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의 기점으로 평가되고 있는 유럽의 68혁명은 계몽주의로부터 비롯된 서구의 근현대의 가치와 제도의 전복을 꿈꾸었다. 이것은 1968년 프랑스의 낭테르 대학에서 남학생의 여학생 기숙사 출입을 금지하는 규정 등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대학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계기가 되어 촉발되었다. 누적되어온 불만과 혁명의 에너지는 노동자와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파리를 마비시켰고, 유럽과 미국, 일본 등 전 세계로 번져나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인 신좌파 세력들의 결집이 그 원동력이 되었다.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운동,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마오이즘에 대한 경이, 체 게바라나 카스트로 등 남미 혁명세력과의 연합, 그리고 후기 구조주의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가들이 연대하였다. 변혁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상상력이 세계를 뒤흔든 것이다.
이들 중 레지스 드브레( Rgis Debray)라는 인물은 좀 독특하다. ‘알튀세의 전사’로서 볼리비아 정글로 들어가 체 게바라와 함께 게릴라전을 펼쳤던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매우 색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는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엘리트 학교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공산주의 서클의 열성 멤버로 활동하였다. 1963년 스물다섯의 나이에 사르트르가 주관하던 <현대>지에 카스트로주의에 대한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1968년 봄 볼리비아에서 무장투쟁 중 체포되어 30년 형을 구형받고 독방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교황 바오로 6세, 사르트르 등 명사들의 탄원으로 3년형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다. 후일 미테랑 대통령의 외교자문역을 지내는 등 정치 일선에서도 활동했지만 끝내는 이념과 사람과 역사와 정치에 대한 환멸에 떠밀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와 50대 중반 소로본느 대학에서 미디어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예술이 정치와 같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것으로 인식했고, 이미지가 상품으로서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지는 매혹적인 힘에 관심을 두고 미디어에 대해 깊이 탐구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지식인의 종말』, 『우리 주님들께 찬양을』 등 20여 권이 넘는 저서를 출간한 바 있다. 『지식인의 종말』에서 그는 오늘날 지식인들이 앓는 5가지 중병을 지적했다. 대중과 단절된 ‘집단 자폐증’, 변화하는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현실감 상실증’, 자신들이 사회의 도덕을 선도한다고 자만하는 ‘도덕적 자아도취증’, ‘만성적 예측불능증’, 그리고 설익은 견해를 유창한 언변으로 포장하는 ‘순간적 임기응변증’이 그것인데, 오늘 우리 지식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주님들께 찬양을』은 800여 쪽에 달하는 그의 자전적 에세이이다. ‘나는 공적인 삶과 정치가들을 혐오한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실패한 혁명가의 기록이고 변절한 혁명가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을 그토록 부끄러워했던 제3세계주의자가 경멸의 대상이었던 드골적인 프랑스주의자로 서서히 변모하는 과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호메이니나 가다피, 사담 후세인 등과 같은 ‘히틀러의 후예들’이 진보의 대의를 독점하는 것을 보면서 정치적 비관주의를 드러낸다. 그의 삶은 세기의 광기에 오래도록 매혹되어 있었으나 결국 환멸밖에는 챙기지 못한 수많은 불행한 영혼의 한 극적인 예로 볼 수 있다. 정치나 예술적 혁명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소산은 오래가지 못하거나 전혀 예기치 못한 과오일 수도 있다. 특히나 그것이 지독한 이데올로기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일 경우 큰 폐해를 남길 수밖에 없다. 그가 꿈꾸던 진정한 혁명은 무엇일까.
김찬동 수원시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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