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食口)는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들이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하얀 쌀밥에 기름진 찬을 먹을 때만이 아니다. 깔깔한 조밥에 목이 멜 때도, 심지어 땟거리가 없어 굶주릴 때도. 배고픔의 아픔까지 같이하여 먹는 것에서 비롯된 생명을 함께 나눈다. 가족이 피를 같이하는 혈연적 결속을 의미한다면 식구는 먹음의 본질 즉, 생명의 공유(公有)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필자는 혈통으로 고루한 가족보다 먹는다는 일상으로 하나 되는 식구를 더 선호한다.
예전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 라면 별식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라면이 요즘과 같이 저렴하고 흔한 정크 푸드(junk food)는 아니었다. 먹는 것이 귀했기에 기름에 튀겨진 면발 그리고 뼈를 우려낸 국물은 탁월했다. 대부분 라면은 절반만 끓였다. 그리고 다소 값이 헐한 국수를 반 정도 같이 넣었다. 이후 솥단지를 뒤집다시피 고소한 라면 면발을 한 가락이라도 더 먹으려는 전쟁이 벌어졌다.
반상(盤床)의 전쟁에 치열함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자식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부모의 애환이 서렸다. 유복하게 살아보고자 발버둥쳐 왔지만, 자식의 주린 배마저도 채워 주지 못하는 부모의 안쓰러움이 있었다. 라면을 탐하는 자식들의 아귀 찬 모습이 일견 기특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야속해 결국 드러나는 부모의 배려가 있었다. 다툼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난 라면이 싫다. 너희나 많이 먹어라”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국수 가락만 연신 찾았다. 그리고 일찍 철이 든 큰누이마저 부모 같은 배려를 따라 했다. 꼬불거리는 라면 가락은 단지 힘의 논리에 의해서 나누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가족 간의 배려로써 묘하게 나누어졌다.
면발을 다 건져 먹은 후 식은 밥을 말았다. 이 국밥은 여유가 있었는지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라면 가락을 더 차지하려는 다툼은 이렇듯 가족의 훈훈한 정에 의해 그 치열함이 완화됐고, 급기야 국밥에 의해 여유 있게 해소됐다. 그리하여 모두가 만족해하는 라면의 성찬(盛饌)이 종료될 수 있었다.
식구를 생각하며 떠올린 한 장면에서 진정 식구 됨을 반추한다. 서로 바쁘기에 밥상에 마주 앉기도 어려운 요즘 과연 식구란 어떤 의미일까. 예전에는 많지 않은 것, 때로는 배고픔까지도 함께 했던 생명 공유의 식구였다. 그러나 이제는 넉넉하게 있음에도 이를 일상적으로 함께 나누지 못하는 ‘식구 아닌 식구’는 아닐까. 필자는 변해가는 식구의 모습을 아쉬워하며 단 하나의 장면만은 반드시 지키고자 한다. 비록 매 끼니를 함께 할 수 없어도 이따금 나누는 그 밥상에서 생명 공유의 일치로서 먹는 모두의 입가에 흐뭇함은 늘 한결같기를 바랄 뿐이다.
이계존 수원여자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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