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에 성형외과 선생님들과 ‘가사문학관’을 관람한 적이 있다. 목소리가 고운 해설사가 우리를 안내하였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며 외우다시피 공부하였던 송강 정철(1536-1593)의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이 고운 목소리로 읊어질 때 가물가물하던 기억이 되살아나서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이며 따라하게 되었다.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ㅎㄴㅅㅇ 緣分(연분)이며 하ㄴㄹ 모ㄹㄹ 일이런가/나 ㅎ나 졈어 닛고 님 ㅎ나 날 괴시니/이 ㅁ음 이 ㅅ랑 견졸 ㄷ 노여 업다… 님의게 보내오려 님 겨신 ㄷ ㅂ라보니/山(산)인가 구롬인가 머흐도 머흘시고”
<사미인곡> 부분
당시 사대부들은 왕을 찬미하는 시나 문학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는데 <사미인곡>에서 님(미인)은 왕(선조)이며, 송강은 뛰어난 글 솜씨로 아름다운 가사를 다수 남겨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권주가인 <장진주사>를 듣고 나서 전시품을 돌아보았는데, 그 중 인상 깊었던 것은 송강이 선조(宣祖)에게서 하사 받은 은으로 만든 술잔(銀杯, 16×5.0cm)이었다. 술잔이라고 하기엔 사발만큼 크며, 잔을 받치는 부분에 비하여 술을 담는 부분의 두께가 얇고 비대칭적이었다. 송강이 과음하는 바를 안 선조가 잔을 하사하며, “그대가 술을 좋아하나 너무 과함이 걱정되니 앞으로 이 잔으로 하루에 한 번만 마시라”고 하였다는데 그 잔으로 마시다 보니 양이 성에 안 차 송강이 망치로 펴서 잔을 늘렸기 때문이었다. 큰 잔에 술을 마셔서인지 결국 송강은 흑달(간경변으로 인한 황달)로 작고했다고 하였다.
해설이 이어졌다. 조선시대 4대사화에서 처형당한 사람이 100여명 정도였는데, 기축옥사(1589, 정여립의 난)때는 3년동안 1천여명이 처형당했다. 이것은 서인이 동인을 박해한 사건으로 이를 주도한 우두머리가 송강 정철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에 보면, “정철은 중년 이후로 주색에 병들어 자신을 충분히 단속하지 못한 데다가 탐사(貪邪)한 사람을 미워하여 술이 취하면 곧 면전에서 꾸짖으면서 권귀(權貴)를 가리지 않았다. 편벽된 의논을 극력 고집하면서 믿는 것은 척리(戚里)의 진부한 사람이었고, 왕명을 받아 역옥(逆獄)을 다스릴 때 당색(黨色)의 원수를 많이 체포하였으니, 그가 한세상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다.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고 기록되어 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정철처럼 화려한 미사여구와 수사들로 치장한 글이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아름다운 글을 쓴다고 그 사람의 마음도 아름다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또 외모가 아름답다고 마음도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사람이란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사람이고, 아름다운 마음은 그 사람이 하는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글이나 외모가 아니라 정녕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다.
황건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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