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지구촌이 초비상이다. 새삼 평온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국가마다 출입국 제한조치가 시행되고 전염을 차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마스크 5부제’의 생경함과 불편함에 자괴감을 느끼는 시민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예민한 사람들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공포에 외출도 삼가고 있다. 개학도 연기되고 미술관이나 공연장은 장기 휴관에 들어가 있다. 종교집회는 물론, 다수가 모이는 회의도 제한하고 있다. 바이러스로부터의 공격에 일상은 무너지고 삶은 위축되었다. 질병 퇴치 기간이 길어진다면 사회와 삶 전체의 엄청난 피해가 불가피할 것이다. 총이나 대포보다 보이지 않게 전파되는 바이러스가 더 무서운 존재임을 실감케 한다.
14세기 중세의 흑사병은 인구의 3분의 1을 희생시키며 유럽 전역을 초토화 시켰다. 중국 남부와 중앙아시아에서 촉발된 이 질병은 실크로드를 따라 몽골 군의 서진과 함께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쥐벼룩을 숙주로 한 이 흑사병은 전염이 빠르고 치사율이 100퍼센트에 가까워 인구 밀집된 도시는 시체와 악취로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사람들이 이를 막고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성문을 걸어 잠그는 것, 발병한 집에 방역선을 치는 것, 발병지역으로부터 가급적 멀리 피난 가는 것 등이 고작이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채찍을 가하면서 참회의 고행을 하기도 하였다. 병의 원인을 알기 위해 고심했었지만, 당시의 의학 수준으로는 불가능했다. 교회나 정치권은 천재의 이변 때문이거나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흑사병의 재앙은 역설적이게도 서구의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고매한 가톨릭 사제들도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 것을 목도한 당대인들은 교회의 권위와 신앙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점차 합리적 이성에 눈뜨게 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인구의 감소로 수입이 늘어난 중산층이 확대되었는데 부자들은 성당에 성화를 기증하거나 성화를 소장하는 등 좀 더 독실한 신앙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의 탁월한 대가들이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 것이다.
이번 ‘코로나19’는 많은 것을 확인할 소중한 기회임에 틀림없다. 정부의 위기 대처 능력 제고와 좀 더 치밀한 방역시스템의 필요를 깨닫게 되었다. 격리시설 지정을 둘러싼 지역주민들의 배타적인 태도나 마스크 매점매석 행위 등 비윤리적 태도도 보았다. 확진자들을 증폭시킨 특정 종교집단의 감춰졌던 문제점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부족한 현장 전문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생업을 접어두고 목숨 걸고 현장으로 달려간 의료진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노고도 확인했다. 정책수행에서 정치논리보다는 전문가 그룹의 의견을 존중 해야 함도 알게 되었다. 경제 강국임을 자처하던 우리 사회의 수다한 취약점을 확인케 된 것이다. 이러한 정황들은 사회와 자신들의 삶에 대한 소중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지금은 차분하게 정부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 위기 극복을 위해 타자의 불행에 동참하는 성숙함도 가져야 한다. 코로나로 모두 정신없고 힘들지만 그래도 봄은 오고 있다.
김찬동 수원시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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