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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면서] 빼앗긴 그늘을 그리며
오피니언 아침을 열면서

[아침을 열면서] 빼앗긴 그늘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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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자 시조시인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푸라타나스/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김현승, 「푸라타나스」) 이 시를 뇌던 시절, 길가나 교정에는 플라타너스가 많았다. 넓적한 잎으로 그늘을 크게 지으며 땡볕을 가려준 나무였다.

시가 깊이 닿아서인지, 버즘나무보다 플라타너스가 더 정겹게 입에 붙었다. 유독 크고 너른 잎사귀들로 제 풍치를 우람하게 만드는 플라타너스. 공해에 강하고 빨리 자라며 그늘까지 넓어서 한때는 가로수 나무로 불릴 만큼 인기도 높았다. 그런 플라타너스 풍경으로 소문난 길은 영화 출연도 했건만, 어느새 많이 사라졌다. 알레르기 유발이나 꽃나무를 선호하는 정서에서도 밀렸지 싶다.

밀려난 플라타너스들은 어디서 푸른 머리를 적시고 있을까. 그런 그리움에 돌아보니 와중에도 남아 있는 플라타너스 우듬지가 민머리처럼 휑하다. 새 가지들이 삐죽삐죽 겨우 잎을 내미는 모양새다. 큰 잎사귀와 무성했던 가지들을 거의 다 쳐냈으니 나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꼴이 된 것이다. 그동안 지나친 가지치기에 대한 지적이 있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마구 잘라낸 결과다. 가로수가 상가 간판을 가리거나 알레르기를 유발한다는 민원에 따른 조치라면, 공원의 나무들은 왜 그리 심하게 쳐냈는지.

일부러 찾던 그늘이 좋은 길. 나무들 비명이 들리는 듯해 쳐다보고 싶지도 않고 지나가기도 편치 않다. 지친 걸음을 쉬고 책을 읽곤 하던 나무 그늘 아래 벤치마저 빼앗긴 셈이다. 도대체 가지치기의 기준은 어떻게 마련하고 행하는 것인지 의아하다. 가지치기로 흉해진 가로수 모습을 공원에서도 마주치니 불편하기 짝이 없다. 공원의 나무는 과실수나 관상용 정원수와는 역할이 다르지 않은가.

앙상해진 나무들이 그럼에도 새 잎을 열심히 펼쳐내고 있다. 잘린 팔을 힘껏 내어 뻗는 모습이 딱하다. 걷는 사람들은 땡볕 가려줄 푸른 그늘 빼앗긴 나무 밑을 얼른 지나간다. 그늘에 기대어 쉬던 걸음을 재우치며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갈수록 차가 늘면서 인도가 차도에 먹히는 것도 억울한데 가로수 그늘까지 앗기다니, 이건 시민의 행복권 침해라고 분개하는 마음도 커진다. 걷고 싶은 도시, 아름다운 도시의 길에는 가로수도 큰 역할을 하건만 너무 쉽게 쳐내기를 감행하니 말이다.

그늘의 힘이 나날이 크게 닿는 철이다. 그늘막 설치도 좋은 배려지만 가로수 그늘 키우기가 더 절실하다. 알다시피 나무는 이산화탄소 흡수에 따른 공기 청소는 물론 대기 온도 낮추는 큰일을 말없이 수행한다. 내년에도 흉해진 가로수를 보지 않으려면 가지치기의 기준과 비율을 정해야 할 것이다. 올해 애써 자란 나뭇가지들이 내년 여름에는 푸른 그늘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정수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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