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운전문화는 그 나라의 국민 수준을 나타내는 바로미터다. 비상등은 위험을 알리기 위한 램프로서 좌우의 플래시 램프를 점등시켜 후속 차 또는 다른 방향에서 오는 차 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것이 그 기능이다. 미국에서 비상등을 켜는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다. 비상상황으로 정상적인 운행이 불가능할 때, 또는 기상악화로 시야 확보에 어려움이 생길 때를 제외하고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국에서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차를 세워 두고 있으면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오는 다른 차의 운전자들이 적지 않다.
반면 서울에서 경험한 비상등의 사용은 불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신한 느낌이다.
어둠이 깃든 강남의 좁은 1차선 일방통행 골목길에서 비상등을 켜고 역주행하는 무분별한 운전자들의 폭주는 미안함을 표시하기보다는 ‘나의 불법행위는 비상등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라는 신념의 신호로 사용되는 것 같다. 분주한 대로에서 한 차선을 완전히 막고 서 있는 영업용택시는 다음 승객을 태울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린다. 이런 이기적이며 무분별한 선택은 수많은 운전자들의 위험과 모험을 초래한다. 이제, 원래 목적과는 다르게 사용되는 이런 비상등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반면, 비상등을 켜고 경각심을 상기시켜 현재 우리 사회의 상황이 위험 수준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특히, 필자가 속해 있는 문화계도 예외는 아니다.
진정으로 우리 사회는 실력을 최우선 하고 있는가? 연주력은 충분하지만, 학벌이나 커넥션이 부족해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연주자가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아직도 입시철에 정상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입학이 결정되는 일은 없는가? 예체능계의 입시철에 벌어지는 불결한 행태들이 아직도 횡행하지 않는가? 재능있는 학생들이 고액의 개인교습비가 없어 갈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희망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고액의 레슨비를 요구하는 선생들이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지 않고 부당한 방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면 이제는 그들의 축적된 부를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돌아가도록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이런 고액레슨들이 혹시 불법의 관행으로 정착되어 버렸는지 비상등을 켜야 할 시기가 아닌가? 국가의 지원을 받는 예술단체들이 원칙을 무시하고 편의를 우선한다면 과연 그곳에 참된 미래가 있을까? 예술인들은 매 무대에서 연주 또는 작품으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전문직업인이다. 국가에서 지급되는 봉급을 받는 연주자들이 이런 무대에서의 철저한 평가를 피하거나 두려워한다면 비상등을 켜고 세금으로 운영되는 단체들이 원래의 본분을 다하도록 권고해야 한다. 특정단체에 쓸리는 국가 예산의 지원이 건전한 예술인과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한 단체를 골고루 육성하고 장려하는 본분에서 빗나가지는 않는지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필자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에 많은 음악인이 이력서를 보내온다. 크고 작은 음악회에서 함께 연주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선발한 음악인은 유학파 또는 서울의 유수대학 출신이 아니다. 소위, 지방대학 출신이다. 화려한 이력서에 준하는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연주자들을 자주 경험하고 있다. 이력서로 젊은 재능을 섣불리 판단하는 기성세대들에게 비상등을 밝게 켜야 한다.
우리 미래의 주인공인 고귀한 후배들이 원칙을 지키면 값진 보상이 당연히 돌아온다는 매우 간결한 논리를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 있는 향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젊은이들이 어렵게 켠 비상등을 보고 그들을 돕고 또한 그 아픔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확산되기를 바란다. 운전자와 우리 문화계의 같은 목표는 비상등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닐까?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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