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란 ‘작은 배들을 한 줄로 띄워놓고 그 위에 널판을 건너질러 깐 다리’ 또는 ‘교각(橋脚:기둥)을 세우지 않고 널조각을 이어놓은 다리’를 말한다.
정식으로 다리를 만들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때 급하게 배들을 이어 세워 다리 구실을 하게 만들거나, 물길이나 갯골이 그다지 넓지 않을 때 널조각 등으로 이를 대신하는 것이다.
1795년 정조 임금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에 참배하러 갈 때 한강에서 상인들의 배를 이어 임시 다리 역할을 하게 했는데, 이런 것이 바로 배다리이다. 또 1872년 조선 정부가 만든 「군현(郡縣)지도」를 보면 지금의 인천 연수구 선학동과 남동구 남촌동 사이쯤으로 길게 흘러들어오는 갯골의 끝에 ‘주교(舟橋)’, 곧 배다리가 놓여있다는 표시가 나온다.
따라서 배다리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고, 우리나라 여기저기에 이 이름을 가진 곳들이 있다. 이중 지금 인천의 배다리에서는 1900년대가 시작되기 이전에 다리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리와 갯골이 모두 없어졌어도 그 이름은 여전히 남아 추억의 더께를 더하고 있다.
이곳 배다리 일대에는 경인철도 기공식(起工式:1897년) 자리, 개교한 지 100년이 훌쩍 넘은 영화학교와 창영초등학교 등 많은 역사 유적이 모여 있다. 하지만 이곳은 무엇보다 헌책방 골목으로 유명했다. 나이 쉰을 넘긴 인천 토박이라면 50여 곳의 헌책방이 모여 있던 1970~80년대의 이곳 모습을 아련히 기억할 것이다. 지금은 그때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쪼그라들었지만 그래도 1973년에 문을 연 「아벨서점」을 비롯해 10여 곳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이 주변에서 ‘숭인 지하차도’ 착공식이 열렸다.
주민들의 반발로 10년이 훨씬 넘도록 시작도 못 했던 사업이 탈출구를 찾은 것이다. 배다리를 지나는 이 지하차도는 중구 신흥동~동구 송현동을 잇는 산업도로의 일부다. 주민들은 이 도로가 배다리의 역사 유적과 문화적 분위기를 해치고, 생활환경에도 큰 피해를 줄 것이라며 반대해 왔다. 그러다가 3t 이상 화물차 통행금지, 지하차도 위에 문화센터와 공원 건설 등 여러 조건에 합의해 공사를 하게 됐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인천시와 주민들은 그동안 수십여 차례의 협상 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번거롭더라도 이렇게 서로를 설득하고 타협해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이다. 민주주의는 결과보다 과정과 절차에 있는 것 아닌가. 100% 만족하지는 못 해도 합의를 지키는 자세. 이번 배다리의 사례가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갈등에 좋은 본보기가 되길 바란다.
최재용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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