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 안산 최용신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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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용신기념관은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가 최용신(1909~1935)의 삶과 업적을 알리기 위해 2007년 안산시 상록구에 건립됐다. 최용신기념관 전경. 윤원규기자

그윽한 매화 향기가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시절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남긴 향기는 매향보다 더 멀리 퍼진다. 안산시 상록구는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자는 뜻에서 2002년 11월 1일에 붙여졌다. 안산시에는 소설 <상록수>의 모델인 최용신의 정신을 기리는 공간이 많다. 상록청소년수련관, 상록수체육관, 상록초등학교, 상록중학교처럼 최용신의 정신이 도시 곳곳에 스며 있다. 4호선 상록수역에서 ‘최용신기념관’까지 이어지는 길은 ‘최용신거리’이다. ‘최용신 이야기 속을 거닐다’란 표지처럼 거리에 세워진 조형물에도 최용신의 삶과 정신이 담겨 있다. 최용신이 아이들과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만남)을 비롯해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끎)과 아이들이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향함), 달려오는 아이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안김)까지 최용신 이야기를 친절하게 들려준다. ‘만남’과 ‘이끎’과 ‘향함’과 ‘안김’이라는 쉽고 친숙한 표현으로 짐작하듯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물씬 느껴진다.

 

■손을 잡고 달려가자! 농촌으로, 여성과 아이들 곁으로

상록수공원에 자리 잡은 안산시 최용신기념관(관장 윤화섭)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기념관 주변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산책하는 시민들의 표정이 여유롭다. 산책로를 따라 곳곳에 기념비가 서 있다. 최용신의 어록을 새긴 비와 <상록수>를 통해 최용신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심훈의 문학기념비, <최용신 양의 소전>을 지은 유달영 교수 등이 세운 ‘최용신양을 기리는 돌’을 지나 잠시 걸으면 최용신이 잠들어 있는 무덤이 나타난다. 최용신 무덤 곁에 약혼자였던 김학준 교수의 무덤도 있다.

최용신기념관은 1종 전문박물관이자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는 현충시설이다. 조규택 학예연구사와 윤필상 학예연구원의 안내로 기념관을 둘러보고 두 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최용신의 불꽃 같은 생애에 빠져든다. 1909년 8월 원산과 가까운 함경도 덕원에서 태어나 교육자 가정에서 자란 최용신은 기독교 사학인 원산 루씨여고에 입학한다. 루씨여고는 3·1 만세운동과 농촌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한 민족학교였다. 최용신은 4년 동안 점심을 끊었다고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으나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전시실은 최용신의 학창시절부터 보여준다. 원산 루씨여학교에 재학할 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비롯해 1911년에 펴낸 순 한글로 된 <구약전서>,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갓을 쓴 인물 삽화가 들어 있는 <천로역정> 같은 희귀한 책도 볼 수 있다. “최용신의 손때가 묻은 일기라든가 졸업장 같은 1차 유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관련 자료를 꾸준히 수집하여 최용신의 일대기를 그려볼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관계자의 말처럼 아쉬움은 있지만 최용신의 생애를 전달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농촌운동에 뜻을 두었던 최용신의 사진과 발언이 실린 1928년 4월 1일 자 조선일보의 기사가 눈길을 끈다. “새봄 맞아 교문 나서는 재원들-원산루씨학교의 특출한 네 규수”라는 제목을 기사에서 최용신은 이렇게 주장한다. “농촌 여성의 향상은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들의 책임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중등교육을 받고 나아가는 우리는 화려한 도시의 생활만 동경하고 안락한 처지만 꿈꾸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하려는가? 거듭 말하오니 우리는 농촌으로 달려가자! 손을 잡고 달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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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최용신의 삶과 정신을 영원히 기억하는 주제로 전시물을 만날 수 있는 상설전시실 모습. /3. 안산시 상록구 최용신 거리 곳곳에는 선생과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4. 어린이들이 다양한 서적을 읽고, 만들기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어린이 체험전시실/ 5. 자신이 활동하던 샘골강습소가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기념관 옆에서 만날 수 있는 최용신선생의 무덤. 윤원규기자

■안산에 뿌린 최용신 정신

1929년 서울에 있는 감리교협성신학교로 진학한 최용신은 정인보, 정경옥 같은 교수들에게 역사와 사회학과 신학을 배웠다. 마침 교장 채핀 부인이 농촌 문제에 관심이 많아 학교에 여성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한 ‘농촌사업지도교육과’를 개설하는데 황애덕 교수에게 그 일을 맡겼다. 황애덕은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군자금을 송금하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던 독립지사로 최용신의 은사였다. 황애덕은 방학이 되면 학생을 둘씩 짝을 지워 농촌으로 파송해 계몽운동에 참여시켰다. 그해 여름방학에 최용신은 김노득과 함께 황해도 수안에서 석 달을 지내며 농촌봉사활동을 벌였다. 3·1운동 이후 청년들은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일제의 수탈에 신음하는 농촌에서 야학을 열고 아동과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환경을 개선하는 활동을 벌여나갔다.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의 식량 수탈로 농민들의 생활환경이 매우 어려워졌다. 이때 문맹퇴치 운동과 브나로드(Vnarod: '민중 속으로')운동이 벌어졌다. 이 운동에 기독교청년회와 사립학교와 3·1운동으로 창간된 조선·동아·조선중앙 세 신문사가 앞장섰다. 1931년 10월, 최용신은 YWCA 농촌지도원 자격으로 반월면 천곡에 첫발을 디딘다. 당시 사진을 통해 최용신이 샘골교회당을 빌려 아동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열었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최용신과 뜻을 같이했던 스승 황애덕, 어려울 때마다 도움을 준 신간회 수원지회 감사를 지낸 염석주, 강습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최용신의 말을 듣고 1천 평의 땅을 기증한 박용덕 등의 얼굴도 확인할 수 있다. 1933년 1월 15일 샘골강습소 낙성식 기념사진 속에는 최용신과 도움을 준 이웃들과 교사들, 야무진 아이들의 표정에도 자신감과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다. 이 강습소에서 최용신 선생에게 배운 제자 홍석필은 2004년 최용신기념관 건립을 위해 1억5천만원을 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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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용신 선생을 모티브로 삼은 여주인공 채영신이 등장한 심훈의 소설 상록수(1935)를 기려 상록수역의 이름이 지어졌다. 최용신 선생의 흉상

■한 알의 씨앗이 썩어 푸른 숲을 만들다

1934년 3월, 최용신은 학원 운영을 후임 교사에게 맡기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진학했다. 유학 생활 중에 찍은 단체 사진 속에서 최용신의 얼굴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학업을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각기병에 걸려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귀국길에 오른다. 요양을 위해 고향으로 향하려던 최용신은 발길을 샘골로 돌린다. 샘골 주민들이 누워 있기만 해도 좋으니 꼭 샘골로 돌아와 달라고 간청했던 까닭이다. 수원도립병원에서 두 번 수술하고 입원해 있을 때 샘골 사람들의 병문안이 줄을 이었다. 한겨울에 어린 학생들까지 50리 길을 걸어서 문병하며 선생님의 쾌유를 빌었다. 그러나 1935년 12월 23일 자정 ‘샘골, 샘골’을 되뇌던 최용신은 끝내 숨을 거두었다. 이때 몽양 여운형 선생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에서 농촌운동에 헌신하다 요절한 최용신을 주목한다. 1935년 1월 27일 자 조선중앙일보는 ‘수원군하의 선각자 무산아동의 자모 최용신 양 별세’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낸다. 이어 ‘썩은 한 개의 밀알, 브나로드의 선각자 고 최용신양의 일생’이란 특집 기사를 3월 2일부터 4일까지 3회 연재하였다. 이 기사를 읽고 최용신의 생애에 감동한 심훈은 이를 소설로 다듬어 1935년 동아일보사의 ‘창간15주년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되었는데,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최용신의 유언장, 특집 기사, 3월에 거행된 천곡강습소 제2회 졸업식 기념사진은 최용신의 부재의 아픔을 말없이 들려주고 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이 실존 인물 최용신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을 밝힌 사람이 있다. 바로 김교신(1901~1945)과 유달영이다. 수원고농에 재학할 때 최용신을 후원했던 류달영이 스승 김교신의 도움을 받아 <최용신 소전>를 펴낸다. 이 책을 통해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은 실존 인물 최용신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두 책을 바탕으로 영화 <상록수>가 두 차례나 만들어졌다. 신상옥 감독과 임권택 감독이다. 60년 된 영화 ‘상록수’ 포스터를 통해 최용신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기념관 관계자와의 대화에서 최용신의 정신이 부활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안산은 한국의 대표적인 다문화 도시입니다. 약자를 향한 최용신 선생의 정신과 우리 안산시의 특성을 결합하는 일입니다. 시민교육을 통해 안산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 선생의 뜻을 계승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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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골강습소 자리에 지어진 기념관은 지상에 체험학습실이 마련돼 있다. 체험학습실 모습. 윤원규기자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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