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외국에 가게 되면, 가는 날부터 오는 날까지 선수들과 같은 일정으로 생활하게 되어 인근을 둘러볼 짬도 내기 힘들다.
지난 9월 말 10일간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추저우(州)에서 개최된 2020 도쿄올림픽 여자핸드볼예선전에 한국팀의 의무위원으로 참여했다. 선수단이 묵는 숙소 뒤로 그리 험하지 않아 보이는 산이 펼쳐져 있었는데 ‘낭야산(琅耶山)’이라고 하였다.
팀을 인솔하는 C단장은 선수들의 건강과 부상 상태에 대해 의사인 나보다 더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훈련 때 선수의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이면 슬며시 내게 그 선수의 부상력을 알려주며 걱정하였고, 경기 중 선수가 넘어지면, 휴식시간에 꼭 나를 동반해 그 선수에게 가곤 했다.
경기가 없는 날 ‘추저우 박물관’에 들렸더니, 마침 ‘건국 70주년 미술전’이 열리고 있는데, 그 중 200호도 넘어 보이는 산수화가 눈에 탁 들어왔다. 처음 보는 그림인데도 어디서 여러 번 본 듯 했다. C단장이 말했다. “여기 우리가 매일 보는 통신탑과 절이 있네요!”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의 뒷산인 ‘낭야산’을 그린 그림이었다. 숲길을 따라가면 ‘취옹정(醉翁亭)’ 이라는 정자가 보이고 더 가면 연못이, 산꼭대기 바로 밑에는 ‘낭야사’라는 절이 보였다.
그림의 스케일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당송팔대가의 하나로 꼽히는, 북송(北宋) 때의 시인·사학자·정치가였던 구양수(歐陽修, 1007-1072)의 석상과, 그가 즐겨 찾던 취옹정을 실제 크기로 재현해 전시한 구조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며칠 뒤 오전에 겨우 시간이 났다. 산의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관광구로 입장했다. 숨차지 않을 정도의 평탄한 포장길이 이어져 있었다. 울창한 숲과 작은 시내를 따라 걷다 보니 취옹정이 나타났다. 구양수가 추저우의 태수로 근무할 때 낭야사에 있는 지천(智遷)이라는 스님이 태수를 위해 정자를 지었다는데 구양수가 자신의 호(醉翁)를 따서 ‘취옹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담에는 그가 지은 취옹정기(醉翁亭記)가 새겨져 있었다. ‘태수가 친구들과 함께 여기 와서 술을 조금만 마시고도 취했고, 또 나이도 가장 많은지라 스스로 호를 취옹이라 하였다’며, 술을 마시는 목적은 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수를 감상하기 위한 것으로서, 술기운을 빌려 아름다운 산수를 마음속으로 느끼면서 즐겁게 취한다고 하였다(醉翁之意不在酒 在乎山水之間也). 평소에 독한 술은 전혀 입에 대지도 않았으나, 구내 판매점에서 노인이 그려진 술을 한 병 샀다.
선수들이 열심히 뛴 덕분에 마지막 날 주최국인 중국과의 경기를 이기며, 우리 대표팀은 5전 전승으로 내년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 10연속 올림픽 출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부상당한 선수가 없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이 되었다. 테이블과 의자 두 개를 숙소의 베란다로 옮기고 C단장과 산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시원하였다. 긴장이 풀렸다. 술병의 마개를 뜯었다. 그도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막고 있는 담도 없이 산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주위가 어두워 베란다의 등을 켰다(秉燭夜遊). 천년 전에 구양수는 낮에 주연을 벌이고 해가 지면 숙소로 돌아갔을 터인데, 우리는 어두워져 풀벌레 소리만 요란한 가운데 술기운을 빌려 아름다운 산수를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었다. 술병이 비었다. 이곳의 특산물인 마른 국화를 더운물에 넣어 차를 우려내어 마시며 낭야산을 바라보았다(采菊 悠然見琅耶山). 취한 두 남자가 천년 전의 그 노인을 만난 것 같았다.
황건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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