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론] 국가흥망 필부유책

‘천하흥망 필부유책’, 중국 명나라 말기 사상가 고염무(顧炎武)가 즐겨했던 말로 ‘나라의 흥망성쇠는 필부, 즉 모든 이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정치가였던 백범 김구 선생이 ‘국가흥망 필부유책’이라고 자주 했던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 정치권을 보면 여야 할 것 없이 너무 무책임한 것 같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세계 경제는 날로 악화되고 국내 경기는 하방 위험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 서로 상대방 탓만 한다. 특히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을 둘러싸고 여야 대립은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번에 논란이 된 검·경 개혁 법안은 물론 20대 국회 첫 패스트트랙 법안인 ‘유치원 3법’(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개정안) 역시 그 이름이 무색하게 ‘슬로트랙’으로 처리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패스트트랙 사과와 경제청문회를 국회 정상화 요구 조건으로 내세워 임시국회 소집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한국당과 추가경정예산 처리를 위해 국회 시정연설을 강행하는 여야4당 사이에 대화와 타협은 실종된 지 오래다. 원내대표 간 전화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정부가 6조7천억 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한 지 무려 두 달이 넘었다. 그러나 식물국회가 계속되다 보니 국회 심의는 착수 단계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최근 10년간 추경안 통과 최장 기록인 45일을 훌쩍 넘겼다.

지난 24일에는 3당 원내대표가 만나 국회 정상화에 극적으로 합의했지만 두 시간 만에 백지화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본회의를 비롯한 향후 국회 일정은 다시 안갯속에 빠졌다. 한국당의 내분으로 국회 파행은 장기화할 태세다. 지속적인 경기 침체로 서민들의 삶은 팍팍해져 가는데 정치권은 나 몰라라 정쟁만 일삼고 있는 모습을 보며 국민들은 오죽 한심하고 답답할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공전만 거듭하고 있는 국회를 보며 국민들의 분노는 이제 절망으로 바뀌었다. 오로지 당리당략과 지지자들을 위할 뿐 국가 전체의 이익과 장래는 안중에도 없다. 누구를 위한 싸움인지 이렇게까지 해서 무엇을 얻어 내려는지 알 수가 없다. 경제 상황은 더 나빠지고 세대·계층·지역 간 반목과 갈등, 적대와 분열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는 등 한국 사회가 총체적으로 위기인데도 말이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권은 막말과 선동으로 갈등을 조장하거나 자신의 지지 세력을 결집, 획책하고 있다. 극한 대립과 사생결단으로 본연의 임무와 책임은 온데간데없다. 정치인들이 국가 구성원인 국민들로 하여금 각자 책임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스스로 책임을 완수케 하여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마중물의 역할을 해야 하는 데도 말이다.

일 안하는 국회, 이는 국정을 주도하는 여당만의 잘못도 아니고 사사건건 발목을 잡은 야당 때문만도 아니다. 누구의 탓도 아닌 모두의 책임이다.

이제 총선이 10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자신의 책임과 본분은 다하지 않으면서 서로 남 탓만 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엄정한 심판이 있는 날이다. 무책임한 정치인을 국민 모두가 책임지는 날이기도 하다. 국가흥망 필부유책! 필부들의 각성이 필요한 시기다.

이도형 홍익정경연구소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