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기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처럼 미술사 대가로 평가받는 여성작가들은 왜 별로 없는 것일까? 전반적으로 여성들이 창의력이나 예술분야의 재주가 미흡했던 탓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은 1970년대 들어 린다 노클린(Linda Noclin) 등 페미니스트 미술사가들에 의해 제기되기 시작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들이 미술교육과 같은 제도로부터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사회를 지배해온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로부터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여성화가들에게 역사화의 근간인 누드화를 그리는 것은 금지되었고 상대적으로 열등하게 여겨진 풍경화나 정물화만을 그리도록 요구받았다. 요즘은 어떤가?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인물 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다. 큐레이터들의 경우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많은 수를 차지한다. 각 분야에 여성들의 역량이 남성들의 그것을 능가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뿌리깊은 남성중심주의적 가치관과 제도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달 28일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탄생일이었다. 나혜석기념사업회와 나혜석생가터문화예술제추진위원회에서는 올해도 학술행사와 기념 공연 등을 통해 그녀의 삶과 예술세계를 기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나혜석은 수원출신으로 개화한 가정에서 성장하며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한 초기 신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결혼 후에는 남편을 따라 세계 여행을 하며 선진 문물을 체득했다.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이고 여성운동가이며 페미니스트로서의 역사적 위상을 가진다. 그녀는 일제 식민지와 가부장적 사회라는 이중적인 한계 상황 속에서 여성이기 이전에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했고, 구체적 삶을 통해 기성관념의 남루를 벗어버리고자 한 자신의 주장을 실천해간 선각자였다. 뿐만 아니라 춘원 이광수보다도 먼저 자전적 단편소설인 <경희>(1918)를 발표한 현대문학가이며, 군국주의 일본에 저항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녀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매우 인색했다. 정부가 정한 <이달의 문화인물>(2000년 2월)로 선정되기 전까지 그녀의 존재는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도 못했다. 신여성으로서 자유연애와 이혼이란 그녀의 사생활을 들어 좋지 않게 평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물며 그를 친일파로 매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3.1운동 100주년 기념의 해와 관련된 많은 학술행사에서 그의 친일행적은 사실무근으로 판명됐다.
지역마다 지역출신의 유명 미술인의 이름을 빌려 그 예술가의 정신을 기리고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다지는 미술상들을 가지고 있다. 양구의 박수근 미술상, 대구의 이인성 미술상, 용인의 백남준미술상 등등. 수원은 나혜석이라는 독특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지만, 그녀의 이름을 딴 미술상을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하다. 미술상 제정의 필요성을 검토하는 전문가 간담회에서 한 전문가는 말했다. 나혜석의 정신은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이해해선 안 되고 한국을 넘어 국제적 수준의 상으로 발전시켜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한 세기가 지난 오늘, 우리가 아직도 그녀의 예술과 앞서갔던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근대적 사유의 틀 속에 꼭꼭 가두어 역사의 사각지대에 그녀를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찬동 수원시립미술관사업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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