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여름에 겨울을 근심한다

나치에 저항했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한계상황’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한계상황 속에서 인간은 진정 겸손해야 하지만 적극적으로 ‘실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주변 상황에 대해 운명론적으로 체념하지 말고 실존적인 주체로서 그 상황을 똑바로 바라보고 최선을 다해 극복하라는 말이다. 실존주의자 ‘샤르트르’는 진정한 인간은 온갖 부조리에 맞서 ‘꿈틀거리는’ 존재라고도 규정했다.

실존을 극히 개인적인 개념으로만 볼 수도 있으나 실상 사회적 의미가 훨씬 더 큰 개념이다. 가령 수년 전의 촛불시위는 많은 민주시민이 연대한 실존의 사회화 혹은 사회적 실존이었다. 세계적인 감염병에 대항하기 위한 집단적 동력은 실존의 연대에서 점화된다. 생로병사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라면 각 개인, 각 사회 집단, 각 나라는 결국 주체적으로 이 상황에 대응해 나가야 한다.

우리 사회의 실존을 위협하는 것 중 하나가 특히 고령층 빈곤이다. 청년실업만큼이나 고령층 빈곤도 위험하다. ‘빈곤은 오직 상대적 박탈의 관점에서만 측정 가능하고 유효하다’라는 영국의 경제학자 ‘피터 타운젠드’의 지적은 아직 유통기한을 한참 남겨놓고 있다. 상대적 빈곤은 결국 공동체의 단결과 발전을 위협한다.

OECD 회원국 중에서 우리나라 빈부격차는 OECD 평균보다 꽤 높다. 중위소득의 50% 이하를 버는 빈곤율 역시 상대적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특히 65세 이상 노인층 빈곤율은 거의 50%에 근접하여 OECD 평균 12~13% 수준을 훨씬 상회한다. 우리나라 노인빈곤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수치이다.

문제는 노인빈곤을 해결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다. 요즘 말로 클리어 난이도가 극악이다. 비록 정부가 수년 전부터 퇴직연금 의무화와 연금관련 중소기업 재정지원 등 여러 가지 제도를 순차적으로 시행하고 있지만, 노후를 준비하지 않고 퇴직하는 노인인구는 오랫동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 1952년생부터 1984년생 중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을 모두 받지 못하는 비율이 50%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있다.

노인빈곤 해결을 위해 우리 사회 전체의 관심과 연대가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퇴직 연금과 관련해서는 독일의 리스터연금, 영국의 네스트, 뉴질랜드의 키위세이버 등의 변화추이도 참고해 볼만하다. 노인빈곤 감소를 위해서는 여러 전문가의 의견도 잘 들어야 하지만 정작 중요한 또 하나는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해 연금 또는 보험금 누수를 철저히 방어하는 일이다. 복지제도가 그 효과를 100% 발휘하기 위해서는 허투루 새는 돈이 없어야 하고 지급하지 말아야 할 곳에 절대 지급되지 말아야 한다. 복지예산이 계속 늘어난다면 예산이나 공공기금이 제대로 쓰이는지를 세밀히 들여다보고 도출된 문제를 개선하는 감시기구의 설립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각종 공영·민영보험을 막론하고 보험사기 등의 보험금 누수가 없도록 사회 전체의 면밀한 감시도 병행돼야 한다.

가난한 노인의 증가는 우리 사회의 재앙으로 돌아온다. 현명한 자는 날씨가 추울 때 봄에 뿌릴 씨앗을 헤아린다. 지혜로운 농부가 그렇듯 노후는 우선 스스로 준비돼야 하고, 정부 복지는 꼭 필요한 곳에 있어야 하며, 공공의 돈이 눈먼 곳에 쓰여서는 더더욱 안 된다. 여름만큼 겨울의 실존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성훈 손해보험협회 중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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