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배트맨>에 나오는 악당은 상처를 입고 항상 웃는 얼굴을 가진 조커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정말 웃고 있는 것인가? 아니,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우리는 늘 웃고 싶을 때 웃고 있는가? 아니, 웃고 싶지 않을 때도 웃어야 할 때가 있다. 인간의 감정은 너무나 다양한데 조커처럼 항상 웃고 있다면 오히려 괴기스러울 것 같다. 더욱이 조커는 악당이다. 항상 웃는 얼굴로 폭력과 살인을 일삼으니 섬뜩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진정한 ‘웃음’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우리의 일상적 삶이 불안의 그늘 속에서 흔들리면서 두려움은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웃음을 사지로 몰아내고 있다.
인간에게 웃음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만이 웃는 동물이라고 한다. 호모 리덴스(Homo Ridens)! 인간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이다. 그렇지만 과연 인간만이 웃을 수 있을까? 물론 인간 이외의 동물들도 웃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렇다면 웃는 것이 인간에게만 고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이 인간같이 웃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의 기분이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 인간과 같이 웃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웃는 고양이를 상상할 수 있지만 웃는 고양이는 없다. 고양이는 웃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체셔 고양이(Cheshire cat)는 ‘웃는’ 고양이다. 웃는 고양이라니! 고양이야말로 웃음과 가장 어울리지 않다. 고양이다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체셔 고양이는 순간 이동하는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져서 앨리스가 어지럼증을 호소하자 꼬리 끝에서 얼굴의 웃음까지 아주 천천히 사라졌다. 그렇지만 고양이의 웃는 얼굴은 몸이 모두 사라진 후에도 한참 남아있었다. 앨리스는 웃음 없는 고양이는 자주 봐왔지만 고양이 없는 웃음은 본 적이 없다고 하며 놀라워한다.
그러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체셔 고양이처럼 몸이 먼저 사라지고 웃음이 남는 것이 아니라, 웃음이 먼저 사라지고 몸만 남는 형국이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한 얼굴들이 고양이 유령처럼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 마치 체셔 고양이가 인간들의 웃음을 모두 거두어 간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만이 웃을 수 있는 웃음은 무엇인가? 최소한 이성이 함께 작용하여 발생하는 웃음을 가리킬 것이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서 생각하면서 웃게 된다. 그러므로 웃음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에 속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웃음’이 인간을 원숭이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한다고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는 중세 수도원의 살인 사건의 원인이 ‘웃음’이었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현존하지 않지만 소실되었다고 추정되는 희극편이 살인범이다. ‘웃음’은 어떻게 살인범이 되었는지는 중세 문화에서나 나올 법한 추리이다.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세상에서 웃음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남긴 웃음에 관한 책을 누군가 읽는다면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파급될 것이다. 그래서 당시 도서관에 유일하게 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에 치명적인 독을 발라놓아 그것을 읽기 위해 책장을 넘겼던 수사들을 모두 죽게 만들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로 ‘희극’에 대해 독립적인 글을 썼을지라도 호르헤가 걱정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현존하는 <시학>에서 제시한 비극론을 통해 희극론에 대한 기본 내용을 추리해본다면, 희극의 정의와 구성 요소 및 특징 등에 중점을 두고 설명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 자체를 옹호하거나 칭송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썼을 가능성은 적다. 그런데 호르헤는 과연 그 책을 읽었을까? 그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의 맹목적이고 독단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이 웃는 동물이라고 썼던 책은 <시학>이 아니다.
장영란 한국외대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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