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추석의 완성

고대로부터 추석(秋夕)은 단순한 가을 저녁으로 그치지 않았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수확한 음식을 서로 나눠 먹는, 어쩌면 저승까지 모두 기꺼운 중추(中秋)였다. 익은 벼를 어루만져온 금빛 바람으로 각박한 세상살이에 다친 마음을 다독이는 치유의 시간이었다. 이런 추석의 핵심에는 가족이 있다. 가족은 천륜일진대 가족과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가족에게 손을 먼저 내미는 것이 사람 본래의 인정이라고 맹자(孟子)는 말하였다. 돌아가신 부모의 시신이 들짐승에게 뜯기는 걸 차마 보지 못하여 매장하기 시작한 것이 예(禮)의 첫 뜻이라고도 하였다. 맹자를 빌리자면 나이 든 어른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이 예가 아니듯 남의 소중한 자식인 며느리나 사위에게 가혹한 것도 예가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으로 추석은 성립한다. 희미한 자전거 등에 의지해 먼 길을 마중 나온 할아버지의 여윈 팔뚝을, 오다가다 집어먹던 고소한 동태전을, 고향집에 어린 딸을 처음 데려가던 그 순간을 영원처럼 소환함으로써 추석은 계속된다. 해마다 이 땅 위 삼천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추석을 확인하러 가깝고 먼 길을 간다. 귀향 DNA가 어김없이 작동하는 셈이다. 하지만 추석 풍경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일인 가족이 늘어나고, 부모를 여읜 후 고향을 같이 상실한 경우도 많아졌다. 외국여행은 늘어나고 제례의 설득력은 점점 약해진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적 견해를 역시 빌려보자면, 추석은 농업혁명의 부차적 산물로 ‘특정지역 호모 사피엔스가 가족공동체의 억압을 강화시키고자 고안한 문화적 관행’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듯 변화하는 추석 풍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추석을 궁리하게 한다. 행복한 추석은 어떤 것이며, 충돌하는 여러 가치관 속에서 다수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추석 풍경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는 이미 새로운 사회적 과제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추석의 핵심이 가족이라면, 이번 추석부터 가족의 범위를 확대시키면 어떨까. 가족의 범위가 넓어지면 귀향길 음주운전이 있을 수 없다. 부모 자식이 걸어다니는 도로에서 누가 술 마시고 운전대를 잡겠는가. 지난 5년간 추석연휴에만 1만4천201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하였다는데 보행자나 운전자 모두를 한 가족으로 여긴다면 교통사고도 대폭 줄어들지 않겠는가. 추석의 의미를 되새기는 운전자라면 양보운전, 배려운전을 늘 실천할 것이다. 남의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아끼는 운전자에게 어린이보호구역에서의 과속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돌아가신 부모의 시신이 들짐승에 뜯기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처지도 잘 헤아릴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다른 사람의 고향도 얼마나 소중한지를 헤아릴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저급한 지역감정 따위는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이번 추석 역시 넉넉할 터이나 어떤 이에게는 태풍이 할퀸 자리에서 고통스럽게 주저앉은 시간일 것이다. 비록 추석이 고대 한반도 농업혁명의 부차적 산물로서 시대변화에 따라 언젠가 종결될지 모를 관행적 절기에 불과할지라도, 천륜에 근거한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명절이라는 점은 현재로서는 분명하다. 떠났으되 차마 잊히지 않는 죽은 자를 기리며 남은 자와 이승의 고마운 음식을 나누는 행위가 추석의 시작이었다면, 생각과 풍습이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가족의 범위를 넓혀 어려운 이웃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알지 못하는 타인조차 더 배려하는, 내 몫의 송편을 함께 나누는, 더불어 넉넉한 추석, 상하좌우가 안전한 추석, 즉 새로운 추석으로 완성하면 어떨까 한다. 추석을 완성한 후 혹여 남는 시간에 ‘부동산투자 성공요령’ 같은 책 대신, 좋은 시집을 골라 여럿이 함께 낭독해 본다면 한가위 보름달은 아마 더 낭만적이 되거나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지겠지.

김성훈 손해보험협회 중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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