교회 문을 벗어나 유럽 전역으로 번져나간 마리오네트는 17세기 체코에서 꽃을 피웁니다. 독일 나치가 체코를 점령했던 시절 체코의 인형술사들은 상징과 은유로 나치를 풍자하는 각본을 써서 공연을 펼치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고난을 당하지요. 이처럼 마리오네트는 억압에 저항하며 자국의 언어와 전통을 지키는 체코의 구심점이자 상징이 되었습니다”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작은 인형들이 벽에 붙어 있다. “과테말라의 ‘걱정 인형’이에요. 걱정 인형은 주부들이 남은 천이 아까워 2~3㎝ 길이의 나뭇가지에 천과 실을 감아 만든 것입니다. 부모는 잠 못 드는 아이에게 걱정 인형을 안겨주며 이렇게 말한다고 해요. ‘걱정은 인형한테 말하고 베개 밑에 넣어두렴. 그러면 인형이 네 걱정을 모두 가지고 사라진단다’ 그리고 아이가 잘 때 인형을 감추는데, 아침에 일어난 아이는 인형이 없어진 것을 보고 걱정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요” 필리핀의 ‘바롱 타갈로그’ 인형은 필리핀 남성의 대표적인 정장을 재현했다. 정장인데 속이 훤히 비치는 천을 사용한 까닭이 슬프다. 식민지시절 옷 속에 무기를 숨기지 못하도록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도록 강제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고난의 기억은 이제 필리핀의 자부심과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다.

목에 식량 자루를 걸고, 등에 담요를 메고 손엔 양철통과 지팡이를 쥐고 있는 할아버지 인형이 있다. 해진 모자에 주렁주렁 4개나 달린 코르크가 호기심을 부른다. “호주의 ‘스웨그맨’ 인형입니다. 호주에 실제 이런 행색을 한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가 있었지요. 1850년대 ‘골드러시’ 여파로 호주에도 유럽 이주민들이 몰려듭니다. 스웨그맨은 당시 호주에서 양털 깎는 일자리를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한 이들을 일컫지요. 코르크 마개는 얼굴에 들러붙는 파리들을 쫓아내는 용도였죠. 인형의 배경을 조사하면 세계사와 인류학이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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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마리오네트 인형들. 윤원규기자

■ 인형에 깃든 흥미로운 문화와 슬픈 역사

크고 화려한 타조 깃털로 만든 머리장식을 한 벨기에 인형 ‘질’은 지역민들이 주체가 되어 수백 년 동안 지켜온 ‘뱅슈 카니발’의 주역을 형상화한 인형이다. 이 마을 축제를 보기 위해 세계에서 오는 관광객만 30만이나 된다고 한다. 박물관 중앙을 차지한 인형은 러시아의 ‘마트료시카’다. “사실 마트로시카는 일본의 칠복신 인형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것입니다. 러시아 장인들의 다채로운 시도를 거치면서 마트료시카는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성취하게 됩니다”

4천년의 긴 역사를 가진 인형이 지금처럼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으로 진화한 것은 200~300년쯤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형은 삼국시대에 등장하는 ‘토우’이다.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토우는 악기를 타는 모양, 노래하는 모양, 지게를 진 모양, 노인의 얼굴, 부부상, 남자상, 말탄 모양 등 형태가 다양하다. 백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리로 만든 동자상도 있다. 해마다 음력 3월이 되면 대여섯 살의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풀각시인형도 있다. ‘꼭두각시놀음’과 ‘만석중놀음’에 사용되는 인형은 움직이는 인형이다.

인형이 없는 나라도 있을까. 이슬람 문화권의 몇몇 나라는 인형이 없다. 사람이나 동물 모습의 형상 만드는 것을 금기로 여기는 문화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슬람권에도 서양의 상징인 바비인형이 전파되었다는 사실이다. ‘폴라’는 바비인형의 자세와 노출이 이슬람 미덕을 해친다는 이유로 검정 차도르를 두르고 있다. 펑퍼짐한 치마를 입은 뚱보 인형도 있다. 남아메리카 수리남의 전통 의상 ‘코토미시’를 입은 인형은 슬픈 역사를 알려준다. 17세기 말, 네덜란드 식민지 수리남에서 커피·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여성 노예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자 수리남의 여성들은 치마 안에 원통형 쿠션으로 몸을 감싸고 속치마와 겉옷을 여러 겹 껴입어 뚱뚱하게 위장했다. 코토미시에는 제국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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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의 전통복장 비쉬반카를 입은 인형. 윤원규기자

■ 인형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를 노래하다

세계인형박물관은 현재 ‘2022년 길 위의 인문학-위드 우크라이나!’를 진행하고 있다. ‘위드 우크라이나!’을 여는 까닭을 이렇게 전한다. “…낯선 존재를 알아가기,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아파하기…, 이런 작은 씨앗들이 사람을 무기력함으로부터 치유하고 평화의 열매를 맺는 힘으로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위드 우크라이나!’가 그런 작은 씨앗들 중 하나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사와 다른 전쟁의 역사를 알아보고 ‘나부터 평화’를 실천하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을 갖는다. 아울러 전통문화 소품인 비녹(화관), 모탄카(헝겊인형), 피잔키(부활절 달걀)를 만들어 보며 우크라이나 문화를 배우고 평화를 기원하는 시간도 가진다. 10월30일까지 ‘2022 경기도 지역문화예술플랫폼 육성사업-토닥토닥 인형극’도 진행한다.

박물관의 체험교육은 인기가 많다. 예컨대 2021년에 진행한 ‘길 위의 인문학-인형으로 통통’은 참가자 96%가 즐거웠다고 응답했을 정도다. ‘집에 온 빛의 마법(2021)’은 아시아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그림자 인형극에 대해 배우고 체험하는 프로그램으로 우리나라 전래동화 ‘해님 달님’을 그림자인형극으로 만들었다. 특별기획전 ‘인형에 담긴 세계 의상전(2019)’도 주목을 받은 전시였다. 세계인형박물관은 2017년부터 ‘바부슈카-인형 짓는 어르신’이란 이름의 동아리를 통해 지역 단체와 연계해 어린이들과 어울리며 인형을 활용한 사회 봉사 활동을 펼쳐왔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린 2020년에는 전면 비대면 수업 ‘함께 해요, 바부슈카!’를 진행했다. 온라인으로 인형과 가방을 만들고 인형극전까지 열었던 특별한 기획이었다. 인형을 매개로 어르신과 어린이를 연결하고 지역 이웃과 연대하여 세계의 평화를 노래하는 세계인형박물관의 당당한 발걸음에 박수를 보낸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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