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은 바람이 참 많이 분다. 그 바람에 산등성이 나무들까지 세차게 흔들리지만, 그럴수록 나무는 뿌리를 깊고 튼튼하게 내릴 것이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땅속은 고요하다. 그런데 대관령이라서 바람이 많은 걸까? 아니면 대관령에 내려오고 나니까 그 많던 바람이 비로소 보이는 걸까? 바람이 보인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는다. 저 흔들리는 나무는 제가 제 몸을 흔드나요, 아니면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나요? 스승이 말한다. 흔들리는 건 나무도 바람도 아니고 네 마음이란다. 무슨 말인가 했었다. 지금도 제대로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없지만, 아마 저런 뜻이었는가 보다.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하고 또 정신없이 하루를 끝내는 걸 매일같이 되풀이하면서 묻는 사람도 없는데 손사래 쳐대며 ‘시간이 없어서’를 외쳐대는 수선을 떨며 살았다. 어제가 소화도 되지 않았는데 내일을 준비하고 내일 해도 될 일마저 당기다 보니 시간이 없다고 해야 할까? 아니, 본디부터 시간은 없지도 있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시간이 없다고 외쳐대며 그게 성실한 삶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이제 보니 바람도 다 같은 게 아니다. 살랑살랑 가지를 흔들며 나뭇가지와 어울려 노는 바람, 나무에 화가 난 듯 거세게 밀어붙이는 바람, 세상 전부를 뒤흔들어 엎어버릴 듯한 바람.... 도시라고 바람이 없으랴. 건물도 바람이 불면 받아 흔들려야 한다. 흔들리지 않도록 만들면 부러지고 만다.
나무들 사이에 빈터가 임자 없는 땅이려니 했더니, 인제 보니 민들레 자리였다. 그 옆은 또 애기똥풀, 얼레지, 소리쟁이 자리다. 정의(正義, rightness)에 관한 정의(定義, definition) 중에 ‘저마다 저마다의 몫을’이란 게 있다. 그러고 보니 참 그럴듯하다. 그런데 저 정의가 내려지던 시대를 놓고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귀족은 귀족의 몫을 누리고 종은 종의 몫으로 만족하라는 말일 테니까. 아니, 그것도 말이 될까? 저 민들레 자리가 내년에도 민들레 몫일까? 바람이 민들레 홀씨를 날려 데려다준 곳이 민들레 몫이 된다. 하필 그게 아스팔트 위라면 민들레 몫이 되지 못하고 말겠지만, 그렇다고 바람을 탓해야 할까.
세상을 내가 산다고 생각했다. 늘 모자란 건 내 탓보다 세상 탓이려니 했다. 모자라다 느낄수록 시간이 더 모자라고 할 일은 늘어만 갔다. 아마 그러다 정년을 맞거나 질환의 고통들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바람과 놀고 민들레와 어울릴 수 있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부쩍 따스해진 햇볕이 소나무에 비치고, 바람이 살랑살랑 가지를 흔드는데, 그걸 보는 이 순간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는다. 벤야민의 아우라. 그래, 오늘은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 이 순간을 잘 살아보자.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독교육복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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