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마 시절, 항상 곁에 있었던 존재 ‘만화’. 누구나 한 번쯤 만화에 얽힌 추억이 있을 것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던 어린 시절을 보낸 기자에게도 만화의 존재는 특별했다. 용돈 받으면 만화방에 다 갖다 바치고, 하라는 숙제는 안 하고 만화책 보다 들켜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한 기억, 수업 시간 선생님 몰래 책 사이에 끼워 보거나 책상 서랍 속에 숨겨 본 기억 등등. 혼날 각오를 하고 보던 만화였다.
그렇게 만화광이었던 꼬꼬마가 성인이 되고, 만화방 대신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본다.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했지만, 온갖 추억을 안겨준 만화는 사회적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지도,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아직도 많은 작가들이 ‘배고픈 직업’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작가들에게 기회와 희망을, 그리고 만화의 가치를 부상 시키고자 노력하는 로컬 크리에이터가 있어 찾아갔다. 작가들과 의기투합해 만화 관련 ‘굿즈’를 만들며 함께 고민하는 그를 만나 우리의 소중한 만화를 되돌아보고 더욱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져봤다.
■만화 천국 부천서 지역 작가 작품 빛내는 ‘아티즈굿즈’
“저 부천 롯데백화점 8층에 있어요!”
지난 10일 만화 마니아로써 기대를 안고 방문한 부천. 만화 천국인 이곳에서 로컬 크리에이터가 활동하고 있다는 장소는 다소 의아했다. 만화박물관, 만화영상진흥원도 아니고 백화점은 왜?
그가 알려준 곳에 도착하니 바로 이해됐다. 이곳은 부천시가 롯데백화점 중동점과 함께 조성한 창의문화공간 ‘안마당집’으로, 창작자들이 지역 기반 문화콘텐츠 작품을 전시 및 판매할 수 있도록 마련한 공간이다. 만화 굿즈를 개발하는 크리에이터에겐 최적의 장소인 것. 자연스레 만화 작품이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영문으로 적힌 간판이 보인다. ‘아티즈굿즈’.
작은 매장에 들어서자 ‘아하~’하는 아는 작가들의 작품이 소소하게 보인다. 혹시 그중 어린 시절 엄마의 구박을 견뎌내며 볼 만큼 좋아했던 만화작품이 있을까 싶어 두리번거려보지만 안 보인다. 남녀노소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유명한 만화 캐릭터조차도 없다. 살짝 아쉬움이 든다. 둘러보는 사이 이 브랜드를 운영하는 로컬크리에이터 김경아(53) 대표가 다가와 묻는다. “아는 작품이 많이 없으시죠?” 그리곤 당연하다는 듯 웃는다. 김 대표는 “아티즈굿즈는 이미 유명해진 작품들보다는 대중한테 알릴 기회가 없어 묻혀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하고 원로작가들의 작품을 재조명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의 방향성이 확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만화 뿐만 아니라 사진, 민화도 있다. 해당 작품들은 김 대표의 손을 거쳐 패널교체형 LED무드등, 페이퍼 LED무드등, 아트 스마트톡 등의 굿즈로 변신해 있었다. 현업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관이나 박물관에서 벗어나 쉽게 일상에서 접할 수 있도록 제품화 된 것이다.
■예술을 입힌 ‘무드등’ 통해 소셜미션 수행하다
그런데 많고 많은 굿즈 중 왜 무드등 일까. 이 부분에서 김 대표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단순했던 만화그림이 빛이 더해지면 더욱 감성적인 예술작품이 되어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것. 특히 ‘패널교체형 LED무드등’은 다양한 작품으로 바꿔 낄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소비자는 더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취향에 맞게 여러 가지 구매할 수 있으며, 작가들은 작품 홍보와 수익을 배분 받을 수 있다.
창업전 IT 업계에 종사했던 그에게 무드등 굿즈는 자신이 가진 기술을 문화예술에 접목해 ‘소셜미션’을 수행할 수 있는 특화된 아이디어였다. 해당 굿즈는 2019년 한국관광공사 관광기념품 우수작,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문화상품으로 선정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먼저 수상작들을 살펴보면 <신미인도 공존>, <밤요정 베리>, <달빛동물원> 등이 눈길을 끈다. 신미인도 공존은 부천에서 활동중인 하영미 작가의 작품이다. 신윤복의 미인도를 각색해 그린 민화로, 색이 부드럽고 정서적이다. 명품 한복치마를 입고 있는 등 현세태를 반영한 요소가 재미있다.
밤요정 베리와 달빛동물원은 신지영 작가의 작품이다. 그림체가 예쁜 밤요정 베리는 보름달이 뜨는 밤 깜깜한 어둠을 두려워하는 아이한테 요정 베리가 나타나 무서움을 없애주는 내용이다. 이 무드등을 아이방 침대 옆에 두면 잠자는 동안 나쁜 꿈을 싹 물리쳐줄 것만 같다.
■고전 만화 덕후를 위한 ‘레트로’ 감성 굿즈
“그 옛날...그 만화...참 재미있었는데...” 보자마자 어린 시절 봤던 만화에 향수를 느낄, 중장년층들만 아는 추억의 고전 만화도 눈에 들어온다. 바로 박기정, 신문수 등 원로 만화가의 작품들이다.
우선 박기정 작가의 <희극왕 오동추>는 1962년 작으로, 시골뜨기 오동추가 서울로 상경 후 벌어지는 해프닝을 슬랩스틱 코미디식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그 시절 어린이들이 벌써 흰머리가 힛끗보이는 나이가 되었지만, 만화속 주인공 오동추는 무려 60년의 세월 동안 어린이들의 동심을 지켜주느라 여전히 익살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전쟁고아인 주인공 훈이의 역경을 그린 1961년작 <은하수>, 일제강점기 핍박받는 조선인들이 고난을 극복해나가는 1963년 작 <흰구름 검은구름>, <도전자> 등도 있다.
2003년 만화 우표로도 발행되었던 캐릭터들도 시선을 사로 잡는다. 신문수 작가의 <도깨비 감투>, <로봇 찌빠> 속 주인공들이다. 도깨비 감투는 주인공 혁이가 집 천장에서 도깨비 수염과 머리털을 뽑아 만든 감투를 발견하면서 생기는 모험을 다뤘다. 로봇 찌빠는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외로운 아이 팔팔이와 친구인 인공지능 로봇 찌빠의 희로애락을 담은 만화다.
한때 누군가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있던 캐릭터들이 스마트톡과 무드등을 통해 레트로 감성을 자아낸다. 바쁜 삶을 살다 보면 만화의 존재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낯익은 한 컷을 만나면 곧바로 만화와 얽힌 옛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날 터. 고전 만화 덕후라면 이 제품들을 보며 옛 감성에 흠뻑 빠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감동과 공감’을 주는 작품으로 예술 가치를 나누다
이 같은 작품들은 지금까지 김 대표가 23명의 작가들과 협업을 통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마침 기자가 방문한 날 김 대표는 부천지역 신경순(50) 작가와 새로운 굿즈에 대한 협업을 진행 중이었다.
이번 작품은 어떤 걸까. 제주도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스토리를 담은 ‘봇짐 파우치’라고 한다. 무드등이나 스마트톡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굿즈라 새롭다.
신경순 작가는 “보통 이런 굿즈를 만드시는 분들이 만화로 콜라보할 생각을 안 한다. 작가들이 제작비를 부담하면 모를까. 그런데 김경아 대표는 부천 작가들에게 굿즈 제작 기회를 주고 판매 및 수익 배분까지 책임져줘서 큰 힘이 된다”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김 대표는 만화가뿐만 아니라 부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진작가, 민화작가, 동화작가, 생활문화예술인(일반인) 등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작가들과 다양한 작품으로 협업할 계획이다. 실제 매장 한쪽에는 만화 작품 이외에도 다양한 작품을 페이퍼 LED무드등으로 만든 굿즈들이 있다. 화조도, 화접도, 연꽃, 사계 등 그림체가 화사해 색다른 느낌이 든다. 클라우드펀딩을 통해 책을 제작한 일반인의 작품도 있다.
아티즈굿즈 김경아 대표는 “저희 슬로건이 ‘감동과 공감’이다. 작품에 공감이 가고 작품성이 돋보이는 여러 분야의 작가들과 협업을 통해 예술의 힘을 믿고 그 가치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글·사진=황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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