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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크리에이터] 아버지에게 권하고 싶은 약주…‘임금 누룩’으로 빚은 꽃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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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크리에이터] 아버지에게 권하고 싶은 약주…‘임금 누룩’으로 빚은 꽃막걸리

▲동두천 왕방산에 위치한 한통술의 김용완 대표는 3대째 가업을 이어 조선시대 선조들이 빚었던 약주를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
▲동두천 왕방산에 위치한 한통술의 김용완 대표는 3대째 가업을 이어 조선시대 선조들이 빚었던 약주를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

 기자의 아버지는 술 중에 유독 막걸리를 좋아하신다. 곡식으로 빚어 건강하고 값싸다는 게 이유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마라”는 어머니의 걱정은 아랑곳 않고, 한 잔 한 잔 드실 때마다 “어, 좋다”를 후렴구처럼 되뇌시며 “이건 약주니 괜찮다”고 농담하신다.

애주가 아버지의 흰소리 섞인 술 예찬 같지만 그 말도 틀리지 않은 것이, 과거 조상들이 빚은 우리 전통주는 약재를 넣어 약주라 불리기도 했다. 다만 아버지가 사 드신 평막걸리, 막걸리 등 요즘 집 앞 마트에 깔린 막걸리들이 약주라 할 수 없을 뿐이다. 시중에 판매되는 막걸리 대부분 일본식 공정으로 발효한 결과물로 우리 선조가 마셨던 술의 제조 방식과 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아버지도 알고 계시지만 마음 편히 마시기 위한 핑곗거리가 필요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왕 마실 거면 제대로 된 전통주를 드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귀가 쫑긋할 만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3대째 가업을 이어 조선시대 선조들이 빚었던 약주를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는 장인이 있다고. 바로 한통술 김용완 대표(68). 전통방식으로 만든 막걸리가 궁금했던 터라 여지없이 바로 달려갔다.

 

세 차례의 담금과 100일의 숙성

▲지난 22일 찾아간 한통술 양조장에는 고두밥을 식혀 밑술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지난 2일 찾아간 한통술 양조장에는 고두밥을 식혀 밑술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한통술은 동두천시 왕방산 깊은 산골 마을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다. 지난 2일 이른 아침 수원에서 차로 2시간 30분 달려 도착한 한통술 양조장에는 고소한 고두밥 냄새가 가득했다. 포천에서 자란 기찬쌀과 왕방산의 맑은 물로 짓은 고두밥을 식혀 밑술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범상치 않은 기백이 느껴지는 한 어르신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1922년 경남 지역 최초로 마산대동양조장을 설립한 할머니의 뒤를 이어 평생을 전통술과 함께 해 온 김 대표다. 어려서부터 직접 누룩을 띄우고 정성껏 술을 빚던 할머니를 지켜본 덕에 그는 자연스럽게 한국술의 가치를 이어오고 있다. 그의 손을 거치면 고문헌에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전통주가 되살아난다. 조상들은 다양한 약재와 약꽃으로 술을 즐겨 빚었는데, 특히 구절초와 연꽃을 넣어 애주·연화주로 불리던 전통주가 그의 손을 거쳐 한통의 구절초꽃술’,‘한통의 연꽃담은술로 새 생명을 얻었다.

▲발효실에 놓인 커다란 발효통에는 만병 분량의 막걸리가 익어가고 있다.
▲발효실에 놓인 커다란 발효통에는 만병 분량의 막걸리가 익어가고 있다.

한통술 꽃막걸리는 세 차례의 담금과 100일의 저온 숙성을 거쳐 느리게 탄생한 삼양주다. 전통주는 몇 차례 빚어 발효하느냐에 따라 단양주, 이양주, 삼양주로 구분한다. 고두밥과 누룩을 한 번에 발효시켜 일주일이면 완성되는 단양주는 대부분의 시중 막걸리이며, 삼양주는 밑술에 덧술을 두 차례 더 한 그야말로 명품술이다.

세 차례 빚은 술은 15~16도에서 발효시킨 뒤 영하 3도에서 100일 숙성한다. 발효실에 들어서자 탁주발효조라 적힌 커다란 발효통들 안에 만병 분량의 막걸리가 익어가고 있었다. 김 대표가 뚜껑을 열자 숙성 과정에서 나온 탄산이 보글보글 소리를 낸다. 김 대표는 술을 발효할 때 누룩 속 미생물들이 고두밥과 만나면 쌀의 전분을 분해해 알코올을 생성하고, 탄산이 발생한다. 탄산에는 여러 가지 유해 물질이 포함돼 있는데, 이를 장시간 숙성해 완전 발효를 거치면 탄산과 함께 유해균도 사라진다. 때문에 한통술 꽃막걸리는 마신 뒤에도 머리가 아프거나 숙취가 없이 속이 편안하다고 설명했다.

 

향온곡넣어 빚어낸 귀한 술

▲볏짚이 깔린 누룩장 칸칸마다 채워져 있는 '향온곡'.
▲볏짚이 깔린 누룩장 칸칸마다 채워져 있는 '향온곡'.

한통술의 꽃막걸리를 표현하는 또 다른 수식어는 임금의 술이다. 왕에게 진상하는 어주(御酒)를 만들 때 쓰는 특별한 누룩 향온곡으로 빚기 때문이다. 향온곡에는 알코올 해독 작용을 하는 녹두가 들어간다. 궁중에서 술 한잔조차 왕의 건강을 위해 온 정성을 다했듯, 한통술도 건강한 약주를 만들기 위해 정성을 쏟고 있는 것이다.

김 대표는 좋은 술을 빚는 첫걸음은 좋은 누룩을 확보하는 일이라며 서슴없이 누룩실을 공개했다. 문이 열리자 온기가 돈다. 좋은 누룩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따뜻한 온도가 필수라 항상 30도로 유지된다고 한다. 마음이 안락해지는 노란빛의 황토방에 볏짚이 깔린 누룩장 칸칸마다 향온곡이 빼곡하게 채워져있다. 한통술의 자부심이다.

이제껏 한 번도 누룩을 본 적이 없는 기자는 막연히 메주처럼 생기고 퀴퀴한 냄새가 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녹두와 보리, 밀로 만든 향온곡은 마치 지점토를 둥글게 뭉쳐놓은 듯 하얗고 단단했으며, 어떤 향도 나지 않았다. 김 대표는 발효를 시작하면 향이 나기 시작하는데, 은은한 꽃향이 나지 메주처럼 고약한 향이 나지는 않는다고 했다.

 

향기로운 왕의 술’...고급스러운 맛

▲각종 약재와 약꽃, 향온곡 등으로 빚어진 막걸리 '한통의 구절초꽃술’과 ‘한통의 연꽃담은술'.
▲각종 약재와 약꽃, 향온곡 등으로 빚어진 막걸리 '한통의 구절초꽃술’과 ‘한통의 연꽃담은술'.

누룩실을 나오니 김 대표가 맛보라며 한통의 구절초꽃술한통의 연꽃담은술을 내온다. 디자인도 일반 막걸리처럼 촌스럽지 않고 세련되고 예쁘다. 임금 누룩으로 빚은 약주라니 궁금해서 안 마시고 버틸 재간이 없었다.

알코올 도수는 8, 11도 두 종류며, 기자는 8도짜리를 마셔봤다. 분명 쌀로 만든 술인데, 각종 약재··향온곡이 들어가서인지 시중의 막걸리처럼 시큼털털한 향과 맛은 희미하게 가려져 있었다.

특히 한통의 구절초꽃술이 입에 찰싹 달라붙는다. 구절초꽃은 쑥과의 일종으로 몸을 따뜻하게 하는 효능이 있어 반가의 여인들이 마셨던 약주라고 한다. 패션으로 치면 한복 위에 걸친 두루마기처럼 고급스럽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꽃향기가 어우러지면서 내는 풍미가 일품이다. 한 모금 머금으면 혀끝에 살짝 감도는 단맛과 함께 알싸한 향이 입안에 확 퍼진다. 15천 원이 아깝지 않은 맛이다.

막걸리에 거부감이 있거나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도 거부감 없이 마실 수 있도록 부드럽게 넘어간다. 목을 넘어간 후에도 묵직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입안에 계속 머물며 여운을 남긴다. 섬세함과 우아함을 동반한 고급스러움이 가히 왕의 술이라 불릴 만하다.

▲김용완 대표가 막걸리에 들어가는 각종 약재를 연잎에 담아 우려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김용완 대표가 막걸리에 들어가는 각종 약재를 연잎에 담아 우려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한통술은 공유 양조장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김 대표는 문하생 100명을 선발해 전통주 제조법을 가르치고, 하나의 공유 양조장에 각각의 공간을 만들어 특별한 술을 빚어내는 프로젝트를 시와 협업 중이다. 사람들에게 동두천 가면 100가지 전통주를 마셔볼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리게 하고 싶다고 밝혔다. 우리의 전통주를 계승하고 대중화 확산에 이바지하겠다는 김 대표의 다짐. 그리고 동두천을 상징하는 양조장이 되고자 하는 한통술의 여정이 기대된다.

김 대표와 얘기를 나누며 꽃막걸리를 음미하다 보니 문득 아버지가 생각난다. 이제 막걸리를 이라고 하는 아버지 말씀에 딴지 걸 마음은 없다. 시중의 값싼 막걸리라도 술 한 잔에 걱정도 좀 잊고, 미간 쭉 펴고 웃기도 하면 그게 약이겠지. 하지만 귀한 약재와 누룩으로 빚은 한통술 막걸리를 알게 된 이상 아버지에게 이 약주를 한잔 따라 드리고 싶어진다. 기자처럼 집안 어르신이 막걸리를 좋아하신다면 집에 들어가는 길에 좋은 약주 한 병 사 들고 가 효자·효녀 노릇 해보는 건 어떨까. ‘막걸리 한잔노래를 읊조리며!

·사진=황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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