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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국 역사 담아낸 가평 보납산 가치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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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국 역사 담아낸 가평 보납산 가치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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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 가평군청 관광전문위원

역사 흐름에 따라 전설을 기반으로 독특한 문화가 태어나고, 후세에 문화유산으로 전해진다.

문화유산은 오랜 세월 주민들 관습으로 축적되어 문화정체성으로 형성된다. 아울러 지역 전통 문화유산으로 상품을 생산, 유통할 때 문화산업이 창출된다.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문화유산은 관광산업의 핵심자원이다. 지역주민에게는 자긍심을 나타내는 문화자원이며, 방문객에게는 지역문화를 홍보하는 관광자원이다. 궁극적으로 문화유산은 주민들의 삶과 정서를 담아 문화정체성을 형성함으로서 미래 먹거리를 창조하는 산업자원인 것이다.

가평에 독특한 문화정체성을 상징하는 야트막한 석봉(石峯) 하나가 있다. 1599년, 조선 서예 최고봉 한호라는 분이 군수로 재직하면서 수시로 오르던 돌산이었다. 군수는 돌산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자신의 호를 석봉(石峯)이라고 지었다.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떡장수 어머니의 자식교육 일화로 유명한 그 한석봉이었다.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서 벼루와 붓을 보물과 함께 돌산에 묻어두었다. 훗날 사람들은 보물을 묻어두었다고 해서 보납산(寶納山)이라고 이름 지었다. 오늘날 가평 공공건축물 중 한석봉 체육관, 한석봉 도서관 등 대부분 한석봉 군수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으며, 문화원에서는 해마다 한석봉 전국휘호대회를 열고 있다.

보납산은 백두대간 한북정맥 중 화악지맥이라는 산악지세가 북한강물 속으로 급격하게 잠기는 마지막 암릉이다. 마치 북한강에 머리를 대고 물을 마시는 자라처럼 산과 강이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곳이다. 이곳은 구한말 가평 의병군의 최후 격전장이었다. 나라 잃은 분노에 떨쳐 일어난 가평∙춘천 의병연합군이 서울로 진격 중 정부군과 맞서 결전하다가 산화한 역사적 현장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전국 각지에서 일제와 친일내각을 물리쳐 정의를 바로 세우자며 의병들이 봉기했다. 이충응이 이끄는 가평의병군과 이소응이 주도하는 춘천의병군이 연합하여 세력을 구축하자 정부는 의병봉기의 확장을 막기 위해 관군 토벌대를 파견했다.

1896년 2월, 일제의 사주를 받은 정부군이 의병군을 토벌하기 위해, 가평으로 이동했다. 한양으로 향하던 의병군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보납산에 진을 쳤다. 우세한 화력으로 무장한 정부군을 맞이하여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으나, 무기부족과 훈련부족 때문에 패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북면 일대로 피신했다. 그들은 나중에 멱골을 중심으로 일어난 3.15 가평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초기 학도의용군이 일어나 내 고장을 지키고자 싸웠으며, 반공유격대가 공산군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펼쳤다, 1951년 4월과 5월, 중공군 춘계 대침공 때 UN 영연방군과 함께 방어작전에 성공함으로서 북으로 진격하는 발판을 만든 전략적 요충지였다.

돌이켜 보면, 가평은 구한말 항일의병 격전장이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자 일으킨 독립운동의 발상지요, 공산세력으로부터 자유평화를 지켜 낸 최후보루였다. 역사의 고비마다 민초들이 일어나 나라 운명을 송두리 째 바꾼 기적의 땅이었다. 국난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유를 숭상하고 평화를 지키고자 정신적 유대를 강화한 지역공동체였다. 가평은 민초들이 주축이 되어 지역을 지켜냈다는 문화적 자긍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심에 보납산이라는 고유 문화유산이 자리하고 있다.

호국보훈의 달, 새로운 지방정부 출범 준비가 한창이다. 가평의 문화정체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보납산 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장차 군민들로부터 문화수준이 높은 지방정부라는 칭송과 존경을 듬뿍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상용 가평군청 관광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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