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에 나의 첫 시집 ‘질그릇과 옹기장이’와 이를 영어로 번역한 ‘Clayware and a Potter’가 출간됐다. 감사한 마음으로 책들을 보며 내가 가장 처음 글을 쓴 때가 언제였는지 떠올려 보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담임선생님께서 일기를 숙제로 내어 우리는 매일 일기를 써야 했다. 선생님께서는 40여명의 일기를 모두 읽어보시고는 잘 쓴 부분에는 빨간색으로 물결무늬의 밑줄을 쳐 주셨다. 며칠에 한 번은 잘 쓴 일기를 전체 학생 앞에서 발표하게 하셨다. 당시 우리 반에는 서울대학교 국어과 교수의 아들도 있었는데 그의 부모님은 그가 쓴 일기를 모아 그의 생일에 맞춰 ‘생일선물’이라는 책으로 발간해 준 일도 있었다.
내가 처음 일기를 쓸 때는 그날 일어난 일들을 시간대별로 기술하고 나서 잘 썼다고 혼자 자부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내 글에 대하여 조금 이상하다며 개선할 점을 지적해 주셨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날에 발생한 가장 중요한 일을 상세히 쓴 다음에, 그 사건에 대하여 네가 느낀 바를 써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글 쓰는 요령을 터득한 나는 일요일 아침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약수터에 올라갔던 일과 그때 느낀 바를 적었더니 한 페이지 전체에 빨간 물결무늬와 동그라미가 쳐진 일기장을 돌려받고 또 우리 반 아이들 앞에서 낭독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 선생님은 또 우리에게 동시도 써 보도록 시켰다. 방법이 의외로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떤 사물을 보고 쓸 때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 적지 말고 다른 눈으로 보고 쓰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기린의 목은 전기선대 고동색 얼룩진 전기선대(전봇대)”라는 동시를 적어냈고, 교실 뒤의 게시판에 한동안 붙여졌다.
학년이 바뀌고 5학년이 됐을 때 그 선생님의 동시집 ‘바닷가 게들’이 나왔다. 나는 그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의사가 돼 대학병원에 근무하기 시작하고서야 신문에 칼럼을 투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첫 동시를 쓴 지 오십여 년이 흘러 내 시집이 나온 것이다.
그때 내게 일기를 쓰라고 시킨 그 선생님이 어디 계신지 검색해 보았다. 내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 후 수련을 시작하던 해에 59세로 작고하신 것을 알게 됐다. 그의 동시선집을 주문했다. 1968년의 ‘바닷가 게들’과 1980년의 ‘장다리꽃밭’이 한 권에 묶여 있었다. 오십여 년 전에 읽었던 아름다운 동시들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평론가 이용희가 쓴 표지를 옮긴다.
“윤부현은 1957년 등단 이후 살아생전 꼭 30년간 창작활동을 하면서 두 권의 시집과 두 권의 동시집을 남겼다. 하지만, 시단이나 동시단 어디에서도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정당한 평가 한번 받아보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교직 생활을 하면서 고독한 마라토너처럼 시 쓰기와 동시 쓰기에만 충실했다.”
그의 묘지에 세워진 시비에 적힌 <달걀>을 소개한다.
“껄쭉껄쭉한 새 도화지 예쁘게 말아 논 그 안에는 푸른 바다가 하나 가득 출렁이고 있었다.”
황건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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