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 추상적… 면책 요건도 없어, 중소기업엔 치명적 존폐위기 우려 대기업도 현장 안전사고 통제 한계... “처벌 위한 법 경영위축” 업계 반발
#지난달 1일 안양시의 한 전기·통신관로 매설 현장에서 작업자 3명이 중장비 기계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2일에는 서울의 한 아파트 8층에서 창틀 교체 작업을 하던 근로자 2명이 추락해 숨졌다.
두 사고 모두 최근 산업 현장에서 발생한 중대산업재해다. 현행법대로라면 현장 책임자 등은 형법과 산업안전보건법 등에 따라 집행유예 및 벌금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크다. 또 사업주도 안전보건조치 준수 여부에 따라 벌금형을 받을 수 있지만, 위반행위자는 아니어서 형사 처벌은 피할 확률이 높다.
만약 이 같은 사고가 오는 27일 이후에 발생했다고 가정해 보자. 현장 책임자 등에 대한 처벌은 같지만,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는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면서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이 10여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산업 현장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현장에서는 규정이 모호하고, 면책 요건이 없어 기업의 경영 위축 등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0일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오는 27일 시행되는 중대재해처벌법은 산업현장에서 노동자가 사망하거나 다칠 경우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내용이 주요 골자다.
그러나 산업계는 이 같은 법 시행을 앞두고 반발하고 있다. 법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한데, 법령이 막연하고 추상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자칫 사법당국의 판단에 따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고무줄 잣대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처벌에 대한 예측이 불가하고, 판례가 쌓이면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중견ㆍ중소기업들은 비용 부담도 큰 고충이다. 안전관리를 담당할 직원을 채용하고, 전담 조직도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기업도 부담이 되긴 마찬가지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원청이 협력사에 대해서도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이에 안전체계 프로그램 등을 구축하고 있지만 전국에 수십, 수백개의 현장이 있다 보니 현실적으로 사업주나 경영책임자가 안전사고를 통제하는 데는 한계가 따른다.
더욱이 안전 및 보건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도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 대한 면책 규정이 없어 사업주가 회사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중소기업은 존폐위기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이를 대비해 중견기업은 오너 경영인들이 법적 책임이 따르는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고 있으며, 대기업은 각자 대표 체제를 통해 최고안전보건책임자 등의 자리를 만들어 책임지는 방식으로 조직을 재편중이다.
김동환 노무그룹 지노 노무사(건협 경기도회 자문위원)는 “법 취지가 중대재해를 예방하는 것인데 관리 목적보다는 처벌하기 위한 법으로 인식돼 기업의 반감이 큰 상황”이라며 “특히 사업주가 의무를 다해도 면책 조항이 없다 보니 기업의 경영 위축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산업현장 혼란 법령 모호해 ‘고무줄 잣대’ 위험… 악법 전락 우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일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여전히 파열음이 지속되고 있다. 중대재해는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의 의도와 무관하게도 발생하지만, 사고 시 어떤 노력을 했더라도 처벌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경영책임자 등의 불만이 끊이지 않고 있어서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정부가 제시하는 경영책임자의 안전 확보의무 등이 포괄적이고 불분명해 경영책임자의 의무가 무한대로 확장될 소지가 크다는 것도 업계의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이에 업계는 중대재해를 근원적으로 예방하겠다는 입법 취지에 대해서는 동감하면서도, 법안이 처벌에만 치중돼 안전 관리를 저해하는 악법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개인 부주의도 경영책임자 탓…안전 우선시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 마련해야
중대재해가 개인의 부주의 등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는 데도 책임을 모두 경영책임자에게 떠넘기는 것이 업계의 가장 큰 불만이다. 안전을 우선시할 수 있는 제도적인 기반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이들의 목소리다.
10일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중기중앙회가 500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한 ‘중대재해법 및 산업안전 관련 중소기업 의견 조사(2021년)’에서 산재사고가 발생하는 주된 원인으로는 ‘근로자의 부주의 등 지침 미준수’가 75.6%로 가장 많았다. 이어 ‘작업 매뉴얼 부재’(9.0%), ‘전문 관리인력 부족’(8.2%) 등이 뒤를 이었고 ‘대표(경영책임자)의 인식 부족’은 1.2%에 불과했다. 정작 사업주의 안전 불감증으로 인해 발생하는 재해는 극히 소수인 셈이다.
아울러 안전보건 관리 과정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지침 불이행 등 근로자 작업 통제ㆍ관리’가 42.8%로 가장 높았으며, ‘잦은 이직에 따른 근로자의 업무 숙련도 부족’(21.6%), ‘법규상 안전의무사항 숙지의 어려움’(15.4%), ‘안전관리 비용 부담 심화’(12.4%)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이런 가운데 건설업계는 또 다른 안전사고의 원인으로 우리나라 특유의 짧은 공사기간과 예산 문제를 꼽았다. 공사기간이 길어지면 인건비 등 추가 비용으로 직결되지만,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하고 공사비를 추가적으로 지급하려는 발주자는 없다는 것이다. 중대재해를 줄이려면 공사비 절감이나 공기 단축보다 ‘안전’을 우선할 수 있다는 제도적인 기반이 갖춰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수원의 A 건설업체 대표는 “안전에 위해가 있어 공사가 지연되더라도 발주자가 추가 공사비를 지급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면서 “이런 부담 탓에 소규모 업체들은 작업장에서 위험 요인이 발견되더라도 작업을 멈추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가이드라인 배포했지만…‘혼란 가중’
애매모호한 정부의 중대재해처벌법 가이드라인도 문제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지난해 초 제정되면서부터 많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경영책임자의 관리범위를 벗어난 부분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부과하고, 어느 범위까지 의무를 이행해야 법 준수로 인정되는지가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설업계는 꾸준히 이 같은 내용에 대한 보완입법을 요구해 왔지만, 입법 과정에선 크게 반영되지 않았다.
법 자체가 모호하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정부는 지난해 11월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기업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대재해처벌법의 중대산업재해 관련 해설서’를 배포했지만, 업계의 혼란은 여전하다.
일례로 중대재해처벌법에서 사업주나 법인 또는 기관이 제3자에게 도급, 용역, 위탁 등을 행한 경우 제3자의 종사자에게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원청의 경영책임자가 해당 사업장을 관리하고 있는 경우 하청의 경영책임자는 중대재해처벌법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지, 하청을 받은 사업자가 재하청을 줬을 경우에는 책임범위가 어떻게 구분되는지 모호하다.
이외에도 안전ㆍ보건 관계 법령이 구체적이지 않아 기업이 어떤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지 등 명확한 제시가 없어 차후 법의 해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포괄적인 조항이 많다.
■경기도, “아직 관련계획 수립 못해”
경기도는 법령 시행일이 10일 가량 밖에 남지않은 최근까지 ‘중대재해 예방 기본계획’ 수립에 나서는 모습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의 법령 자체가 모호한 만큼 계획 수립에 있어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도는 지난달 16일 ‘중대재해 예방 추진사항 점검 회의’를 통해 노동국 중대산업재해 예방 TF에서 소속 사업장별 유해 위험요인에 대한 기초조사를 실시하고 중대산업재해 예방 기본계획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또 필요한 조직과 인력도 확충하기로 했다.
당초 회의에서는 이달 초까지 기본계획과 종합대책을 수립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경기도 관계자는 “관련 계획은 내부적으로 수립하는 중이며,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전까지 확정해서 시ㆍ군과 기업에 안내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의 뿌리, 영국의 ‘기업과실치사법’
중대재해처벌법은 어느 국가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내용의 법안이다.
우선 영국의 기업과실치사법은 국내 중대재해처벌법과 취지는 같으나, 단체의 과실 유무에 대한 형사책임을 부과하며 추가적인 손해배상이나 도급인과 수급인의 의무를 동일시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반면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의 처벌 규정으로 사망사고의 경우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징역과 벌금을 병과할 수도 있다. 경영책임자 등 개인에 대한 처벌은 규정하지 않는 영국의 기업과실치사법과는 다른 부분이다.
또 중대재해처벌법은 보호 대상의 사망 또는 상해에 대해 개인과 법인을 동시에 처벌하고 있지만 영국의 ‘기업과실치사법’은 사망사고에 한정해 법인에 대한 처벌만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더욱이 영국의 기업과실처벌법도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기업과실치사법 도입 이후 영국 건설업계의 10만명당 사망비율은 2008년 2.04에서 2017년 1.60으로 연평균 3.3%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법률이 제정되기 전인 1998년부터 2007년까지는 연평균 2.6% 감소한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재해예방기준은 선진국을 크게 밑도는 반면, 제재는 선진국의 수준을 훨씬 크게 넘어선다”며 “산업안전보건수준이 낮은 이유를 찾아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제재 수준 강화에만 집중된 법 제정과 같은 접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진단했다. 이어 “이런 방식은 중대재해 감소에 기여하는 순기능은 하지 못하고, 중소기업 등 사회적으로 취약한 자에게 과잉처벌이 집중되는 역기능이 더 클 것”이라고 강조했다.
홍완식ㆍ한수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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