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하나인 신톈디에 중국 공산당이 처음으로 전국대표대회를 연 일대회지(一大會址)가 있다. 현대 신중국의 출발을 알리는 장소라 당국이 정성스레 보존하는 곳이다. 일행들에게 장소를 설명해주고 있을 때였다. 관리인이 우리에게 다가와 반갑게 한국인이냐고 묻더니, 전시된 사진들 가운데 너희 조선 사람이 있다고 일삼아 알려주었다.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혁명전사로 중화인민공화국 혁명공동묘지에 안장된 이, 바로 전남 광주 출신의 정율성이었다. 관리인이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순간만큼은 한중 사이의 거리가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정율성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되었지만, 많은 사람에게 회자된 것은 아무래도 2014년 시진핑 주석이 우리나라에 와서 강연할 때 언급한 이후일 것이다. 그때 시 주석은 한중 사이의 인적 교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근현대 인물로 정율성, 김구 두 사람을 들었다. 각각 항일투쟁에 나섰던 좌우의 대표 인물로 삼은 듯하다. 좌우를 망라하고 중국이야말로 우리나라 항일투쟁의 저수지 같은 곳이었다고 강조한 셈이다.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이 중국이 김구 선생을 보호하기 위해 피난처를 마련해 주었던 항저우 인근에 기념비를 세우면서 ‘음수사원(飮水思源)’, 물을 마실 때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한다고 새겼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중국은 곳곳이 우리 항일투쟁의 무대다.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와 충칭이 그렇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있던 하얼빈이 그렇고, 김좌진 장군이 승리한 지린의 청산리가 그렇다. 북경도 초기 독립운동이 뿌리내리던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우리가 ‘광야’라는 시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육사도 항일투쟁 중 베이징의 감옥에 잡혀와 순국했다. 그가 공부하던 곳이 베이징의 공립 중국대학이었고, 광복을 위해 군사 교육을 받던 곳은 난징의 군사학교였다. 윤태옥 작가가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말했듯이, “쑨원, 장제스, 마오쩌둥과 같은 최고 권력자에서 대도시와 농촌 구석구석의 중국 인민들에 이르기까지, 상하이에서 베이징, 광저우 그리고 만주에 이르기까지 우리 독립운동의 첫 번째 동맹은 중국과 중국인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잘 알려졌지는 않아 보인다. 우리가 우리의 항일투쟁을 볼 때 여전히 이념의 틀 안에서만 바라보는데 원인이 있다고 본다. 이육사의 중국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은 그가 중국에서 깊게 사귄 인물이 사회주의 계열인 김원봉이고 이육사 자신도 사회주의에 상당히 경도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중국이 영웅으로 인정하는 정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중국의 공산혁명에 적극 가담했고, 후에 북한 정권의 수립에 관여한데다 북에서 중요 직책을 맡기도 했기 때문에, 내전을 겪은 우리의 정서에서 다루기 어려운 인물로 판단되었고 그래서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것 아닌가.
이념 대결이 극한으로 치달았던 현대사를 관통한 우리로서는 20세기 초 자유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이념의 스펙트럼 아래서 실천되었던 항일투쟁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는 것이 쉽지 않다. 동족상잔의 비극 6ㆍ25가 끝난 지 육십여 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그렇다. 올해가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21세기가 열리고도 두 번이나 강산이 변했다. 이제는 우리의 항일투쟁을 더 큰 시야에서 조명하고, 한중을 아우르는 항일투쟁의 공통 기억을 의미 있게 기리는 일에도 더 큰 진전이 있었으면 한다.
최민성 한신대 한중문화콘텐츠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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