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조선시대 명당 12곳 포천에 실제 존재

임원경제硏 등 경기문화재단 지원 ‘에코뮤지엄 사업’ 진행
가산면 방축리 등 남·북 통틀어 최다… ‘12명당’ 입간판 설치

▲ 포천의12명당지
▲ 포천의12명당지

포천시에 남ㆍ북한을 통틀어 가장 많은 12명당이 실제 존재한 것으로 확인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29일 포천시와 임원경제연구소 등에 따르면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정승진 교수, 임원경제연구소 정명현 소장, 전북대 과학문명학연구소 전종욱 교수 등은 경기문화재단 지원으로 포천 에코뮤지엄 사업을 수행했다. 

조사연구팀은 지난 6개월간 포천의 구석구석에 산재한 역사유산, 농촌유산, 자연유산을 찾아다니며 역사적인 근거를 중심으로 현장조사를 진행, 포천에 12명당이 실제 존재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포천 12명당의 재발견은 앞으로 진행될 구체적인 사업에 방향을 제시할 살아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관측된다. 

포천 12명기(명당)은 조선시대 대학자인 풍석 서유구(徐有榘, 1764~1845) 선생이 저술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상택지(相宅志)(주거선택 백과사전)에 수록됐다. 서유구 선생은 포천 지역 12명당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구체적으로 표시해 놓았다.

임원경제지 상택지 서두에는 복거4요(卜居四要)(살 곳 고르는 4가지 요점)를 다음과 같이 꼽았다.

살 곳을 고를 때는 ‘지리’가 으뜸이고, ‘생업 조건’이 그다음이며, 그다음이 ‘인심’, 그다음은 ‘산수’라며 이 4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낙토(樂土)가 아니라고 했다. 서유구 선생은 전국 233곳의 명당을 소개하면서 조선시대 영평현에 9곳, 포천현에 3곳을 표기했다. 이는 지금 행정구역상 모두 포천에 속한 것으로 남ㆍ북한을 통틀어 가장 많은 명당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포천은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명승지로 알려졌으며, 평생 몸담아 살 곳으로도 정평이 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구팀은 “임원경제지 상택지에서 거론했던 이 명당들의 자연환경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정확하고 심미적인 감수성이 깊게 반영됐음을 절감하면서 감탄과 감동의 연속이었지만, 다시는 선인들이 보았던 12명당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변해버린 환경이 아쉬웠다”고 말했다.

임원경제연구소 정명현 소장은 “포천의 12명당은 조선시대에 알려진 명당을 기준으로 전국의 지자체 중 가장 많은 명당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천시민과 포천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리려고 ‘포천의 12명당’ 입간판을 제작, 세우게 됐다”며 “조선시대 포천 북부지역의 행정중심지였던 영평현 관아건물을 재현해 포천의 제2 에코뮤지엄으로 삼자고 제안한다”고 말했다. 

한편, 임원경제연구소는 지난 27일 소흘읍 직동리 공용주차장에서 ‘포천의 12명당’ 입간판 제막을 가졌다.

포천=김두현기자

●포천 12명당. 

▲화산(花山). 가산면 방축리, 가산리, 금현리 일대.

포천현(抱川縣)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주엽산(注葉山) 기슭에 있다. 굽이굽이 살 만하다. 예전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살던 곳이다. 민간에서는 이곳을 오이넝쿨모양이라 했으며 화봉산(花峯山) 아래가 가장 감춰져 드러나지 않아 살 만한 명당이 많다. 땅도 비옥하여 밀이나 보리농사에 알맞다.

花山

[名塢志] 在抱川縣南二十里, 注葉山之麓. 曲曲可居. 故白沙李文忠公之所宅也. 俗稱“瓜藤形”而花峯之下最韞藉, 多佳基. 地又肥沃宜麰麥.

▲이곡(梨谷). 소흘읍 이곡리 일대. 

포천현 남쪽의 노고현(老姑峴: 고모산 또는 노고산) 남쪽에 있다. 그윽하고 궁벽하며 배나무가 많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배 농사를 생업으로 삼고 있다. 산에 있는 밭은 농사에 알맞고 산의 샘물도 농지에 물 대주기에 편리하다. 정조대왕께서 일찍이 광릉(光陵)에 행차하실 때 마을 곁을 지나다가, 살만한 곳이라고 말씀하셨다.

梨谷

[又] 在抱川縣南老姑峴之陽, 幽奧深僻, 多梨, 居民賴以爲業. 山田宜稼, 山泉又利灌漑. 正宗大王嘗幸光陵過村傍, 敎以可居.

▲수곡(樹谷). 동교동, 설운동, 선단동 일대.

포천현 남쪽 왕방산(王方山: 지금의 해룡산) 아래에 있다. 그윽하고 고요해 은거의 정취가 풍부하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장수하는 경우가 많다.

樹谷

[又] 在抱川縣南王方山下. 幽靜, 饒隱居之趣, 居民多壽.

▲금수정(金水亭). 창수면 오가리 546번지를 중심으로 한 오가리 일대. 

영평현(永平縣) 서남쪽에 있다. 서울 근교에서 계곡 근처 거주지로는 최고이다. 고을 치소에서 바라보면 숲과 산기슭이 수려하고 은은해 특이한 정취가 있다. 들판을 따라 가로질러 가다가 시내를 끼고 가야 도착한다. 이미 정자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시내가 흐르는 형세는 굽이쳐 돌다가 정자에서 막힌다. 여기서 다시 남으로 꺾여 흘러가는데, 이것이 ‘백운계(白雲溪: 백운계곡)’이다. 들판의 형세는 평평하고 넓으며, 녹음이 우거져 끝없이 펼쳐지고 현문(縣門: 관아의 문) 밖의 숲과 나무는 푸릇푸릇하고 그윽하다. 예전에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별장이었다가, 지금은 김씨(金氏)의 소유가 되었다. 금수정 앞에는 소고산(小姑山)이 마주하고 있는데, 그림처럼 예쁘다. 이 산 아래도 살기에 알맞다.

金水亭

[又] 在永平縣西南, 近畿溪居之最也. 由邑治而望, 林麓秀麗, 隱隱有異. 從野中行, 挾川而至. 旣登亭而顧覽, 川勢彎廻而至抵亭, 復南折而去, 是謂“白雲溪”. 野勢平曠, 綠蕪無際, 縣門外林木, 蔥靑窈窕. 故楊蓬萊別業也, 今爲金氏物. 前對小姑山, 姸妙如畫, 山下亦宜居.

▲창옥병(蒼玉屛). 창수면 주원리 687-1번지 일대.

금수정 아래로 5~6리 쯤 떨어진 곳에 있다. 청령담(淸泠潭: 창옥병 앞의 영평천)에 닿아 있으며, 깎아지른 듯한 암벽 수백 장(丈)이 청령담 뒤를 받치고 있다. 동은(峒隱) 이의건(李義健, 1533~1621)이 쇠 퉁소를 불던 곳이다.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이 사직하고 이곳에 물러나 쉬었는데, ‘배견와(拜鵑窩)’라는 곳은 곧 박순의 옛 집이다. 지금 이곳은 옥병서원(玉屛書院)이 돼 박순과 이의건 및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을 배향한다.

蒼玉屛

[又] 在金水亭下可五六里. 臨淸泠潭, 有削壁數百丈, 障其後. 峒隱李公吹鐵篴處也. 朴思菴退休于此, 曰“拜鵑窩”者, 卽思菴故宅. 今爲書院, 享思菴、峒隱及金文谷.

▲주원(周原). 창수면 주원리, 추동리 일대.

영평현 금수정의 남쪽에 있다. 작은 산기슭을 돌면 큰 시내(외북천을 가리키는 듯함)가 있는데, 그 오른쪽을 지나면 금수정 아래의 백운계로 들어간다. 집 뒤의 소고산에 오르면 금수정의 빼어난 경치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 흙이 비옥하고 샘물이 달며, 뽕나무와 삼이 우거져 있다. 김씨(金氏)들이 모여 산다.

周原

[金華耕讀記] 在永平金水亭之南. 小麓週遭有大川, 經其右入金水亭下白雲溪. 登舍後小姑山, 可全攬金水亭之勝. 土腴泉甘, 桑麻翳如. 金氏聚族而居.

▲백로주(白鷺洲). 영중면 거사리, 금주리 일대.

영평현 현문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있다. 지세가 상당히 광활하여 산수가 이곳에 이르면 흩어져 느려지고 평평하게 펴진다. 물속에 큰 바위가 많아 여러 물줄기가 부딪쳐 쏟아지면서 뒤엉키고 꺾여 흐른다. 고색창연한 바위가 구불구불 이어져서 수면 가운데 들어가 우뚝 솟아 있으니, 물이 여기에 부딪혀서 마침내 두 줄기로 나뉘어 좌우로 흐른다. 백로주라는 이름은 대개 이백(李白)의 시 “두 물줄기 백로주를 가운데로 나눠지네.”라는 말에서 취한 것이다.

白鷺洲

[南雷淵 游洞陰記] 在永平縣門十里. 地勢頗廣豁, 山水至此, 散緩平鋪. 水中多穹石, 衆流激射, 縈折而行, 蒼巖蜿蜒入水心特起, 水觸之, 遂分二派, 左右而流. 洲名蓋取李太白詩“二水中分”之語也.

▲백운동(白雲洞). 이동면 도평리 일대.

영평현 백운산(白雲山) 아래에 있다. 산양천(山羊遷)으로부터 시냇물을 따라 들어가다가 계곡 입구에서 비로소 넓게 평야가 있다. 속칭 ‘주루평(注婁坪)’이라 한다. 들판 가운데 봉우리 하나가 우뚝 서 있는데, 지나가는 매[鷹隼]가 이곳에 멈춰 쉰다고 해서 ‘응봉(鷹峯)’이라 이름한다.

白雲洞

[文獻備考⦁輿地考] 在永平白雲山下. 自山羊遷, 緣溪而入, 峽口始曠然, 有平野, 俗稱“注婁坪”. 中有孤峯突立, 鷹隼過者止息, 故名“鷹峯”.

▲농암(農巖). 이동면 장암리 일대. 

영평현에 있으며 백운산 기슭이다. 현문과의 거리는 60리이다. 샘물과 바위가 빼어나고 깨끗하다. 이곳의 농사암(農事巖)⦁완의대(玩漪臺)⦁명월석(明月石)과 같은 것은 모두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 지은 이름이다. 산의 밭은 조 농사에 알맞은데다 산골길로 통하므로 백성 중에 목재 채취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 산속 사람들 가운데 부자들이 많다. 

農巖

[名塢志] 在永平, 白雲山之麓, 距縣門六十里. 泉石秀潔, 如農事巖、玩漪臺、明月石, 皆農巖金文簡所名也. 山田宜粟, 且通峽路, 民多採木爲業, 山中人多富饒.

▲연곡(燕谷). 이동면 연곡리, 노곡리, 일동면 사직리 일대. 

농암의 남쪽에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는데, 유독 남쪽으로는 트였다. 시내의 경치가 빼어나고 민가도 조밀하다. 무인(武人) 김씨(金氏) 집안이 대대로 거주하고 있다.

燕谷

[又] 在農巖之南. 四山環繞, 獨缺其南. 有溪澗之勝, 民戶亦稠. 武人金氏世居之.

▲화현(花峴). 화현면 화현리 일대.

영평현에 있으며, 백운산 남쪽, 금수산(錦繡山: 금주산) 동쪽, 현등산(縣燈山: 운악산) 서쪽이다. 골짜기 안에 들판이 열려 있고, 흙이 비옥하고 물이 깊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부유하여 이름난 마을이라 알려졌다. 영평ㆍ가평ㆍ포천 3개 고을이 교차하는 지역이다. 둘레가 수십 리가 되는데 김씨(金氏) 소유의 연곡도 그 중 하나를 차지한다.

花峴

[金華耕讀記] 在永平縣, 白雲山之南、錦繡山之東、縣燈山之西. 峽中開野, 土厚水深. 居民殷富, 號稱名塢. 居永平、加平、抱川三邑之交, 周圍爲數十里, 而金氏燕谷亦占其一.

▲용호동(龍虎洞). 일동면 유동리 용호동 마을 일대.

영평현 동쪽에 있다. 골짜기 안의 들판에는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울창하여 목재로 삼을 만하다. 유씨(兪氏)가 은거하는 곳이다.

龍虎洞

[名塢志] 在永平縣東. 峽野中松柏繁密, 可以爲材, 爲兪氏隱居之所.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