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재상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인물 중의 한명이 방촌(〈5396〉村) 황희(黃喜, 1363~1452)다. 90세로 장수한 황희는 56년 관직 생활 동안 24년간 재상직을 맡았고 그 가운데 18년 동안 줄곧 영의정 자리를 지키면서 태종·세종대를 거치면서 새 왕조의 기틀을 다진 명재상으로 평가받는다.
사실 황희는 고려의 신하였다. 1389년 문과에 합격해 이듬해 성균관학관이 됐지만, 1392년 고려가 망하자 70여명의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에 은둔 생활을 했다.
황희는 평소에 담소하는 일이 적었고, 희노애락을 잘 드러내지 않은 성격이었다. 일을 처리할 때는 큰 원칙을 중요시했고 자질구레한 것은 묻지 않아 대범하고 정확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숙종대 학자 미수 허목은 “황희 정승이야말로 훌륭한 정승으로서, 이름이 백대 뒤에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평했다.
세종대 3정승이라면 황희와 허조, 맹사성을 꼽는다. 이들 중 황희와 허조는 모두 고려의 유신으로 두 왕조를 섬겼다 하여 당시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공신들의 위세가 드높았던 시기에 조선왕조를 거부한 이력이 있었던 황희가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데는 태종과 한 이불을 덮고 잘 정도로 친한 박석명의 추천이 결정적이었다. 그런 황희도 세자인 양녕대군의 폐위를 반대했다가 태종의 미움을 사서 교하(지금의 파주)에 유배되기도 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태종은 황희를 꼭 천거해 쓰라고 당부했다. 아무리 부왕인 태종이 추천했다고 해도 세종 입장에서 자신의 왕위계승을 반대한 황희를 신임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황희가 세종의 신임을 받게 된 사건이 있었다. 1423년 강원도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세종은 관찰사로 황희를 파견했고 이를 해결하면서 세종의 큰 신임을 받았다. 세종은 항상 황희가 식견과 도량이 크고 깊어서 큰일을 잘 판단한다고 칭찬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반대한 신하도 신임한 세종의 리더십이 그립다.
정성희 실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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