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대학의 봄날은 다시 온다

대학의 봄날은 매우 역동적이면서도 낯선 정적에 휩싸여 있다. 강의실을 처음 들어서면 신입생들의 표정은 너무나 들떠 있고 가벼운데도 참을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학생들은 아직 나른하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너무 기나긴 수험생활로 지쳐 있는 학생들을 보면 안쓰럽기 짝이 없다. 이제 정말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데 여력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이상하게도 대학생들이 서투를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당연히 대학생이니 모든 것을 알아서 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 신입생들이 분명히 잠재력은 있는데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단지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풀어내는 방법을 약간만 예시해주어도 예상치 못한 훌륭한 결과물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대학의 교육은 영혼의 밭에 일종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씨앗이 싹터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영혼에 뿌려진 씨앗이 어떻게 자라날지를 보는 것은 쉽지 않으며 인내심이 필요하다. 인생의 길을 함께 걸어가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구의 영혼에 작은 꽃이 피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교육은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하데스(hades)에 씨앗을 감춰둔 것과 같다. 비록 어둠 속에 있지만 그것은 ‘빛’ 나고 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차갑고 딱딱한 대지를 뚫고 뻗어나가 또 다른 씨앗을 맺을 것이다.

플라톤의 비유에서 현명한 농부는 한여름의 아도니스의 정원에 씨를 뿌리고 여드레가 지나 정원이 화사하게 바뀌는 것을 바라고 기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축제를 위한 일에 불과하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뜨거운 태양 아래 시들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가 진정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농사 기술을 사용해 씨를 적절한 곳에 뿌리고 여덟 달이 지나 결실을 맺게 하는 것이다. 현명한 농부가 인내심을 갖고 씨를 뿌리고 돌보듯이 교양교육에서는 기다림의 미학을 갖춰야 한다. 대학 교양교육의 결과는 바로 눈앞에서 아름답고 화려하게 펼쳐지며 감탄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일부 대학들에서 전통적 교양과목들이나 비인기 전공과목들을 통폐합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대학은 시장논리에 따라 학생들이 선호하지 않는 과목이나 전공을 과감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을 오히려 미덕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한여름의 아도니스 정원처럼 잠시 화려하게 피어났다 시들어버리는 과목이나 전공을 설치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성과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대학들이 기존에 방만하게 운영되던 교양교육의 과목들을 정비해서 학생들의 기초 역량을 강화시키는 전통적인 인문강좌로 재편하는 작업도 많이 진행되어 정착되어 가고 있다.

현대에서 교양교육은 시민교육의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교육이 행복한 삶을 살도록 만드는 필요조건이라고 한다. 인간의 삶은 ‘노동’과 ‘여가’로 되어 있다고 한다. 노동은 여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노동을 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을 너무나 많이 배워왔다. 그렇다면 노동을 하지 않는 ‘여가’(schole)의 시간을 위해 우리가 준비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가는 단순히 휴식을 하거나 놀이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 필요하다. 진정으로 좋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혼의 훈련은 시민교육의 일환인 교양교육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욱 강화될 필요가 있다.

장영란 한국외대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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