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시대 소의 피는 매우 신성시되었다. 제후들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 조약을 맺을 때 소의 피를 함께 나누어 마셨을 정도다. 그뿐만 아니라 종을 제작할 때 마지막 의식이 종에 소의 피를 바르는 것이었다. 그것을 ‘흔종(鍾)’이라 했다.
제나라 선왕(宣王) 때의 일이다. 임금이 거동하는데 한 사람이 소를 끌고 가고 있었다. 임금이 유심히 보니 소가 울고 있지 않은가, 임금이 물었다. “왜? 저 소가 눈물을 흘리느냐?” 그러자 신하가 대답했다. “저 소는 흔종을 위해 끌려가는 것인데 그것을 소가 알고 우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임금은 소를 놓아주라고 명한다. 그리고 소 대신 양으로 흔종의 의식을 치르라고 했다. 이것을 ‘이양역지(以羊易之)’라고 하여 맹자에 등장하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임금의 눈에 우는 소(牛)는 보이지만 그 대신 죽을 양(羊)의 희생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취해진 것이다. 말하자면 임금과 울고 있는 소의 ‘관계’이다. 이 ‘관계’ 때문에 죽고 사는 엄청난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신하가 임금에게 ‘소’는 불쌍하고 양은 왜 그렇지 않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임금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를 지적한 것이다.
이처럼 어떤 관계에 서느냐가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소와 보이지 않는 양은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코로나 사태로 빚어진 민생경제를 살리자는 긴급처방으로 정부는 엄청난 돈을 풀 계획이다. 그런데 그 대상을 놓고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코로나 피해는 전 국민이 다 당하는 것이니 소득·직업 가리지 말고 무조건 다 지급하자는 주장도 있고, 이 어려움을 가장 뼈아프게 당하는 자영업자 영세상인, 실직자, 가난한 사람에게 혜택을 주고, 조금 여유 있는 층은 고통을 나누는 뜻에서 양보하자는 주장도 있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공무원은 제외하자는 주장도 있는데 공무원이라고 어려움이 없느냐? 라는 반론도 있다.
역시 소를 보느냐, 양을 보느냐 관계의 차이이다.
상위 30%를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는데 그 기준을 건강보험료로 할 것으로 알려지자 특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선정 기준을 23만 7천원으로 할 경우 단돈 몇백원 때문에 탈락할 사람들이 보험공단에 민원을 제기하는데 그 행렬이 마스크 사려고 줄 서는 것처럼 길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그 30%가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그런데도 탈락할 경우 이들의 실망감은 얼마나 클 것인가?
또 어떤 사람은 2년 전 소득을 가지고 평가를 한다는데 그 후 2년의 세월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기나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한다고 한다. 참으로 딱한 이야기이다.
어떻게 해서든 탈락하는 층에서는 형평성의 문제점을 제기하기 마련이다.
형평성이야말로 나라를 이끌어 가는데 수레바퀴처럼 중요하다. 한쪽이 기울면 수레는 제대로 굴러가지 못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지방자치단체 간의 형평성이다. 서울시는 어떻고, 경기도는? 충청도는? … 하고 차등이 생기면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형평성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절차에 매달려 시간을 끌다 중요한 타이밍을 놓치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보듯 환자의 치료는 신속함에 있다. 그 시기를 놓치면 죽고 나서 처방을 내려봤자 늦은 것이다.
때(時)를 다스리는 것이 정치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재난지원금을 ‘표’의 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선거가 끼어서 더욱 오해받을 수 있다. 참으로 소와 양, 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음의 ‘관계’가 정치의 핵심인지 모르겠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