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메두사의 공포와 야만의 얼굴

최근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일련의 무차별적인 폭행이나 잔혹한 살인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 아무런 이유 없이 전혀 모르는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심지어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 또는 부모와 같이 너무나 가깝고 친숙한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다는 사실이 공포를 가중시킨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존재가 할 수 있는 야만의 끝은 어디인가?

프랑스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은 1816년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함선을 타고 프랑스를 떠났다가 배가 암초에 걸려 뗏목에서 버티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들을 그린 작품이다. 탑승객 400명 중에서 6대의 구명정을 탈 수 있었던 권력자나 고위층 사람 등은 목숨을 건졌으나, 나머지 149명은 임시로 뗏목을 만들어 탔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마시지도 먹지도 못하고 13일 동안 뗏목에만 의지하여 바다를 떠다니는 동안 살아남으려고 서로를 살해하고, 목마름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인육을 먹는 핏빛 광기의 시간을 보내다 일부만 구조됐다.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도 존엄한 존재도 아니고 단지 살기 위해 타인의 살을 뜯어 먹고 피를 마시는 굶주린 짐승에 불과하다. 메두사호의 뗏목에서 구조된 사람들은 끔찍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이 프랑스 함선의 이름은 하필이면 ‘메두사’이다. 메두사의 얼굴은 한번 쳐다만 봐도 돌이 되어버린다는 공포와 두려움의 상징이다. 메두사호의 파선으로 생겨난 조각들로 만들어진 불길한 뗏목 위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149명 중 불과 15명뿐이었다.

그러나 메두사의 뗏목에서 벌어진 잔혹하고 끔찍한 상황조차도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수많은 사람이 뗏목이라는 비좁은 공간에 머무르기 위해 아비규환에 빠지고 생존하기 위한 동물적인 본능이 극대화되어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에서다. 오히려 누구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무차별적인 폭행을 저지르고 이유 없이 잔혹하게 살인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겐 훨씬 더 큰 공포의 대상이다. 인간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더욱 불안을 느끼며 두려움에 떨게 된다. 인간의 야만성은 어디서 출발하는가?

인간이 일차적으로 동물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 정의하면서 다른 동물과의 종차를 ‘이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은 본성적으로 강하지 않다. ‘이성’은 원래 얇은 유리와 같이 아주 쉽게 깨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물성’을 너무나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힘들게 단련시키지 않는다면 이성은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묵직한 청동 방패와 갑옷이 되기보다는 타자를 해치는 날카로운 청동 칼과 창이 될 것이다.

인간의 동물성은 우리가 너무나 연약하고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불거져 나온다. 인간은 언제든지 실수를 하고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이다. 물론 인간은 신도 천사도 아니며, 또 짐승도 악마도 아니다. 인간은 언제든지 천사처럼 될 수도 있고 짐승처럼 될 수도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무엇에 희망을 두어야 할 것인가? 한나 아렌트는 여전히 사유에 희망을 품는다. 인류는 21세기 세계 대전 중에 일어난 유대인 학살과 만행을 통해 인간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사유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악을 저지를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반성적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윤리적 주체로서 확립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 벌릴 참혹한 결과를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다시 한 번 목도하게 될 것이다.

장영란 한국외대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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