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박물관ㆍ미술관 제도는 근대 일본으로부터 이식되어 현재까지 그 근간을 유지하고 있다. 양자 모두 영어로는 ‘뮤지엄(Museum)’으로 표기하지만, 두 영역의 벽은 생각보다 높고 그 조직문화 역시 사뭇 다른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실정은 법적 근거인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의 명칭에서도 보인다. ‘뮤지엄진흥법’이라 해도 될 것을 양자를 굳이 구분하고 있다. 두 영역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 소장품의 내용과 제작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이것은 편의상의 구분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먼 과거에서 조망한다면 근대와 현대가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는가?
뮤지엄은 본질적으로 리좀(Rhizome)적 속성을 가진다. 리좀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철학의 중심개념 중 하나인데, 뿌리나 줄기가 뚜렷한 수목과 달리 줄기와 뿌리의 구분이나 시작과 끝도 분간할 수 없는 속성의 넝쿨뿌리 식물로 서로 비논리적인 연계를 이루는 점에서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의 상관성을 시사하는 바 크다. 하지만, 우리는 박물관 영역과 미술관 영역이 구분되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암투를 벌이기도 한다. 다행히 경기도는 박물관협회가 미술관까지 포용하여 상부상조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양자가 서로 협력하는 일의 핵심은 단순히 서로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 상호 간 공동의 전시 콘텐츠를 생산하며 각자의 영역에 머무는 사고의 틀을 융합해 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해외의 경우 이러한 상호융합적 사고는 일상화되어 있다. 박물관 유물과 현대미술이 함께 대화하고 현대미술품 전시에 박물관의 유물이 함께 전시된다.
최근 국내에서도 국립경주박물관의 <신라문화를 다시 본다>전(2018.12.14~2019.3.3)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전(2019.4.29~2019.6.16)과 같이 박물관의 유물과 현대미술의 접목하는 전시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전자는 신라의 정신을 현대미술로 해석하고 후자는 유물과 현대미술을 접목시켜 전혀 이질적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수원시립미술관에서도 작년 <구조의 건축>전에 이어 올해에도 <셩:판타스틱 시티>전(7.23~11.3)을 개최할 예정이다. 이는 수원의 역사 문화적 기반인 화성과 정조의 정신을 현대미술로 재해석하려는 전시이다. 이는 잠자고 있는 박물관의 유물과 유적에 새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소통은 리좀적 사유를 가진 두 영역의 학예사들 간 공동연구를 축적한다면 사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뿐 아니라 뮤지엄과 5G 시대의 일상을 융합하는 새로운 전시콘텐츠의 생산은 오늘 통섭과 융ㆍ복합의 시대에 뮤지엄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110년 전 시인 마리네티는 「미래파 선언문」에서 “…박물관과 도서관을 파괴하라…….”라는 극단적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이는 서구 근대문화의 정수인 뮤지엄의 한계와 폐해를 해체하고 새로운 미래의 가치를 찾고자 한 외침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 시대 뮤지엄의 해체를 위한 과제는 무엇일까?
김찬동 수원시미술관사업소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