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오리건주 상·하원 5선 신화 ‘여주 출신’ 임용근 前 의원, 무일푼 이민, 애국애족 힘으로 버티다

한국전쟁 후 고달픈 삶과 투병생활
신학대 석사 수료… 다사다난 인생史
정치길 올라 주지사 도전, 인지도↑
고향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 참석
“올바른 역사관 고취·장학사업 지원”

미주 한인 이민 사상 최초 오리건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된 후 상·하원 5선이라는 금자탑을 세운 임용근 전 의원(84)이 고향인 여주를 찾았다. 그는 지난 13일 여주 남한강변 양섬에서 열린 한국전쟁 전후 여주지역 민간인 희생자 추모 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임 전 의원은 미국 시민사회로부터 인정받아 오리건주 상ㆍ하원 5선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애국애족의 힘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한국전쟁 당시 3년1개월간 미군 3만 7천여 명 사망, 10여만 명 부상, 7천여 명 실종 등 큰 피해를 본 미군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임 전 의원은 “환경친화적 도시, 맑고 깨끗한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전제한 뒤 “올바른 역사관을 고취시키고 장학사업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임 전 의원은 과거를 회상하며 안타까움을 소회했다. 한국전쟁 이후 그의 가족은 경찰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학대를 받았다. 심지어 “빨갱이 가족은 소련으로 가서 살아라”라는 말까지 자주 들었다. 그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포천 미군부대에서 하우스 보이(잔심부름)를 하다 폐병으로 5∼6년간 투병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영어공부에 매진하면서 2년 만에 영어사전 7천500 단어를 독파했다. 이후 고아원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한 달에 10달러를 받았으며, 신학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신학대를 다니며 미군부대 한인 장병 군목으로 활동, 한 달에 100달러를 받기도 했다.

그는 1963년 여주여고 국어교사였던 박영희씨와 결혼한 후 여주 능서에 능서교회를 설립했다. 교회 후원단체와 인연이 돼 보육원 4중창단을 결성해 30세 나이에 미국 워싱턴과 포틀랜드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이민을 결심했다.

무일푼으로 미국 오레곤주로 이민한 그는 교회 청소부와 페인트공 등 잡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오레곤주 조지팍스 신학대학에 입학해 4년간 장학금을 받으면서 석사과정을 마쳤고 국내 전남대에서 명예 정치학박사를 받았다. 그는 선물가게와 비타민 제조공장, 부동산 투자로 많은 돈을 벌어 정치에 입문했다. 오레곤주 주지사에 도전하면서 인지도를 높인 그는 오레곤주 상ㆍ하원 5선에 성공했다.

특히 김병직 오레곤주 한인회장과 미국에서 한국전쟁기념재단을 설립해 윌슨빌시의 한국전 기념비와 맥아더 장군 동상, 기념관 등을 조성하기도 했다.

돈키호테로 소문난 그는 신용과 신뢰를 바탕으로 미국 오레곤주 한인회장과 250개 미주 한인회 총회장에 당선되어 워싱턴DC에서 최초로 세계한민족대회를 개최했다. 미주 상공인 총연합회장과 아시아 33개 지역 시민권 협의회장도 역임했다.

역경 속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굳은 신념과 각오로 도전하는 그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작은 영웅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여주=류진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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