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동짓날 밤 [冬至夜雪]동지가 드는 자시 한밤중(冬至子之半)한 자나 깊이 눈이 쌓였네(雪花盈尺深)만물을 회복하는 봄기운 넘쳐흐르고(津津回物意)천심을 보니 크고 광대하구나(浩浩見天心)관문을 닫고 나그네 금하니(關閉爲禁旅)양기가 생겨 막 음기를 깨뜨리네(陽生初破陰)깊은 시름에 한 선이 더해지니(窮愁添一線)동마주를 정히 마실만하구나(馬正堪斟)
소세양(蘇世讓,1486~1562)『양곡집』권9「동지야설(冬至夜雪)」에 나오는 이 시는 동지의 이치와 여러 상징을 잘 표현하여 널리 인용되고 있다.
동짓날 자정, 천심은 변함없고(冬至子之半 天心無改移)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기운이 바로 동짓날에서 시작되니 동짓날에는 ‘관문을 닫고 행상인의 출입을 금지시키며 임금은 지방을 순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땅속에서 싹트기 시작하는 지극히 작은 양기(陽氣)를 보전하려는 조심스러운 마음에서 발로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유(馬乳)로 만든 동마주(馬酒)를 기꺼이 마실 만하다는 내용이다. (동마주는 마유(馬乳)로 만든 술인데 위아래로 흔들어서 만들기 때문에 동마주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동지는 고대부터 유구한 시간의 시작이었다. 당나라 때 달력을 만들던 이들은 아득한 옛날 자월(子月,11월) 초하루 갑자일(甲子日)의 한밤중 자정(子正 12시)에 동지(冬至)가 드는 때를 달력의 시작으로 삼았다. 1월 1일이 시작이 아니라 11월 1일이 시작인 것이다. 이날은 1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로 현재 양력 12월 22일이나 23일이 그에 해당한다.
밤이 가장 긴 것은 겨울의 음기가 가장 극성하다는 의미이지만 한편으로 그 다음 날부터 낮이 점차 길어지므로 양기가 회복된다는 희망을 상징한다. 즉 11월은 세상이 음에 휩싸여 있으나 땅속에서 남모르게 하나의 양이 회복되고 있다는 뜻이다. 양이 회복된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므로 한겨울 속에 싹트는 생명의 봄을 의미한다. 동지가 한 해의 시작이 된다는 의미 때문에 지금은 동지팥죽을 먹으며 불길한 것을 떨쳐버리는 정도만 남아있을 뿐이다.
섣달에 드는 납향제(臘享祭)의 ‘납일(臘日)’은 동지 후 셋째 미일(未日)로 1년 동안에 지은 농사나 그 밖의 일어났던 모든 일을 신(神)에게 고하고 무사하게 잘 지내게 해준 데 대하여 감사의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다.
또한, 섣달에는 군사들의 몸을 단련시킬 목적으로 사냥하도록 했는데 조선시대 정조대왕은 납일 고기로 꿩, 토끼, 노루, 사슴, 산돼지만을 잡도록 허락했다. 이 고기로 종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납제(臘祭)란 이름이 생겼다. 여기에서의 ‘랍(臘)’은 고기를 뜻하는 ‘월(月)’자와 수렵을 뜻하는 ‘렵(獵)’자를 결합해 만든 글자로 랍(臘)자에는 ‘사냥해서 잡아 온 고기’라는 뜻이 들어 있다.
국어사전에는 임금의 탄신일, 정월초하루, 동지를 삼명절(三名節)이라고 적혀 있다. 또 국조오례의에는 육명일(六名日:설,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납일)에 선대왕의 영정이 모셔진 ‘영희전’에 다례를 올렸는데 순조는 실제로 동지다례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탄신일과 동지를 명절로 간주하여 ‘다례(茶禮)’를 지낸 것이다.
수원화성 ‘화령전’은 순조 원년(1801년)에 세워져 오래도록 그 원형이 잘 보존된 까닭에 국가 보물(제2035호)로 지정되었다. 순조는 ‘화령전응행절목’을 개정하여 정기제향으로 탄신제과 납향제를 올리도록 했다. 이제 영희전은 없어졌으나 화령전은 보물이 된 것이다. 동지와 납일이 든 동지섣달을 그냥 팥죽 생각만으로 넘겨야 할 일인지. 동짓날 자정은 길기만 하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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