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자가 되려고 피와 땀을 흘리며 준비해 온 청년음악가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문화 하드웨어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우울한 현실이다. 지방자치단체는 전문 예술단체를 운영하고 있지만 수십 년 전 만들어진 패턴과 시스템을 모델로 적용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전용 콘서트홀의 부재다. 지자체 단체가 다목적 홀을 짓고 그곳에서 다양한 단체들이 연주와 공연을 하는 형태는 50년 전부터 이어온 행정적 획일화에서 비롯된 오류다. 연주단체에 맞는 전용 콘서트홀의 확보는 선진문화가 뿌리내리는데 근본이 된다. “어떤 콘서트 홀을 지어 드릴까요?”라고 묻는다면 세계 유수의 콘서트 홀에서 연습과 연주를 경험한 내 생각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답한다.
첫째도 ‘음향’, 둘째도 ‘음향’, 셋째도 ‘음향’이다. 연주자 개인의 악기는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등이다. 그들이 모인 오케스트라의 악기는 콘서트 홀 그리고 거기서 생성되는 음향이다. 음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무대는 값비싼 보석으로 천장을 장식하고 바닥을 귀한 대리석으로 꾸며도 아무 쓸모가 없다. 좋은 음향은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투자가 있을 때 이뤄진다. 지자체의 다목적연주시설을 지켜보며 알게 된 것은 음향보다 외적인 면에 더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공연장 광장의 분수대, 화려한 넓은 로비, 그리고 객석과 객석의 편안한 공간 등이 음향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한정된 예산을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분배하는가에 따라 후대에 기록될 값진 유산 또는 그것을 헐고 다시 세우는 쓸모없는 콘서트 홀이 되는 핵심적인 잣대가 된다. 지금도 흠잡을 수 없는 유럽이나 미국의 오래된 홀을 보며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들의 콘서트홀은 밖에서 볼 때 화려하지 않다. 로비도 크지 않고 적절한 공간만이 있을 뿐이다. 입구도 초라하다. 주차장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훌륭한 음향으로 모든 것이 용서된다. 청중이 늦은 시간에 급히 저녁식사를 하고 정장을 차려입고 교통지옥을 뚫고 콘서트홀을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듣기 위해서다.
어떤 음향이 이상적인가? 무대의 연주자들이 본인들이 연주하는 사운드를 가감 없이 그대로 들을 수 있는 음향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유럽이나 미국의 오케스트라들은 자체적으로 전용 콘서트홀을 갖고 있으며 그곳에서 매일 연습도 한다. 연주회와 같은 음향에서 연습하면 본인들의 사운드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쉽게 적응한다. 무대에서 연주자들이 듣는 그대로 청중석 전체에 전달되는 음향이 이상적인 음향이다.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연습할 때 무대 위의 오케스트라 단원 전체에게 속삭이듯 얘기해도 무대 구석구석에 정교하게 전달될 뿐 아니라 100m 후방에 있는 3층 꼭대기 청중석 맨 뒤에도 그대로 전달되는 것에 놀란 적이 많다. 연주자들은 이런 음향에서 본인의 최고의 연주력을 내는 것에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2004년 6월 대전시향의 미국순회연주 첫 번째 장소인 시애틀의 베냐로야 홀의 연주를 잊지 못한다. 이 악단의 첫 해외 연주였다. 단원들은 ‘우리가 이렇게 훌륭한 소리를 낼 수 있었던 거야?’ 또는 ‘그렇다면, 지금껏 우리가 들었던 우리의 사운드는 우리의 것이 아니었던가?’라는 감격과 회한이 교차하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감동으로 붉어진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베냐로야 홀은 마술이 있는 음향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내는 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정직한 음향을 갖춘 것이 전부였다. 그런 소리를 내게 하는 음향작업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목표를 가지고 연주홀을 건축하는 것이 가장 우선 되어야 한다. “그 연주 홀 로비가 멋졌어” 또는 “이토록 환상적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향을 우리에게 물려준 선대들에 감사한다” 우리는 이 둘 중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